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6년의 베이징 모습 (2-2)

■ 그 주재원의 서글픈 기억들 (3편 Beijing-25)

by SALT

해외 주재 근무 14년간의 기억을 적은 이야기

Paris, Toronto, Beijing, Guangzhou, Taipei,

Hong Kong, Macau

그리고 다른 도시들에서의 기억......



Beijing



25. 2005~6년의 베이징 모습 (2-2)


2005년 10월 법인 사무실에서 바라본 베이징 시내 모습. 사진 중앙의 고층건물이 '구오마오(國貿)'라는 건물이고, 아래 보이는 도로를 따라 사진 좌측으로 6km 정도만 가면 천안문(天安門)이 나온다.



5) 베이징 거리의 아침 식사


베이징에 주재하는 동안 회식 등으로 어쩔 수 없이 가야만 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자진해서 중국 식당을 찾아 간 적은 거의 없는 것 같다. 그나마 좀 입맛에 맞는 사천음식 식당이 회사 근처에 있어 몇 번 가보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육식을 못하는 내게는 고기가 많이 사용되거나 기름기가 많은 중국 음식은 편하지가 않았다. 다만 광저우 같은 중국 남부 지역 음식 경우 비교적 해산물이 많이 사용되어서 그나마 북방 지역의 음식보다는 먹을만했던 것 같다.


그런데 중국의 북부 또는 남부 등 거주 지역과는 관계없이 중국인에게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었는데 한국인 대비 훨씬 자주 외식을 해서 집에서 음식을 직접 만들어 먹는 경우는 상대적으로 적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집에서 밥을 해 먹는 경우가 적다 보니 중국 주택들의 부엌도 한국의 부엌보다는 비교적 작고 덜 발달되어 있다고 한다.


중국인들이 외식에 주로 의존하게 된 배경에는 1940년대 중국의 공산화와 관련이 있는데, 모택동이 집권 후 '하늘의 반은 여성이 지탱하고 있다(半边天)'라며 남녀평등 사상을 고취시켜 여성들의 노동력을 가정에서 산업 현장으로 적극 끌어냈기 때문이었다. 공산당의 이러한 정책 하에 대다수의 여성들은 남성과 구분 없이 사회활동에 적극 참여하게 됐고 결과적으로 하루 종일 집에 머물면서 가사 일에 전념하거나 식사를 준비할 시간적 여유는 크게 줄어들거나 아예 없어져 버렸다.


1940년대는 말할 것도 없고 1980~90년대까지도 한국의 어머님들은 대부분의 집에 머물며 주로 가사에만 매달리고 살았던 것과는 많이 다른 상황이었다. 물론 한국도 여성의 사회 참여가 급격하게 증가한 근래에는 외식으로만 식사를 해결할 수밖에 없는 경우가 과거보다는 많이 늘어났다지만, 중국에는 그 현상이 한국보다 훨씬 먼저 1940년대 말부터 시작되었던 셈이다.


부부가 모두 서둘러서 출근해야 하니 아침 식사외식으로 해결하려는 사람들이 많아서, 베이징 거리의 식당들보면 저녁보다 오히려 아침에 더 붐비는 식당도 많았다. 걸어서 출근하면서 거리의 그런 식당들 안을 들여다보면 서둘러서 아침 식사를 해결하는 다양한 직장인들을 볼 수가 있었는데 매섭게 추운 베이징의 한겨울 국물이 있는 음식에서 나오는 뜨거운 수증기가 가득한 식당에서 바쁘게 식사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 국적과 민족을 떠나서 같은 직장인으로서 매우 정겹게 느껴지기도 했다.


(베이징 거리의 아침 식사)

https://blog.naver.com/hail0201/220519596117


아침 식사 때만 나와서 영업하는 거리의 노점상에서 간단히 식사를 해결하는 직장인들의 모습도 흔하게 볼 수 있었는데 이 노점상들은 출근 시간이 지나면 모두 철수해버려 낮에는 볼 수 없었다. 그런 노점상 옆을 지나치면서 파는 음식들을 흘끗흘끗 보기도 했는데 참 맛있어 보이는 것도 많았다.


(노점상에서 아침 식사하는 중국인들 모습)

https://krlai.com/m/932


베이징에 거주하면서도 중국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 아침은 꼭 집에서 주말에 미리 만들어 두었던 된장찌개나 북엇국과 같은 한국 음식만을 먹었던 나로서는 중국인들이 이용하는 식당이나 거리 노점상에서 아침 식사를 먹어 본 적은 사실 한 번도 없었다.


따라서 실제 먹어 보는 경험은 하지 못했고 그저 눈으로만 대리 경험을 했던 셈인데, 그래도 그들이 아침 먹는 모습을 보면, 서울 근무 시절 아침 출근길에 회사 근처에서 칼칼한 콩나물국이나 얼큰한 라면으로 전날 마셨던 술로 지친 속을 해장해가며 아침을 먹던 내 모습과 동료들의 모습을 그대로 다시 보는 것 같기도 했다.



6) 베이징에서는 잠시 내가 여자?


이런 얘기하는 것이 좀 이상하겠지만 나는 남자다. 그런데 베이징에 도착해서 비자인지 운전면허증 때문인지 병원에 가서 간단한 검진을 받는 일이 있었는데, 황당하게도 그때 검진 결과에는 내 성별이 여자로 되어 있었다.


사실 비자 취득에 필요한 건강검진은 대사관에서 지정했던 서울의 병원에서 이미 받아서 왔고 베이징에서의 그 검사는 어떤 서류 보완을 위해 필요했던 10분 정도의 매우 간단한 검진이었기 때문에 검진 결과는 아예 보지도 않고 받자마자 관공서에 제출해 버렸다. 따라서 그 서류에 성별이 그렇게 잘못 표기되어 있다는 것도 당시에는 몰랐다.


그런데 몇 년이 지나서 베이징을 떠난 후에 우연히 그 서류 사본을 다시 보게 된 일이 있었는데, 그때 성별이 그렇게 틀리게 기록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어쨌든 그 서류를 보고 하도 황당해서 혹 베이징에서 발급받은 운전면허증도 그렇게 되어 있는지 다시 확인해 봤는데, 재미있게도 바로 그 서류를 근거로 발급되었을 중국 운전면허증에는 성별이 또 남자로 제대로 표기되어 있었다.

워낙 형식적인 검사라서 대충하는 것 같은 느낌은 있었지만 성별이 뒤바뀔 정도로 대충했다는 것도 의외였고 또한 검진 결과에는 '여자'로 되어 있는데, 문제나 이의를 제기한 바가 전혀 없었음에도 운전면허증에는 '남자'로 제대로 기록되어 있는 것도 특이했다. 결국 중국에서 관리되는 서류 중 어떤 것에는 내 성별이 남자로 또 어떤 것에는 여자로 표기되어 있었던 셈이다.


만일 그런 상황에서 내가 혹 무슨 사고라도 당해 경찰에서 조사를 받아야 하는 일이 생겼다면, 일치하지 않는 다양한 기록상의 성별로 어쩌면 꽤 난감한 상황에까지 처해졌을지 몰랐을 것 같은데, 다행히 중국 체류기간 사고가 발생했던 적이 없어서 그런 봉변을 당하지는 않았다. 지금도 중국의 관공서 창고 어딘가에는 내가 여자라고 기록된 그 서류가 여전히 남아 있을 것을 생각하면 은근이 웃음이 나오기도 한다.


사진) 중국 운전면허증. 남녀 표기가 없는 한국의 면허증과 달리, 사진에 보이는 것처럼 상단에 성별이 표기되어 있다.


하지만 최근의 중국 관련 기사를 보면, 과거 중국의 이러한 어수룩한 개인 정보 관리는 이제는 모두 옛날 얘기가 되어 버린 것 같다. 중국 정부가 중국 인구 전체 14억 명 모두의 안면 사진과 개인 정보 모두 데이터베이스화 해서 컴퓨터로 관리할 계획을 수립했고 이미 상당 부분 완성했다는 것이다 이 분야에서는 중국이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까지 보유하고 있다고 한다.

중국이 미국을 포함한 전 세계 어느 국가보다 먼저 철저한 개인정보를 관리할 수 있는 체계를 구축한 셈인데, 사실 이 모든 것이 국민의 안전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공산당 일당 독재 체제에 저항하는 반체제 인사나 분리 독립을 추구하는 소수민족에 대한 통제와 감시 목적으로 도입되었다고 보는 우려의 시선이 많다.


많은 사람들이 설마 하는 마음으로 우려를 했던 조지 오웰 (George Orwell)의 'Big Brother'가 실제로 중국이라는 공산주의 국가에서 가장 먼저 현실로 나타난 셈이다.


(빅브라더 중국 전 국민 안면인식 완료)

http://www.dailybizon.com/news/articleView.html?idxno=14808

(기차도 안면인식으로 탑승)

https://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9/12/04/2019120403448.html?utm_source=naver&utm_medium=original&utm_campaign=biz

(안면 인식의 두 얼굴)

http://news.kbs.co.kr/news/view.do?ncd=4335598&ref=A



7) 첨밀밀 (Tian mi mi, 甛蜜蜜)에 대한 착각


달콤해요, 그대 미소는 달콤하지요

봄바람 속에서 꽃이 피는 것처럼

어디에서 그대를 만났더라?

미소는 낯익은데, 도무지 기억이 안 나요

아, 꿈속에서였군요

꿈에서, 꿈속에서 그대를 만났군요

달콤한 그 미소

그대군요, 꿈에서 본 그 사람이


대만, 홍콩, 중국 등 중화권뿐 아니라 과거 한때 한국에서도 유명했던 노래로, 대만 태생의 여자 가수 등려군(鄧麗君)이 1979년 부른 '첨밀밀'이라는 노래의 가사다.


이 노래는 감미로운 중국 남방지역의 전통적인 멜로디를 잘 표현하고 있는 노래로 알려져 있는데, 중국 부임 전 중국어 배우기 위해 3개월간 산속의 회사 연수원에 갇혀 합숙할 때 지겹도록 이 노래를 들었지만 2005년 베이징에 도착한 후 다시 들어도 여전히 감미롭게만 느껴졌던 그런 노래였다.


사실 대만과 적대관계에 있던 중국에서는 등려군의 노래는 금지곡이었다 한다. 그렇지만 북한에 한국 노래나 드라마가 유행하고 있다는 것처럼 중국 본토에서도 등려군의 노래는 많은 인기를 누려, 심지어 "중국의 낮은 늙은 등(등소평)이 지배하고, 밤은 젊은 등(등려군)지배한다"라말까지도 있었다 한다. 등소평과 등려군 두 사람은 같은 등(鄧)씨로 성이 같다.

영화 제목이 이 노래 제목과 같은 '첨밀밀'이라는 홍콩 영화 역시 있는데, 장만옥(張曼玉)과 여명(黎明)이 주연을 했던 1996년 영화로 노래 첨밀밀이 영화 주제곡으로 사용됐다. 중국이 너무도 가난하던 시절 돈 벌기 위해 홍콩으로 왔던 중국 대륙 출신 젊은이들의 애환과, 사랑, 아픔을 잔잔하고 감미롭게 표현한 영화인데, 이 영화 역시 노래만큼이나 꽤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던 인기 영화로 기억되고 있다.


(영화 '첨밀밀'과 그 영화의 주제곡 '첨밀밀', 03:25)

https://youtu.be/c2iAsrqpZRw


그런데 어느 날 인터넷을 검색하다 우연히 알게 되었는데, 중국 남방 지역의 정취가 흠뻑 묻어있는 노래로 알고 있던 이 첨밀밀이란 노래는, 원래 중국 노래가 아니라 중국에서 남쪽으로 수천 km나 멀리 떨어져 있는 인도네시아의 전통 민요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인도네시아 어부들이 부르던 'Dayung Sampan'이라는 민요가 있는데, 그 민요의 멜로디에 전혀 다른 가사를 붙여 등려군이 중국어로 부른 것이었다. 등려군은 동남아에서도 잠시 활동했다는데, '첨밀밀'이란 중국어 버전이 탄생하기 전 1978년 동남아 순방 시 인도네시아어로 이 노래를 직접 관중들 앞에서 부른 바도 있다 한다.


(등려군이 인니어로 부른 Dayung Sampan, 02:21)

https://www.youtube.com/watch?v=y9Ng8ptnVFE


(인도네시아 가수가 부르는 Dayung Sampan, 04:29)

https://www.youtube.com/watch?v=lIaXphKcjdE


흥미로운 것은 사전에서 인니어 Dayung Sampan이라는 단어를 검색해보면 '노를 젓다'라는 의미로 나온다. 즉 원래 어부들이 바다에서 물고기 잡을 때 부르던 일종의 노동요인 인도네시아 민요가 중화권으로 넘어와서는 '사랑의 노래'란 전혀 다른 개념으로 완전히 바뀐 후 크게 히트했던 셈이다.


등려군은 1953년 태어나, 내가 Paris로 지역 연수 떠나기 직전인 1995년 5월에 42세의 아직 젊은 나이에 천식으로 세상을 떠났다. 한편 그녀는 대만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부모는 중국 본토의 허베이 성(河北省) 및 산둥 성(山東省) 출신으로 모두 중국 본토 그중에서도 북방지역 출신이다.


그런 등려군이 중국 남부 광둥 성(廣東省)이나 푸젠 성(福建省)도 아니며, 대만이나 홍콩도 아닌 필리핀, 베트남보다 훨씬 더 남쪽에 있는 인도네시아의 민요를 중화권의 대표적 연가(戀歌)로 만든 사실은 참 아이러니한 것 같기도 하다.


어쨌든 등려군 덕분에 인도네시아 민요를 내 생애 처음으로 접할 수 있었던 셈인데, 한국에 오는 많은 외국인 근로자 중 인도네시아 출신도 많고, 또 경제적으로 우리보다는 낙후한 국가라는 그런 인식만 갖고 있던 그 인도네시아에도 이렇게 감미롭고 매력적이며 아름다운 민요가 있다는 것을 새삼 깨우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던 것 같다.



8) 그녀의 겨드랑이 털


요즘에는 한국에서 여성이 겨드랑이 털을 그대로 방치하고 다니는 경우는 거의 볼 수가 없는 것 같다. 하지만 70년대만 해도 그렇지 않았고 젊은 여성조차도 겨드랑이 털을 그대로 방치하고 다녔던 시절이 있었다. 1931년생이신 어머님도 나중에는 제모를 하셨지만 과거에는 겨드랑이 털을 그대로 방치하셨었고, 어린 시절 나도 그것을 보았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보기 어렵게 된 여성의 이 겨드랑이 털을 2005년 베이징에 부임하니 꽤 오랜만에 다시 볼 수가 있었다. 여름이 되니 베이징 여성들이 소매가 없는 옷을 입고 다니기 시작했는데, 전혀 의도지 않게 보게 것이었지만 많은 여성들이 겨드랑이 털을 제모하지 않은 상태였다. 외딴 시골에 거주하는 사람이 그런 것도 아니고 베이징 시내 한복판 사무실이나 거리에서 마주치는 여성이 그랬다.


오랫동안 그런 모습을 보지 못했던 내게는 사실 털이 꽤 의외였고 솔직히 다소 혐오스러워 보이기까지 했었다. 영화 '색, 계(色, 戒)'로 유명한 중국의 여자 배우 탕웨이(Tang Wei, 湯唯)도 겨드랑이 털을 제모하지 않은 상태로 영화에 출연해서 그 털이 그대로 노출되는 장면이 있었다 하는데, 탕웨이 경우는 1930년대라는 영화 속의 시대 배경을 좀 더 실감나게 재현하기 위해서 영화감독이 그런 모습을 사전에 요구했던 것이라 한다.


국제적인 교류가 많아지고 세월이 흐르면서 이제는 중국의 여성도 겨드랑이 털을 제모하는 것이 보다 일반적인 추세가 되어가고 있다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그 털을 있는 그대로 방치하는 여성들도 적지 않다 하는데, 그런 현상을 보면 여성의 겨드랑이 털에 대한 인식에 있어서 중국인들은 한국인과 다소 차이가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사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겨드랑이의 털이나 머리의 털이나 인간의 몸에 붙어 있는 털이라는 측면에서아무런 차이도 없다. 아울러 여성 머리의 긴 털이라고 볼 수도 있는 긴 머리카락을 보고서는 때로는 매혹적이고 아름답다고도 하면서,유독 겨드랑이의 짧은 털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시선으로만 보게 되는지 나 스스로 생각해도 논리가 잘 성립되지 않는 것 같다.


(중국 여성 겨드랑이 털 관련 블로그)

https://blog.naver.com/dongyangfan/221571366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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