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처음 만나는 자유(Girl, Interrupted)〉(1999)
196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 〈처음 만나는 자유〉는 정신질환으로 요양병원에 입원한 젊은 여성들 사이의 일을 다룬다. 환자들은 각자의 입원 이유가 있다. 수잔나는 자살기도를 했다는 이유로 클레이 무어 요양원에 들어왔다. 수잔나의 삶은 부모의 남성 동료와 위력에 의한 성관계를 맺은 것으로 인해 꼬이기 시작됐다. 그런데 부모는 아무것도 모른다. 수잔나가 계속 병원에 있으면 크리스마스 파티 때 사람들한테 뭐라 둘러댈지를 걱정할 뿐.
수잔나는 남들이 알지 못하는 상처를 공유한 클레이 무어 요양원의 동료 환자들과 빠르게 가까워진다. 수잔나와 그의 친구들은 요양원 관리자들 몰래 자신들만의 세계를 구축한다. 처방받은 수면제를 먹지 않고 밤에 병실을 빠져나와 의사들이 기록한 자신들의 상담일지를 읽는 장면은 이 영화에서 가장 상징적인 장면이다. 이들이 무엇을 빼앗겼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수잔나와 친구들은 의사들이 기록한 자신의 진료기록을 한껏 비꼬며, 깔깔거리며 읽는다.
의사들이 수잔나와 그 친구들의 이야기를 듣고 기록한 진료기록임에도, 그것은 그들의 서사가 ‘아니다’. 서사를 가졌다는 건, 일상의 수많은 사건 중에서 무엇을 선택하여 자신을 재현할지를 결정할 수 있는 권리를 지녔다는 의미다. 하지만 진료기록 속 그들의 서사는 그들이 말하고 느끼는 것과 너무도 거리가 멀다. 수잔나와 친구들은 진료기록을 웃음거리로 만듦으로써 비관에 빠지지 않은 채 사회, 의사, 부모부터 서사를 도둑질당했음을 선포한다. 이 장면은 정신질환자들이 그들을 정신질환자라 ‘진단’한 세상에 날리는 가장 유쾌하고도 심오한 반격이다.
하지만 수잔나와 그 친구들이 만든 세계가 마냥 아름답고 전복적인 것만은 아니다. 대안적 세계에 대한 애착이 강한만큼, 거기서 받는 상처도 크다. 리사*는 클레이 무어 요양원에서 가장 문제적인 환자다. 탈출을 일삼고, 직설적인 말로 다른 환자들에게 상처를 주는 일도 많다. 요컨대 리사는 대안적 세계의 리더이자 ‘일반’세계의 골칫거리다.
대안적 세계 안에서 리사가 제공하는 자유의 크기는 거대하다. 하지만 리사의 자유는 폭력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마음속 아주 깊은 곳까지 상처 입은 리사는 그 깊이를 동료를 구하는 데도 쓰지만 동료에게 상처를 주는 데도 쓴다. 리사에게 완전히 매료되었던 수잔나는 점점 그녀에게 거리감을 느낀다. ‘일반’세계에서 쫓겨나 대안적 세계에서 안식을 찾은 수잔나는 다시 두 세계의 경계에 선다.
수잔나가 리사에게 느끼는 혼란을 묘사하는 장면들은 〈처음 만나는 자유〉의 또 다른 성취다. 영화는 정신질환자들의 세계를 무턱대고 낭만화하지 않는다. 그들이 대안적 세계를 건설할 능력을 갖췄음을 보여줌으로써 그들을 정신질환자라고 진단한 세계를 풍자하는 동시에, 대안적 세계와 ‘일반’세계를 어떻게 중재할 것인지를 고민하는 것이다.
완벽한 저항도 아니고, 완벽한 투항도 아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의 삶이 그렇듯, 정신질환자의 삶은 저항과 투항의 이분법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우리는 그저 ‘회색지대’에서 더 나은 삶을 위한 적당히 위태로운 균형을 이어갈 수 있을 뿐이다. 〈처음 만나는 자유〉는 어느 한쪽으로 밀어붙이는 대신 두 세계 사이의 화해를 모색한다. 극단으로 밀고 나가는 멋들어진 상징만큼이나 어설픈 곡예를 닮은 일상을 담아내는 일도 필요한 법이다. 정신질환을 ‘극복’의 대상으로 보지 않는 것과 더불어, 두 세계가 공존할 수밖에 없음을 설득력 있게 보여 준 이 영화를 높이 평가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안젤리나 졸리가 연기한 리사는 정말 최고다. 캐릭터뿐만 아니라 안젤리나 졸리의 연기도 그렇다. 압도적으로 파괴적인 에너지를 뿜는 그녀의 연기는 내가 본 그녀의 배역을 통틀어 가장 강렬했다. 리사가 주인공인 영화를 만든다면, 이 영화와는 또 다른 매력과 의미 그리고 고민을 던져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