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홀하게 아름답고 뼛속까지 고통스러운

영화 〈햄넷》

by rew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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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홀하게 아름답고 뼛속까지 고통스러운 이 영화가 던지는 몇 가지 화두가 있다.


1. 아녜스는 자연과 연결된 여자다. 숲속에 있기를 좋아하고, 약초에 해박하다. 그래서 ‘마녀의 딸’, ‘집시’ 등등으로 마을과 가족에게서 공공연하게 모욕당하는 일이 잦다. 한편, 윌리엄 셰익스피어 역시 그의 아버지에게 미움받는다. 교육은 받았는데 쓸모없는 글쓰기에만 매진하며 가업인 가죽 장갑 만들기에 소홀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아녜스와 셰익스피어 모두 가족과 사회 규범에서 벗어난 존재들이다. 마을의 두 외톨이가 사랑에 빠지는 건 당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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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최초의 위기는 셰익스피어가 창작의 고비를 맞으며 찾아온다. 아녜스는 변함없이 남편을 응원하고 북돋지만 셰익스피어는 작업이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 견디지 못한다. 그래서 못나게 군다. 아녜스는 남편을 런던으로 보내기로 한다. 심지어 어린 딸이 있고, 또 다른 임신을 한 상태인데도. 그곳에서라면 셰익스피어가 다시금 예술의 활기를 찾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일탈자들의 사랑이었던 두 사람의 관계가 ‘남성 예술가-아내’의 관계로 변모한다(요즘 최애 중 하나인 폴 메스칼이 연기한 매력적인 셰익스피어가 미워지기 시작하는 대목이다).


3. 두 번째 위기가 찾아온다. 세 아이 중 하나가 죽으면서다. 죽은 아이의 이름은 햄넷. 햄넷은 쌍둥이 남매 주디스와 한 몸처럼 자랐으나, 바로 그 이유로 그녀 대신 자신이 죽기로 ‘결심’한다. 아버지 셰익스피어가 런던으로 떠나며 가족을 잘 지키라고 당부한 것도 햄넷의 결심에 영향을 끼친다(누이를 살리겠다는 햄넷의 의지와 그가 그 결심에 다다르기까지의 과정은 슬퍼서 아름답다). 햄넷은 그렇게 죽는다. 그러나 그 자리에 셰익스피어는 없다. 심지어 장례식 이후 또다시 곧바로 런던으로 떠난다. 슬픔은 아녜스만의 몫인 듯 보인다. 숲, 약초와 연결되어 아름다운 생기를 뿜는 아녜스는 이제 없다. 슬픔에 잠긴 채 생기를 잃고 남편을 원망하는 한 여인만 남아 있다. ‘남성 예술가-아내’ 관계 구도가 심화되어 성공한 남편과 그로부터 소외된 채 자기 세계에 갇힌 여자만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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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그러나 셰익스피어는 위대한 예술가다. 그에게는 아들 햄넷을 추모할 다른 방법이 있다. 그는 죽은 아들을 그리워하며 〈햄릿〉을 썼다(당시 ‘햄릿’과 ‘햄넷’은 같은 말이었다). 작품 속에서는 아들이 아닌 아버지가 죽고, 아들은 그 슬픔을 감당하지 못한 채 무너진다. 남편이 아들의 이름을 헛되이 써버렸다고 분노하던 아녜스는 연극에 압도되고, 햄릿이 죽을 때 다른 관객들이 우는 데서 커다란 충격을 받는다. 추모에 하나의 방법만 있다는 게 아니라는 걸 안다. 이렇게 비난의 여지가 있는 예술과 그 창작자, 그 창작자가 돌봄 제공자와 맺는 관계가 복권된다.


5. 〈햄넷〉은 예술이 인간의 고통에서 출발한다는 명제를 분명하게 내세워 보이면서도, 남성 예술가가 기댄 젠더화된 구조를 드러내 보이기도 한다. 아들의 슬픔이 걸작의 탄생으로 이어졌듯이, 아녜스의 돌봄과 지지가 셰익스피어를 예술가로 만들었다. 셰익스피어와 〈햄릿〉은, 고통과 슬픔 속에서, 무엇보다 아녜스의 돌봄과 헌신 속에서 태어났다. 스스로 비롯하는, 홀로 선 예술은 없다. 인간의 고통을 다루는 데 탁월한 역량을 보여온 클로이 자오는 이 영화에서 자기 재능(아마 그녀 역시 누군가에게 빚지고 있을)을 다시 한번 경이롭게 펼쳐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