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은 《김지은입니다》(봄알람, 2020)
스스로를 민주주의자라 말하며 미투를 지지한다고 발언하는 와중에도 성폭행을 일삼았던 안희정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는 자기 말과 행동의 극명한 대비에서 아주 조금이라도 수치심을 느꼈을까? 아니면, 안희정의 '모순'은 여의도 정치, 권력의 필연적 속성이었을까?
말할 수 없음. 문제제기할 수 없음. 그것이 바로 위력입니다.
안희정의 수행비서였던 김지은 씨는 눈빛이나 호흡만으로 그의 기분을 파악해야 했다. 안희정이 조금만 언짢음을 표시하면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아야 했다. 안희정이 '민주주의자'인 동시에 성범죄자일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거창한 민주주의를 말하기 위해서는 일상의 민주주의가 선행되어야 한다. 일상의 민주주의 없는 거창한 민주주의는 풍선과 같다. 잔뜩 부풀어 올랐지만 작은 충격에도 내실 없음이 탄로 난다.
안희정은 진짜 민주주의자가 감당해야 할 고민, 배려, 공감, 소통, 이해, 연대와 같은 단어의 무게를 단 한 번도 짊어진 적이 없다. 그 모든 무게를 '아랫사람'에게 떠넘겼다. 민주주의는 껍데기였다. 애초에 '민주주의자 안희정'은 없었다. 더 높은 지위, 더 강한 위력을 갈망하는 사람이 있었을 뿐이다.
나는 안희정이 권력을 얻은 후 추악해졌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추악한 힘을 얻기 위해 권력을 갈망했다고 생각한다. 표정과 눈빛만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취할 수 있는 지위를 갈망했다고 생각한다. '민주주의'라는 옷이 권력을 얻는 가장 좋은 수단이라 판단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결국, 위력(권력)은 안희정의 정치하는 이유였다. "위력의 무서운 점은 위협적인 말을 듣지 않아도, 스스로 몸이 굽혀진다는 것이다. 위력은 상대를 압도하는 힘이다. 타인의 의사를 제압할 수 있는 유형적·무형적인 힘이다." 안희정은 자신이 획득한 위력의 달콤함에 취했을 것이고, 그럴수록 더 큰 위력을 갈망했을 것이다. 성범죄는 그가 갈망한 위력의 가장 끔찍한 발현이었다.
안희정의 더러운 욕망과 그 욕망을 가능케 한 젠더 권력은 더 좋은 세상을 만드는 데 보탬이 되고 싶었던 김지은 씨의 꿈과 삶을 처참히 박살 냈다. 미투 이후의 시간을 기록한 김지은 씨의 글을 읽다 보면 그가 안희정과 싸우는 동안 얼마나 힘들고 외로웠는지를 알 수 있다. 감히 공감한다고 말할 수조차 없는 힘듦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런 김지은 씨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았다. 김지은 씨가 그 위력 앞에서 살아남기 위해 했던 모든 행동은 '피해자다움'을 의심하는 증거로 활용됐다. 안희정의 비위를 맞추고, 공사 구분 없이 안희정의 모든 일상을 수행하던 과정의 기록(사진, 문자 등)이 김지은 씨를 향한 2차 가해의 무기로 되돌아온 것이다. 진실을 말하는 김지은 씨의 목소리는 경청되지 않았지만, 가해자와 그가 안주해 온 젠더권력을 지키려는 거짓말들은 날개단 듯 퍼져나갔다.
다행히 김지은 씨 곁에는 그에게 힘이 되어줄 사람들이 있었다. 물론 김지은 씨와 연대하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이 그간의 상처를 없던 일로 해줄 순 없다. 아마도 김지은 씨는 평생 안희정과 싸우며 생긴 흉터를 마주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끝나지 않았다. 그 흉터가 수치심이 아닌 단단함과 따뜻함으로 채색되도록 하는 일은 김지은 씨와 연대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몫이다. 김지은'들'이 삶을 이어갈 수 있도록 말이다. 우리는 피해자의 경험과 고통에 주목함으로써, 폭력을 양산하는 불합리한 권력·위력을 끊임없이 질문해야 한다. 《김지은입니다》가 오랫동안 승리와 자긍심의 기록으로 남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