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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wr Jan 17. 2021

과학으로 무장한, 이야기의 탄생

윌 스토, 《이야기의 탄생》(2020)

과학은 이야기와 충돌할까? 


  《동물들의 비밀신호》(울리히 슈미트, 2008)에 나오는 이야기다. ‘코끼리 떨림’이라는 말이 있다. 코끼리를 사냥하기 전, 사냥꾼들의 몸이 덜덜 떨리는 현상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코끼리를 향한 공포, 경외, 정복욕 등을 포괄하는 신비한 경험을 일컫는 단어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사람들은 코끼리 떨림 이야기를 진지하게 듣지 않았다. 커다란 코끼리 앞에서는 누구나 떨지 않을 수 없을 것이므로, 코끼리 사냥꾼이 겁먹은 걸 감추기 위해 말을 만들어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코끼리 떨림에는 과학적 근거가 있었다. 동물학자들은 코끼리가 우거진 수풀도 거뜬히 통과하는 강력한 음파로 최대 10킬로미터 떨어진 무리와도 소통할 수 있음을 알아냈다. 코끼리가 뿜는 음파가 인간의 가청한계에 미치지 못하는 13~24헤르츠였기에 코끼리 사냥꾼이 소리는 듣지 못한 채 떨림을 느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코끼리 떨림은 경외도, 공포도, 정복욕도, 거짓말도 아닌 음파의 파동에 의한 과학이었다. 


  코끼리 사냥꾼의 설명과 동물학자의 설명 중 어떤 것이 더 흥미로운가? 누군가는 과학적 설명이 이야기의 아우라(aura)를 앗아갔다고 불평할 것이다. 음파의 진동임이 밝혀진 코끼리 떨림에 상상력을 덧붙이거나 문화적 해석을 시도하는 일이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그들은 왜 인간이 코끼리에게 공포와 경외를 느끼는지, 왜 인간은 공포와 경외의 대상을 사냥하려 했는지에 관한 이야기가 불가능해졌음을 아쉬워한다. 과학이 이야기가 뻗어나갈 시공간을 잘라내 버렸다고 불평하는 것이다. 


  하지만 과학은 이야기를 확장하기도 한다. 외롭고 쓸쓸하게 사냥당하던 코끼리가 사실은 수 킬로미터 떨어진 무리와 죽기 전까지 끊임없이 신호를 주고받았다는 슬픈 이야기는 어떤가? 코끼리 떨림의 과학적 근거가 밝혀진 이후에도 여전히 ‘미신’에 집착하는 한 노인의 고집을 다루는 이야기는 어떨까? 이 이야기들이 공포, 경외, 정복욕으로 코끼리 떨림을 설명하는 이야기보다 수준이 떨어진다고 할 수 있을까?  



매력적인 이야기의 과학적 조건


  《이야기의 탄생》은 과학이 이야기의 가능성을 어떻게 확장시키는지를 보여준다. 과학은 이야기를 차단하기는커녕 함께 어우러져 증폭시킨다. 책은 매력적인 이야기의 조건을 신경과학·뇌과학·심리학을 근거로 설명해, 수많은 이야기론에 지친 독자들에게 새로운 자극을 준다.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의 플롯 구성은 오랫동안 좋은 이야기의 조건으로 여겨져 왔다. 왜 그럴까? 좋은 이야기들이 공통적으로 5단계 플롯 구조를 취하는 것이 순전한 우연이었을까? 


  뇌는 외부에서 받은 정보를 신경계 모형으로 변환한다. “난해하고 무질서한 이야기를 이해할 만한 이야기로 바꾸는 작업은 스토리텔링 뇌의 핵심 기능이다.” 복잡한 세상을 이해 가능한 방식으로 받아들여 세상에 대한 통제력을 갖고 있다는 환상을 형성하는 것이다. 이 단순한 신경계 모형은 우리가 세상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기에 안정감을 준다. 이른바 심리학에서 말하는 ‘순진한 사실주의’다. 편협하거나 오만해서가 아니다. “심리적으로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기 자신을 영웅으로 생각한다.”


  모든 이야기는 인간의 신경 모형에 통제할 수 없는 사건이 개입하며 시작된다. 이 사건은 ‘자신이 옳다’는 주인공의 믿음을 흔든다. 기존 방식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발생해 자신이 옳다는 ‘도덕적 우월성’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하는 것이다. 균열 이후는 정서적 충격이다. ‘충격’이라는 표현도 부족하다. 심리학자 새러 김블(Sarah Gimbel)에 따르면, 신경 모형에 위협이 가해질 때, 뇌에서는 “숲을 거닐다 곰을 만날 때 일어날 법한 반응”이 일어난다고 한다.


  그래서 주인공은 고뇌하기 시작한다. 자기 모형에 결함이 있다는 사실에 당황하고, 그로 인해 생겨난 갈등과 극적인 질문을 헤쳐 나간다. “나는 누구인가? 이 상황을 바로잡으려면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극적 질문을 마주한 인물은 기존 신경 모형을 깨는 고통스러운 변화의 과정을 거친다. 위기와 고난을 극복하고 세상에 대한 통제력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변신의 성공은 해피엔딩이고, 변신의 실패는 주인공의 파멸이다. 



‘이야기의 탄생’을 꿈꾸는 모든 사람들에게


  결국 작가는 과학을 통해 이야기의 힘을 더욱 키우고자 한다. 이야기에 몰입한 사람의 뇌를 스캔해보면, 자아 감각을 관장하는 뇌 영역이 억제되어 있다고 한다. 우리의 ‘진짜’ 의식이 뒤로 밀려나고 소설 속 인물의 의식이 그 자리를 대체하는 것이다. 심리학에서 ‘도취’라 부르는 현상이다. 이야기가 설득력 있고 강렬할수록 우리의 진짜 의식은 더 멀리 밀려난다.


  작가는 이야기 창작자들이 과학적 근거를 활용해 독자에게 더욱 강렬한 도취 경험을 제공하길 원한다. 책에 소개된 내용을 무기 삼아 자신만의 이야기를 구축해나가길 바라는 것이다. 매력적인 이야기를 꿈꾸는, 매력적인 이야기를 판별할 힘을 기르고 싶은 모두가 읽어볼 만한 책이다. 



*이 글은 '뉴스페이퍼'에 송고한 글입니다. 아래에 원문 링크를 함께 첨부합니다.

http://www.news-paper.co.kr/news/articleView.html?idxno=753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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