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rewr May 02. 2021

이토록 ‘하자’ 많은 여자들이 꾸려나가는 가족

〈동백꽃 필 무렵〉(2019)

  〈동백꽃 필 무렵〉에는 서로 결이 다른 몇 개의 서사가 교차한다. 대체로 진부한 서사지만, 특별히 빛나는 서사도 있다. 비중이 그리 크진 않은 이 특별한 서사가 〈동백꽃 필 무렵〉을 특별한 드라마로 만든다.


  첫 번째는 낡고 오래된 이성애 판타지 서사다. 여기서는 미혼모라 손가락질받는 동백(공효진 배우)과 그를 순박한 마음으로 사랑해주는 남자(강하늘 배우)가 주인공이다. 사연 많은 불쌍한 여자가 백마 탄 왕자님을 만나 행복해진다는 식이다. 드라마는 이 고루한 설정을 옹호하기 위해 사이코패스 살인마가 동백을 노린다는 설정을 추가한다. 남자가 여자를 ‘지켜줄’ 명분을 만든 것이다.


  두 번째인 모성의 신화화 서사 역시 첫 번째와 마찬가지로 낡고 오래된 것이다. 더 좋은 곳에서 자랐으면 하는 마음으로 동백이를 버렸으나 평생 잊지 못하는 정숙(이정은 배우) 그리고 미혼모라는 어려운 조건 속에서도 아들 필구(김강훈 배우)를 사랑으로 키우려는 동백. 이들을 추동하는 건 ‘신화화된 모성’이다. 드라마에는 ‘엄마는 무언가 특별하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내레이션과 장면이 수도 없이 나온다. 엄마와 자식 간에 다른 서사는 필요하지 않다는 듯, 모든 장면이 ‘무한한 사랑을 지닌 엄마’를 근거로 전개되는 것이다.


〈동백꽃 필 무렵〉 스틸컷 ⓒKBS


  세 번째는 동백과 향미(손담비 배우)의 서사, 즉 소외되고 배제된 여자들의 서사다. 〈동백꽃 필 무렵〉이 오랫동안 반복되어 온 이성애 서사, 모성 서사를 별다른 변주 없이 차용했음에도 특별해질 수 있는 건 이 세 번째 서사 덕분이다.


  동백이는 술집을 운영하는 미혼모다. 마을 남자들은 동백이의 ‘예쁜 얼굴’과 ‘도도하면서도 순박한 태도’에 반해 그녀의 술집을 찾는다. 하지만 이는 동백이가 마을 사람들에게 하대받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음식과 술만 파는 동백에게서 다른 무언가를 기대한 건 남자들이지만, 사람들은 정작 동백이 팔지도 않은 무언가를 탓하며 그녀를 욕한다.


  향미는 동백의 술집에서 일한다. 향미는 도벽이 있고, 술 없인 못 살며, ‘꽃뱀 짓’도 서슴지 않는다. 포주에게 큰돈을 빚졌으며, 곧 무연고자 신세가 될 판이다. 그런 상황에서도 돈을 빌리고, 훔치고, 버는 족족 남동생에게 보낸다. 하지만 동생은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향미를 누나 대접하지 않는다.


〈동백꽃 필 무렵〉 스틸컷 ⓒKBS


  동백은 그런 향미를 품는다. 오랫동안 근거 없는 비난을 받아온 동백은 향미에게서 자신을 본다. 자신만은 그녀를 다르게 대해주겠다고 마음먹는다. 사람들은 그녀들이 어떤 환경에서 어떻게 살아올 수밖에 없었는지에는 관심이 없다. 그들은 동백과 향미의 삶이 하찮을 수밖에 없는 근거를 찾을 때만 그녀들의 과거에 관심을 가진다. 그리고 여기에 ‘팔자’라는 이름을 붙여 넘을 수 없는 굴레로 만든다.


  동백 역시 이 무시무시한 ‘팔자론’에 자주 흔들린다. 자신을 좌절시키는 일이 있을 때마다 팔자의 위력을 체감한다. 하지만 그러는 동시에 자신과 닮은 향미에게 마음을 주고, 숨 쉴 수 있는 공간을 줌으로써 조금씩 팔자의 손아귀에서 벗어난다. 팔자에 종속된 그녀와 향미의 삶에 자율의 공간을 부여해나가는 것이다. 그리고 결국 팔자론에 완벽히 종속되어 체념한 채 살아가던 향미에게 희망을 주고 그녀의 가족이 된다. 비록 향미와 동백은 슬픈 결말을 맞이했지만, 짧은 순간이나마 둘은 그 누구보다 끈끈한 가족이었다.


  이토록 ‘하자’ 많은 여자들이 꾸려나가는 가족. 여전히 ‘가족제도 붕괴’ 운운하며 비혼모 연예인의 육아 예능 출연을 반대하고 자녀가 엄마의 성씨를 쓸 수 있도록 하는 법 개정을 우려하는 사람들이 〈동백꽃 필 무렵〉을 주의 깊게 봤으면 좋겠다. 〈동백꽃 필 무렵〉이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는 시대가 그들의 시대이기도 하다는 사실이 놀랍고 생경했다. 내가 반대하고 우려하는 건, 그들의 의견이 공적 담론에서 여전히 힘 있는 말로 통용되는 현실이다. 모든 변화가 빠를 필요는 없지만, 〈동백꽃 필 무렵〉이 품은 변화는 빠르면 빠를수록 좋을 것 같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