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에 주재할 때 중국 여성을 몇 번 소개받기도 했었다. 당시 내가 다니던 회사에서는 아직 결혼하지 않은 미혼자는 주재원으로 발령 내지 않았던 것이 일종의 불문율이었는데, 내 경우는 어떻게 하다 보니 우여곡절 끝에 미혼 상태로 첫 번째 캐나다 주재 발령을 받았고, 두 번째 주재 근무지였던 베이징 역시 미혼 상태로 발령받았다.
노총각 주재원이 발령받아 왔다는 사실이 주재원들 간에는 일종의 화젯거리가 되기도 했는데, 안타까운 마음에서인지 결혼 상대자로서 중국 여성을 소개해 주는 지인들도 있었던 것이었다.
회사 동료를 통해 30대 초반의 중국 여인을 소개받은 적이 있다. 그런데 그녀와 만나서 얘기하다 보니 그녀는 한족이 아니었고, 중국의 소수민족 중 하나였던 회족(回族)이었다. 조선족을 제외하고 중국의 소수 민족을 만나본 것은 이때가 처음이라 좀 신기하기도 했었는데, 회족이라면 인상이 다소 중앙아시아의 서역인(西域人)처럼 생겨서중국 한족과는 많이 다를 것으로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그녀는 외관상으로 중국 한족과 전혀 구분되지 않았다. 다만 피부색만은 한족 또는 한국인보다는 좀 더 하얗던 것 같기는 했다.
회족은 중국의 또 다른 소수민족인 위구르(Uyghur)족과 마찬가지로 이슬람 종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이 두 민족 모두 뿌리는 중앙아시아인과 연관이 있지만 차이가 있다면 인구 약 천만 수준의 회족은 자신들의 자치구인 '닝샤 회족자치구(寧夏回族自治區)'외 중국 각 지역에 흩어져서 살고 있으며, 이미 문화적으로나 혈통적으로 한족에 많이 동화되어서한족과의 구분이 쉽지 않다고 한다.
반면 위구르족은 그 인구가 역시 약 천만 수준으로 회족과 비슷하지만, 이 인구 대부분이 신장(新疆) 위구르 자치구 한 지역에 집중되어 거주하고 있으며, 좀처럼 한족화 되지 않아서 언어, 문화, 문자 등이 한족과 크게 다를 뿐 아니라 외모 또한 중앙아시아인과 흡사해서 외모에서도 한족과는 뚜렷하게 구분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한족에 동화된 회족과 달리 위구르족은 이렇게 자신들만의 독자성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고 있다 보니, 그러한 독자성이 자연스럽게 중국으로부터의 분리 독립 활동으로 이어지고 있고, 이를 제압하려는 중국 정부의 탄압도 역시 끊임없이 지속되고 있다.
왜 굳이 그곳에서 만나게 되었는지 그 이유는 잘 기억나지 않는데 그녀와의 첫 만남은 특이하게도 베이징의 북한 식당 '해당화'에서 이루어졌다. 그런데 이슬람교도라는 그녀는 히잡(Hijab)을 쓰지도 않았고, 돼지고기 외에 먹는 음식도 특별히 까다롭지 않았다. 한족에 많이 동화되었다는 회족 대부분이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녀 스스로도 말했던 것처럼 그렇게 열성적으로 이슬람교 원칙을 따르는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녀와 만났던 시점은 내가 베이징에 부임한 초기로 당시는 워낙 중국어를 못해서 대화는 주로 영어로 했는데, 그녀의 영어가 그다지 유창한 것도 아니었고 나도 새로운 외국어인 중국어 배우는데 집중하다 보니, 원래 그리 잘하는 영어도 아니었지만 그 영어마저도 제대로 안돼 상호 간 의사소통에 어려움이 많았다. 그렇게 서로 말이 잘 안 통하다 보니 결국 몇 번 만나보지도 못하고 그녀와는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같은 회사의 직원을 그녀의 부서장이 소개를 해줘서 한동안 만나기도 했었다. 그녀는 베이징 제2외국어대학 한국어과 출신이었는데 한국어도 꽤 잘하는 편이어서 당시 중국어를 거의 못했던 나는 그녀와 만날 때만은 부담 없이 편안하게 한국어로 대화할 수 있었다. 그녀는 한족이라 했는데 순수 한족이라고 하기에는 체격이 꽤 컸고 피부도 유난히 하얀 편이었다.
그녀와 만나면서 주말에는 베이징 여기저기 돌아다니기도 했고, 그녀가 다녔던 대학 교정도 같이 구경한 적이 있는데 그녀가 학교 기숙사를 소개하면서 자신이 학생이었을 때는 기숙사에 온수가 나오지 않아 겨울에는 더운물을 구하느라 꽤 고생했다고 했다. 물론 요즘은 베이징에 있는 대부분의 대학 기숙사에 온수가 나오겠지만 2000년대 초에만 해도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그녀와 만남을 몇 달째 이어가던 중, 중국본사장의 지시에 의거 나는 갑자기 항공 이동 시간만도 3시간이 넘는 중국 남부의 광저우라는 도시로 출장을 가게 되었다. 그런데 이 출장은 알고 보니 보통 출장이 아니라 무려 6개월이나 되는 장기 출장이었다. 물론 그 반년이라는 기간 동안 베이징에 가끔 오기는 했지만, 어쨌든 그렇게 멀리 출장 가게 되면서 그녀와 만나보는 것 자체가 이전처럼 편하지 않게 되었고, "거리가 멀어지면 마음 역시 멀어진다"는 말처럼 그녀와도 자연히 멀어지게 되었다.
베이징을 떠나 대만을 거쳐 홍콩에 주재할 때 한국 본사에 근무하는 중국 여인을 만났던 적도 있었다.
그녀는 베이징에서 대학을 졸업한 후 내가 다니던 회사의 해외인력 초청 프로그램에 선발되어, 회사에서 지원해 주는 학비로 한국의 대학원을 다녔고 졸업과 동시에 우리 회사의 한국 본사에서 근무하게 된 여성이었다. 매우 젊은 나이에 한국에 왔고 또 한국생활이 비교적 오래돼서 그런지 그녀는 한국인과 구분이 안될 정도로 완벽한 한국어를 구사했었다.
그녀가 홍콩에 출장 오거나, 내가 한국에 출장 가면 둘이서 별도로 만나 식사도 같이 하면서 데이트도 하곤 했었는데, 만날 때마다 그녀는 한국에 사는 것이 적응되지 않아 너무 힘들다는 하소연을 반복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로부터 회사를 그만두고 고향인 중국의 만주로 돌아간다는 연락이 왔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그곳에서 소개받은 중국 남성과 결혼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미모에 키마저 훤칠했으며 한국말도 너무 잘하던 그녀와는 좀 더 사귀어 보고 싶었고 결혼까지도 고려하고 있었는데, 한국에 너무 적응 안된다는 그녀에게 내 기대가 고려될 여지는 별로 없었던 것 같았다.
몹시도 추운 겨울 내가 한국에 출장 갔을 때 그녀와 수원시 어느 곳에서 만난 적이 있는데, 더운 홍콩에서 출장 온 내가 당시 너무도 가볍게 옷을 입고 있어 덜덜 떨고 있는 모습이 안쓰러워 보였는지, 길 가다 말고 갑자기 거리의 매장에서 거의 사람 키만큼 긴 목도리를 그녀가 하나 사더니 선물로 내게 준 적도 있었다. 여자로부터 선물 받아 본 기억이 별로 많지 않은데, 그런 선물을 받으니 왠지 그녀와의 관계를 더 기대하게 되기도 했던 것 같다.
그녀로부터 들었던 얘기 중 평소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을 새삼 깨우치게 된 것도 있다. 그녀는 한국에서 회식할 때는 입에 별로 맞지 않는 한국 음식만 항상 먹어야 했던 것이 꽤 불편했었다고 했다. 그래서 중국에 혹 출장을가게 될 때는 그간 한국에서는 먹을 기회가 없었던 정통 중국음식을 맘껏 먹게 될 것으로 잔뜩 기대를 하고 갔는데, 번번이 실망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중국에 출장 와서도 상급자인 한국인 주재원들과 회식을 하면 영락없이 또다시 중국에 있는 한국 식당에서 한국음식으로 회식을 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적어도 자신의 고향 중국에 와서는 고향 음식을 맘껏 먹게 될 줄 알았는데, 고향에서조차도 한국 음식을 또 먹어야 할 때는 정말 토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고 했다. 그렇게까지도 우리 주재원들이 해외 현지에서도 한국 음식만을 선호하고 있었던 것이 현실이라는 것을 그녀의 그런 하소연을 들으며 새삼 깨우칠 수 있었는데 생각해보니 그런 면에서는 나만큼 심했던 사람이 없었던 것 같다.
그녀를 통해서 만주족의 애환을 들을 수도 있었다. 중국의 신분증에는 자신의 민족이 표기되는데, 그녀의 신분증에는 그녀가 한족인 것으로 표기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녀 말은 자신의 부모는 물론 자신도 원래는 모두 청나라를 건국했던 만주족(滿洲族)이라고 했다. 하지만 청나라가 멸망한 이후 한족들의 만주족에 대한 박해가 너무 심해 많은 만주족들이 다양한 편법을 통해 서류에 등재된 자신의 민족을 한족으로 바꾸었으며 그녀의 부모님도 그런 경우였다는 것이었다.
청나라 멸망 후 다시 중국의 지배 세력이 된 한족들은 과거 자신들을 정복하고 지배했던 만주족이 두 번 다시 발흥하지 못하도록 집요하고 철저하게 박해를 했다 하는데, 만주족이 한족으로부터 당한 그런 핍박에 대해서는 이미 들었던 바도 있지만, 실제 만주족 사람을 통해 그런 얘기를 직접 들어본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그런데 사실 생각해보면 만주족의 청나라는 한족 명나라를 정복한 이후, 자신들의 원래 고향인 드넓은 만주 영토 포함, 티베트, 신강, 몽고 등 주변 지역을 차례로 정복하여 중국의 영토를 명나라 시절 대비 무려 2배 이상 확장시켜 놓았다. 그리고 멸망함으로써, 한족들은 청나라의 그 광활한 영토를 거의 대부분 물려받게 되었다.
그러니 결과적으로 볼 때는 만주족이 피를 흘려가면서 대신 싸워서 중국 영토를 현재 수준으로 넓혀 준 셈인데 영토를 그토록 넓혀준 그 만주족의 후손들은 정작 그 땅을 그대로 물려받은 한족들로부터 감사의 말을 듣기는커녕, 자신들의 민족까지 숨겨야 할 만큼 온갖 박해를 받고 살았던 셈이다.
류(劉)씨 성을 가진 또 다른 회사 여직원을 소개받은 적도 있다. 베이징 법인에 근무하던 여직원이었는데, 역시 내가 홍콩에 근무할 때 소개받았다. 베이징에 출장 가면 베이징 시내의 서구식 식당가인 싼리툰(三里屯) 같은 곳에서 같이 식사를 하기도 했고, 또 그녀가 휴가를 내고 홍콩으로 놀러 와서 디즈니랜드나 주변 작은 섬들을 돌아다니기도 했었다.
그런데 그녀와 만남을 좀 더 이어가다 보니, 그녀는 결혼할 생각보다는 단순히 경제적 여력이 있는 남자를 만나서 그저 순간을 즐기는 그런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점점 많이 들었다. 당시 나는 더 늦기 전에 결혼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많은 상태였는데, 그처럼 결혼 생각이 전혀 없던 그녀는 더 이상 만날 이유가 없었던 상황이었고 그러다 보니 그녀와는 점차 멀어졌다. 한국도 실제 별 차이가 없는지 모르겠지만, 유물론에 입각한 교육을 받아서 더 그런지 젊은 중국인들이 물질에 집착하는 세태는 생각보다 심했던 것 같다.
사진) 그녀가 홍콩 왔을 때 옹핑 360 (Ngong Ping)라는 케이블 카를 타고 찍은 사진. 길이가 무려 5.7km에 달하는 케이블 카인데, 사진에서 보듯 바닥이 투명한 유리로 되어 있어 아래를 내려다보면 바닥이 없는 것처럼 느껴져 섬찟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런데 그 보다 더 심하게 정말 물질에만 집착하는 여성을 만난 적도 있었다. 그녀는 진(陳)씨 성을 가진 후난 성(湖南省) 출신 한족 여성이었는데, 내가 광저우에 6개월간 파견 근무할 때 자주 갔던 고향옥이라는 한국식당 종업원이었다. 당시 그녀의 순박한 모습에 끌려 식당 주인을 통해 몇 차례 만나자고 의사를 타진해 보기도 했는데 그녀의 답은 언제나 거절이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서 4~5년 뒤 내가 홍콩에서 근무할 때 우연히 그녀와 다시 연락이 되었고, 홍콩과 붙어 있는 중국 선전(深圳)에서 다시 만난 적이 있었다.
홍콩섬에서 선전까지는 버스로 약 40분이면 도착할 정도로 가까운 거리라서 주말에 선전에 가는 것은 별 부담이 되지 않았다. 그녀는 식당을 몇 차례 옮겨 다니다 결국 선전까지 오게 되었다고 했는데, 광저우에서 만날 때는 식당의 말단 직원이었지만 이제는 나름 그 업계의 경력이 쌓여서 그런지 서빙하는 직원들을 관리하는 매니저 같은 직책을 담당하고 있었다.
사진 및 영상) 그녀가 근무하고 있었던 심천의 식당과 인근 지역 모습 (2010년 10월 9일)
그런데 그녀도 세월과 함께 속세 물이 나름 들었던 것인지 이제는 과거와 다르게 나를 안 만나겠다고는 하지 않았고, 홍콩에도 놀러 오는 등 꽤 적극적으로 변해 있었다. 하지만 홍콩에 여행 왔을 때 같이 다니면서 얘기를 해보니 그녀도 역시 결혼까지 고려했거나 인간적으로 내게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던 것 같고, 그저 자신의 삶을 즐기는데 필요한 경제력 부분에서만 나를 필요로 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녀에게 당신 생각이 뭐냐고 솔직하게 물었고, 그녀 역시 꽤나 당당하게 내게 특별한 관심은 없다고 답을 했다. 결국 그녀와도 그렇게 헤어졌는데, 어찌 보면 직설적으로 물었던 질문에 더 직설적으로 솔직하게 답을 했던 그녀가 화통하게 느껴지기도 했었다.
법인 경리부서에 근무하던 조선족 여직원도 있었다. 그런데 그녀의 부서장과 내가 워낙 친하다 보니 퇴근 후 그 부서가 단체로 볼링장에 갈 때는 나도 같이 따라가는 등 그 부서의 직원들과도 함께 시간을 보내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사진) 퇴근 후 볼링 경기할 때 모습 (2006. 11월)
그러다 보니 그녀와도 접촉하는 기회가 점점 빈번해졌고 좀 묘한 감정이 사실 생기기도 했었다. 그런데 그녀 부서장이 그런 분위기를 눈치를 챘는지 어느 날 내게 그녀에 대한 내 감정을 물었다. 그의 말은 그녀도 내게 분명히 호감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이니 내가 그녀에게 호감이 있으면 중간에서 다리를 놓아주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사실 관심은 있었는데 좀 더 생각해보고 답을 주겠다고 했다.
그러고 나서 한 달도 안됐는데, 나는 갑자기 대만 법인으로 발령받게 되었다. 결국 그녀와의 만남을 고민할 것도 없이 바로 베이징을 떠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그녀로부터 전화가 왔는데 대만으로 발령받았다는 소식을 들었다며, 갑자기 자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내게 질문을 했다.
난 그녀에게 분명히 호감이 있었지만, 아직 단둘이 만나본 적도 없어서 뭐라고 답하기가 좀 애매했다. 결국 그 질문에 분명한 답을 하지 못했고, 그로부터 며칠 후에 난 대만으로 부임하기 위해 베이징을 떠나야만 했다.
그렇게 베이징을 떠나게 되니 결국 그녀와도 멀어지게 됐고 그녀와의 만남도 끝이 났다. 다시 생각해 보면 갑작스러운 질문이었긴 했지만 그녀의 질문에 보다 확실한 답을 못했던 당시의 내가 많이 한심스러워 보인다. 베이징을 갑작스럽게 떠나야만 했던 상황이었던 만큼, 뭔가 분명한 답을 했으면 그녀도 그에 따라 처신을 해서 어쩌면 우리의 만남이 어떤 형태로든 이어질 수도 있었는데 그렇게 못했던 것이다.
지금까지 언급한 여인들과는 만남이 끊어진 이후에는 어떤 연락도 없었다. 하지만 중국을 떠난 후에도 중국에서 많이 사용하는 Wechat과 같은 SNS로 가끔 안부를 주고받았던 허난성(河南省) 출신 중국 여인이 있었다.
그녀와는 회사 연말 행사가 진행되었던 베이징 북부에 있는 구화산장(九華山莊)이라는 호텔에서 처음으로 마주쳤는데 간부급만 천여 명 가까이 모이는 회사의 중국 전체 행사가 그날 그 호텔에서 진행됐었고 그녀는 그 행사를 담당했었던 외부 회사의 직원이었다. 그런데 그녀가 마음에 들어서 그 외부 회사를 담당하는 직원에게 다리를 놓아 달라고 부탁을 했고 내가 노총각임을 너무 잘 알고 있던 그 직원이 만남을 적극적으로 주선해 줘서 마침내 그녀와 만나게 되었다.
그녀와는 베이징의 한국식당에서도 몇 차례 만났고, 그녀 역시 홍콩에 놀러 오기도 했었다. 그리고 이후에는 그녀와 결혼 얘기까지 오고 가면서, 한국에 계신 어머님께 결혼할 여자라고 사진도 보여드렸었고, 그녀와 어머님은 중간에서 내가 통역을 해서 전화로 대화를 나누기도 했었다.
어머님 역시 외국인이란 이유로 반대하시거나 한 적은 전혀 없었고, 오히려 인상이 너무 좋다고 하셔서 일단 한국으로 한번 초청해서 어머님께 인사를 드리기로 했다. 한국 여행 비자 취득에 필요한 적지 않은 금액의 보증금은 내가 대신 보내주었다.
그런데 보증금을 전달해 준 이후 그녀로부터 연락이 왔는데 비자를 못 받아 한국에 못 가게 되었다고 했다. 그리고는 잘 연락이 되질 않았다. 나는 그 순간 이 여인 또한 그저 경제적 목적만으로 접근한 여인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너무 실망한 마음에 그렇게 살지 말라는 메시지를 보낸 이후, SNS까지 차단하고 연락을 끊어버렸다.
이후 나는 한국으로 귀국했다. 그런데 비자 문제로 한국에 오지 못했다는 이 여인으로부터 1년 여가 지나 다시 연락이 왔다. 정확한 기억은 없지만 아마 그 사이 내가 SNS 차단을 다시 풀어놓았던 것 같았다. 그녀의 설명은 결코 비자 발급 보증금을 노리고 그런 것이 아니며, 자신 의사와 관계없이 실제 비자를 발급받지 못해서 못 왔던 것인데, 내가 그것을 오해해서 연락까지 끊어 버리는 바람에 그간 연락도 할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어쨌든 그렇게 해서 그녀와는 다시 SNS로 연락을 주고받게 되었는데, 내가 중국에 다시 갈 생각도 없었고, 그녀도 또한 비자 문제로 한국에 못 오는 상황이 지속되었던 실정이라, 그렇게 연락만 가끔씩 주고받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가 나의 과거 오해와 조급한 판단을 강하게 비난하는 메시지를 보내온 이후에는, 이미 결혼할 다른 남자가 생겼는지 전과 달리 메시지를 보내도 별로 답이 없었다. 그녀와도 그렇게 멀어져 갔다.
사진) 그녀는 키가 170cm가 넘는 장신이었는데 위 사진은 그녀가 홍콩에 여행 왔을 때 같이 찍은 사진들이다. 좌측은 침사추이 페리 터미널, 우측은 디즈니랜드에서 찍은 사진. 2013년 여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베이징 편 글 서두 '내가 선택한 베이징'편에서도 언급했던 것처럼, 내가 중국 주재를 희망했던 이유 중 하나는 중국인여성을 만나 결혼할 가능성을 기대했던 것도 있었다.
하지만 내가 원했던 그대로 중국 발령이 주어졌고, 그것도 베이징, 광저우, 대만, 홍콩 등 중화권 지역에 무려 10여 년 가까이 거주하게 되었음에도, 결국 나는 당초에 의도했던 그 목표는 달성하지도 못하고 빈손으로만 귀국했다. Paris그리고 Toronto에서처럼 중화권에서 역시 또다시 실패한 '라비앙로즈(La vie en rose)'의 꿈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렇지만 어쨌든 중화권에서 만났던 그 여인들과의 시간도 길지 않은 인생에서 신이 내게 부여한 소중한 시간이었고, 귀한 만남이었다고 믿는다.
짧지만 같은 시간과같은 도시에서 살면서 잠시나마 웃음을 함께 공유했었던 그녀들 모두 축복받고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기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