넋이 나갈 듯 아름다운 설원 위 남성성 수업

영화 〈마이 선샤인〉

by rew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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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 키만큼이나 높게 쌓인 홋카이도의 눈. 스케이트 연습을 할 수 있을 정도로 꽝꽝 언 적막한 호수. 계절이 바뀌면 이 모든 것은 순식간에 사라져버린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이곳이 과연 그렇게 많은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곳인 적이 있느냐는 듯이. 그러나 눈과 얼음은 정말 사라진 걸까? 아무런 ‘흔적’조차 남기지 못하고? 봄의 푸른 길과 호수가 과연 그렇게 무심할까? 겨울과 봄은 그저 무심히 순서만 바꾸어 돌고 도는 것일까? 계절의 순환에 세 사람의 관계를 버무린 이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결코 그렇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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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 경기 중인 타쿠야의 눈에는 명확한 초점이 없다. 멍한 눈빛이다. 하키 훈련에서도 마찬가지다. 타쿠야는 또래 친구들을 따라 관성적으로 운동 훈련과 시합에 참여할 뿐, 거기서 아무런 재미와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변화는 이성애적 욕망 혹은 아름다운 것에 대한 순수한 감탄에서부터 시작한다. 아이스 링크장에서 피겨 스케이팅을 연습하는 사쿠라를 보면서다. 그 모습에 매료된 타쿠야는 혼자 피겨 연습을 해본다. 무기력한 소년이 변화하기 시작한다. 자발적으로, 열의를 갖고서. 타구야는 계속 넘어지지만 다시 일어서기를 멈추지 않는다.


히사시는 그런 타쿠야에게 가만히 다가가 호의를 건넨다. 사쿠라의 피겨 코치인 그는 화려했던 선수 생활과 도쿄에서의 코치 생활을 접고 이곳에서 동성 연인과 함께 지내는 중인데, 타쿠야의 순수하고 자발적인 호기심에 마음이 쓰인다. 그래서 조금씩, 아주 조금씩 타쿠야를 조력한다. 무기력한 청소년 남성이 선한 의지와 마음을 가진 성인 남성의 안내에 따라 새로운 기예를 학습한다. 히사시는 반복적으로 타쿠야의 피겨 자세를 교정한다. 몸을 앞으로 구부린 채 질주하는 하키와 달리 피겨는 허리를 반듯하게 펴야 올바른 자세가 나오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관계는 남성성이 학습되고 전수되는 바람직한 과정으로 보인다. 두 사람이 서로에게 마음을 열고 진심을 다해 피겨를 가르치고, 학습하는 장면은 정말 넋이 나갈 정도로 아름답다. 아마도 이는 타쿠야 또래인 우리 시대의 남자아이들에게 가장 필요하지만, 그들이 결코 가져본 적 없는 관계의 모습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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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히사시-타쿠야의 이상적인 남성성 수업은 묘한 긴장 역시 낳는다. 사쿠라 입장에서 타쿠야는 불청객이다. 그전까지는 자기 혼자만 피겨 훈련을 받았기 때문이다. 히사시는 사쿠라와 타쿠야가 함께 호흡을 맞춰야 하는 아이스 댄스 훈련을 제안하는데, 이는 타쿠야에게는 확실히 이득이다. 하지만 사쿠라는 아이스 댄스가 자신에게도 도움이 될 거라는 히사시의 말을 깊이 신뢰하지 못한다. 두 사람의 순수한 남성성 수업이 사쿠라에게는 기존에 자신이 구축한 스승-제자 관계의 상실로 다가간다. 타쿠야와 사쿠라가 손을 잡고 서로의 몸에 의지한 채 아이스 댄스를 할 때마다 타쿠야의 친구들이 놀리듯 환호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전까지 사쿠라는 독보적 실력을 가진 피겨 선수였으나, 타쿠야와 함께 훈련하고 나서는 그저 타쿠야 또래 남자아이들에게 ‘피겨의 전리품’처럼 인식되기 시작한다. 사쿠라가 이 과정에서 느끼는 감정에 청소년기의 풋풋한 감정이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이는 의구심과 질투를 완전히 억누를 수 있을 정도는 아니다.


사쿠라가 우연히 동성 연인과 함께 있는 히사시의 모습을 목격한 후로, 이 소외감은 더욱 심해진다. 사쿠라는 타쿠야에 대한 히사시의 애정에 다른 맥락이 있는 것은 아닐지 의심하고, 결국 두 사람을 떠난다. 이 과정에서 히사시 역시 자신의 순수한 애정이 왜곡되는 데 당혹감을 느끼지만, 그의 애인조차 타쿠야가 일깨운 피겨를 매개한 순수한 사랑의 마음에 질투 혹은 소외감을 느끼며 상황은 악화된다. 이렇게 눈과 얼음으로 가득한 순백의 세계에서 두 사람(혹은 세 사람)이 빚어낸 관계는 무너진다. 히사시는 애인과 결별한 후 홋카이도를 떠나고, 사쿠라가 사라진 후 큰 상실감을 느낀 타쿠야 역시 다시 하키와 야구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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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사시는 홋카이도를 떠나기 위해 운전해 길을 가던 중 타쿠야를 만난다. 이미 봄이 되어 모든 눈과 얼음이 녹은 후다. 두 사람은 지난겨울에 사쿠라와 함께 피겨를 연습한 한 호수에 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캐치볼을 하며 짧은 말로 사과와 감사의 마음을 주고받는다. 그리고 마지막, 텅 빈 거리에서 타쿠야와 사쿠라가 서로를 멀리서 마주하며 영화는 끝난다. 그새 사쿠라는 기량이 한층 발전해 피겨 선수의 길을 이어가고 있다. 또래 남자아이보다 훨씬 성숙했던 사쿠라는 두 사람이 자기에게 준 상처를 극복한 듯 보인다. 눈과 얼음이 녹아 풀의 생명을 틔우듯이. 그리고 사쿠라처럼 하시사와 타쿠야의 남성성 수업도 두 사람이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데 뜻깊은 자양분이 되어줄 것이다. 영화를 보고 난 후, 정말 그러기를 간절히 바랐다. 지금의 현실에 존재하기 어려운 관계여서 더더욱 그랬다. 제77회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초청작.



*영화 매체 〈씨네랩〉에 초청받은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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