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회사의 1년 연수과정으로 Paris에 체류할 때 한 여름 센(Seine) 강 어느 다리 위에서 찍은 사진이다. 한참 젊은 시절이라 그런지 똥배도 없고 피부도 꽤 희고 어쨌든 현재의 내 모습과는 너무도 다르다. 이제는 내 모습이 너무 많이 변해서 그런지 나도 한때는 저런 모습의 젊은 시절이 있었다는 것이 좀 이상하게까지 받아들여지고, 심지어 이 사진을 보면내가 아닌 전혀 다른 사람을 보는 것 같기도 하다.
저 다리 위에서 이 사진을 찍을 때만 해도 뭔가 생각이 참 많았을 것이다. 영원히 남아있을 것 같았던 미지의 미래에 대한 고민도 많았을 것이고 또 미래에 대한 많은 기대 또한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사진을 찍은 시점으로부터 이미 30년 가까운 세월이 훌쩍 흘러버린 이제는 남은 미래보다 지나간 과거가 더 길 수 있다는 것도 받아들여야 할 나이가 되어버렸다.
1. 빠삐용의죄를 생각했던 시간
회사의 해외 연수 프로그램에 어렵게 선발되어 1년간 해외 특정 국가에서 지역 연수를 할 기회가 있었다. 난 사실 일본 지역으로 가기를 희망했는데, 회사 인사부서에서는 은근히 프랑스를 추천했고 대학에서의 전공이 불어학이었던 나는 프랑스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결국 프랑스로 가는 것으로 결정했다.
프랑스로 가기 전 몇 주간에 걸쳐 진행된 회사의 국내 연수 과정을 마치고 마침내 1995년 한 여름 8월 프랑스 Paris에 도착했다. Paris에서의 연수 생활은 직장 생활 7~8년 만에 처음으로 경험하는 완전한 자유의 시간이었다.
시청 근처에 있던 회사에 출근하고, 일하고, 퇴근하고, 술 마시고, 잠자고.... 그리고 다시 출근하기를 반복하던 그런 기계 같은 생활에서, 어느 날 아침에 눈을 떠 보니 내 몸은 유럽 프랑스의 Paris라는 도시 한 복판에 홀로 와 있었고, 아침에 일어나면 허둥대며 서둘러 출근해야 할 곳조차 없는 그런 전혀 익숙하지 않은 처지에 놓여 있게된 것이다.
한마디로 오늘 무엇을 해야 할지가 정해진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어학원을 다녀도 되고, 공원에 앉아 있서도 되며, 박물관에 다니거나, 이것도 저것도 다 싫으면 그저 멍하니 집에 누워있어도 회사는 물론 누구 하나 뭐라고 할 사람이 없었다.
처음 며칠간은 정말 오랜만에 만끽하는 이런 자유스러움이 너무도 좋았다. 언제나 뭔가에 쫓기듯 또는 다람쥐 쳇바퀴 돌듯 살아야만 했던 월급쟁이 인생에서 이제는 아무것에도 구애받지 않고 오늘 하루의 일정을 모두 내 맘대로 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그것이 너무도 좋았던 것이다.
그런데 정말 의외였지만 이런 무한한 자유 속의 생활에 영 적응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것을 부담스러워하는 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는 데에는 그로부터 불과 몇 주도 걸리지 않았다.
초등학교, 중고등학교, 대학교, 군대, 직장 생활 등 지나온 전 인생이 항상 아침에 일어나면 어딘가로 가야 했고, 또 어딘가에 소속되어 선생님, 상급자 또는 직장 상사로부터 끊임없는 지시를 받는 생활을 해왔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아침에 일어나 보니 이제는 오늘 무엇을 해야 할지를 오직 나 홀로 스스로 정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 것에 좀처럼 적응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27살의 젊은 나이에 요절한 소설가 이상이 '권태'라는 작품 속에서 시골로 내려온 후 오랜만에 마주치게 된 주변 풀과 나무들의 초록색을 너무도 사랑했다고 했지만 이내 오래지 않아 들판을 온통 덮고 있는 그 초록색이 이 세상에서 가장 지겨운 색이라고 개탄했던 것과 마찬가지인 경우였던 것 같았다. 넘쳐나는 자유를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어 어쩔 줄 모르겠는데 그러한 자유가 매일 같이 끊임없이 주어지니 견디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결국 어느 순간부터는 이제 그토록 동경했던 넘치는 자유가 오히려 두렵고 너무도 피하고 싶은 공포의 대상으로 바뀌어 버리게 되었다.
그뿐 아니었다. 내가 살고 있는 공간의 모습도 평생 살아온 익숙한 한국의 모습과는 너무 달랐다. 주변에 나처럼 생긴 사람은 좀처럼 보기 어려웠고, 백인, 흑인, 아랍인 등 전혀 다르게 생긴 사람들과 알아듣기 어려운 그들의 언어만이 난무했다. 거리의 간판, 음식, 심지어 도시의 냄새까지도 생소하고 달랐다.
물론 본사 근무 시에도 해외 출장을 다니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는비록 몇 주간의출장기간 동안은 생소한 환경에서 다소 힘들게 보내더라도, 그 기간만 지나면 바로 한국으로 돌아와 다시 익숙한 환경 속에서 생활할 수 있었다. 하지만 Paris에서는 달랐다. Paris에서는 이런 생소한 환경에서 무려 1년간이나 더 살아야 했는데, 그런 생각을 하니 이제 슬슬 겁이 나기도 했다.
빠듯한 살림에 학비, 생활비 등으로 마음 졸여가며 살아야 하는 어려운 처지의 유학생들이 얼마나 많은데 회사가 집, 생활비, 자동차까지 다 부담해 주면서 당시 최고 선진국 중 하나인 프랑스에서 일도 할 필요 없이 그저 불어를 배우고 여행 다니라는 것뿐인데 그것이 겁난다니 그런 사치스러운 걱정이 어디 있냐고 비난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노는 것도 놀아본 사람이 놀 줄 안다고, 평생 쫓기는 시간 속에서 아등바등 살기에 급급했던 삶에 너무도 익숙해 있었던 1995년 그 당시의 나 같은 젊은 한국 직장인에게는 갑자기 주어진 넘쳐나는 자유와 시간이 도무지 감당되지가 않았다.
물론 나와 함께 Paris로 연수 갔던 동료 중에는 그런 부담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오히려 그와는 정반대로 주어진 시간을 최대한 적극적으로 즐기는 동료들도 있었다. 하지만 이유는 모르겠지만 불행히도 나는 그렇지 못했고 그런 자유스러운 생활에 적응하기가 힘들었다.
해외 유학생 중에는 고독과 외로움 등으로 우울증과 같은 정신질환이 생겨 결국 유학생활을 끝까지 마치지 못하고 중도에귀국해야 할 뿐 아니라, 그 후에도 유학 중 갖게 된 그 정신 질환으로 평생을 시달리며 살 수밖에 없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한다. 그런데 Paris 생활 초기 막상 내가 그와 유사한 처지에 빠지게 되니 과거에 들었던 그런 말이 새삼 기억이 나기도 했었다.
대학시절 한때 정신분석학에 심취해 있던 시절도 있었다. 그때 읽었던 책 중에는 저자가 책 서문에 "내가 무사히 유학생활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 이렇게 책을 쓸 수 있는 것은, 다행히 정신분석학을 공부하고 있었던 덕분에 외롭고 힘든 유학 생활 중 경험했던 나의 정신 질환을 스스로 진단하고 치료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쓴 책도 있었다.
Paris 생활 초창기는 대학 시절 읽었던 책의 바로 이 서문이가슴에 절실하게 와닿던 그런 시간이었다.
결국 내게도 이상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2~3주 정도 먹을 식량을 집 앞 슈퍼에서 한꺼번에 왕창 사 와서어둡고 좁은 집안에 처박혀 얼마나 오랜 기간 바깥세상을 접하지 않고 집안에서만 버틸 수 있나 하는 해괴한 시도를 하기도 했던 것이다.
당시 왜 그런 시도를 했는지 이유는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어쨌든 결과적으로 약 일주일 정도는 일체의 문밖출입 없이 그 좁은 집안에서만 먹고 자고 버텼던 것 같다. 넘쳐나는 그 당시의 시간과 자유가 내게는 그만큼 극심한 스트레스로 받아들여졌다는 의미였을 것이다.
독일에서 히틀러의 나치즘이 득세하게 된 이유가, 갑자기 얻게 된 자유를 독일인들이 부담스러워하고 견디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에리히 프롬이 '자유로부터의 도피(Escape from Freedom)'라는 책을 저술했는데, 나 역시도 갑자기 주어진 그 많은 자유와 시간의 여유가 견디기 힘들어 당시 내가 거주하던 아파트 안 밀폐된 공간으로 도망하려 했던 것은 아니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래도 같이 Paris에 왔던 회사의 연수생 동기들도 2~3명 있었고, 불어를 전공한 덕분에 Paris에 유학 중이던 대학 동기나 선후배들도 여러 명 있었던 터라 그들과 함께 어울리고 이후에는 학원에서 외국인 친구들도 몇 명 사귀게 되면서 이러한 초기 정착과정의 심리적 혼란은 큰 탈 없이 무사히 통과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만일 그렇게 힘들고 외롭고 어디론가 숨고 싶었던 그시절 제대로 된 출구를 찾지 못했다면 나 역시 우울증 같은 정신 질환에 빠져 평생을 고생하며 살게 되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정말 다행히 그런 일은 피해 갈 수 있었던 셈이다.
그런데 사람이 참 간사한 망각의 동물인지 처음에는 그렇게 힘들어서 언제든지 정 못 견디겠다 싶으면 바로그 순간 짐 싸서 한국으로 돌아가겠다는 생각이 가득했던 그런 Paris 생활이었는데, 이후 1년 연수가 끝나갈 즈음에는 Paris에 좀 더 머물지 못하는 것이 너무도 아쉬워 정말 서운하고 또 안타까운 마음에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한국으로 가는 항공기에 탑승해야 했었다.
지나고 보니 Paris에서의 시간은 참 할 수 있는 일도 너무나 많았고, 해야 할 일도 많았으며 또 가봐야 할 곳도 많았던 두 번 다시 얻을 수 없는 귀한 기회의 시간이었다. 그런데 그런 금쪽같은 시간을 초기 상당 기간은 동굴 같은 집안에 혼자 처박혀 아무것도 안 하고 단순히멍하니 앉아 허비하는 등 해괴하고도 이상한 행동으로 낭비했던 것이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안타깝고 아쉽다.
프랑스 소설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 빠삐용(Papillon)에는 주인공 역할을 맡았던 스티브 맥퀸(Steve Mcqueen)이 꿈속에서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런데 그때 재판관은 말하기를 당신의 죄는 당신이 억울하다고 주장하는 그러한 것과는전혀 관련이 없고, 오로지 신이 당신에게 부여한 인생자체를 낭비한 것과만 관련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당신은 그 부분에서 명백하게 유죄이며 그에대한 형벌은 사형이라고 선고한다.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던 주인공은 이 말에 마침내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하고 자신의 시선을 땅으로 떨구며 그것을 인정한다. 그리고 "맞다, 나는 유죄다"라는 독백을 조용히 반복하면서 까마득한 사막 속으로 서서히 사라진다.
이영화의 주인공 스티브 맥퀸은 한때영화계에서는 너무도 유명했던 대스타로 한세대를 풍미했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런 스타도 유한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운명은 결코 피할 수 없었고, 이미 40여 년 전 그러니까 1980년에 이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그처럼 오래전에 떠났음에도 그가 영화에서 자신은 유죄라고 되새기던 그의 나지막한 독백은 지금도 여전히 귓가에 맴도는 것 같기도 하다.
영화가 아닌 실제의 삶에서도 그가 신이 허용해준 자신의 인생 시간을 빠삐용처럼 낭비하며 살다 세상을 떠났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나의 과거를 되돌아보면 Paris에서의 그 귀한 시간 상당 부분을 낭비했던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결국 나 역시 영화 속 빠삐용만큼 너무도 큰 죄를 저지르며 인생을 살아온 범죄인은 아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