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의 초보 가이드

■ 그 주재원의 서글픈 기억들 (3편 Beijing-19)

by SALT

해외 주재 근무 14년간의 기억을 적은 이야기

Paris, Toronto, Beijing, Guangzhou, Taipei,

Hong Kong, Macau

그리고 다른 도시들에서의 기억......



Beijing



19. 베이징의 초보 가이드


아무래도 현지 언어가 그나마 조금은 되고 또 현지에 살고 있어 그곳 지리를 어느 정도 알다 보니, 해외에 근무할 때는 지인들이 여행 오거나 본사에서 출장을 오면 가이드 역할을 해 주는 경우가 꽤 있었다. 특히 본사에서 출장 오는 사람에 대한 가이드 역할은 때로는 주재원 고유 업무 중 하나였던 것처럼 간주되기도 했던 것 같다. Paris에서도 그랬었 또 Toronto에서도 그랬으며, 중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중국의 베이징에도 만리장성(萬里長城)이나 자금성(紫禁城) 등 전 세계적으로 너무나 유명한 명소가 꽤 많이 있다. 이런 명소를 단 한 번이라도 보기 위해 멀리 한국에서부터 베이징까지 찾아오는 관광객들도 많았다.


하지만 나는 좀 이상하지만 베이징에 근무할 당시 부임 후 1년이 넘도록 그 유명한 명소를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었다. 왠지 가 보고 싶은 생각도 없었고 사실 궁금하지도 않았다. Paris나 Toronto에서 틈만 나면 많은 명소를 찾아다녔던 것과는 꽤 다른 상황이었는데, 특별히 베이징에서만 유독 더 바빴던 것도 아닐 텐데 왜 그랬는지 지금도 그 이유는 잘 모르겠다.


그런데 그렇게 도통 다니지 않았베이징 인근의 명소들을 한국의 지인들이 여행 와서 내게 가이드를 부탁하는 덕분에 나도 처음으로 방문해 보게 되는 경우들이 생겼다. 나 역시 초행길이니 내가 뭔가 소개하고 가이드했다고 표현하기는 다소 어폐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내 차로 안내해서 다녔고 중국어 한마디 안 되는 지인들이 베이징에서 명소를 관람하고 식사도 할 수 있게 통역도 해 주었으니 비록 초보 가이드이기는 하지만 엄밀히 말해 가이드 역할했다고 말할 수도 있는 것 아닌지 모르겠다....




2006년 말경 서울에 있는 선배로부터 연락이 왔다. 가족과 함께 주말에 2박 3일로 베이징 여행을 가려는데 내 집에서 숙박을 하고 또 내가 관광지 안내를 좀 해 줄 수 없겠냐고 물어 왔다.


당시 방이 3개 화장실도 2개나 있는 40평 정도의 결코 작지 않은 아파트에 혼자 살고 있었으니, 당연히 몇 명 정도 되는 인원을 며칠 재워주는 것은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흔쾌히 동의를 했고, 얼마 후 그 선배와 부인 그리고 딸, 총 세명이 금요일 저녁에 도착해 일요일 돌아가는 2박 3일 일정으로 베이징에 왔다.


사진) 선배 가족이 2박 했던 베이징의 내 아파트. 좌측 상단 사진 복도를 따라 들어가면 방이 3개 있었다.


그렇게 선배 가족이 여행 와서 어쩌다 우연히 그들과 함께 베이징의 명소들을 방문하게 되었는데 선배 가족이 여행 온 이후 몇 달 뒤, 만 2년도 안된 시점에 나는 갑자기 대만으로 발령받게 되면서 베이징을 떠나게 되었다.


따라서 만일 그때 선배 가족과 함께 베이징 인근 명소들을 돌아다니지 않았으면, 나중에 누군가 내게 '만리장성'이나 '자금성' 같은 명소에 대한 느낌을 물으면, 베이징에 몇 년 거주했었으면서도 가본 적이 없어서 모른다고 답해야 하는 상황이 될 뻔했었다. 다행히 선배 가족이 여행 와서 가이드 역할을 했던 덕분에 그런 상황은 피할 수 있게 된 셈이다.


사진) 2006년 11월 10일 금요일 오후 9시 넘어 선배와 그 가족이 베이징 공항 출국장으로 나오는 모습.


금요일 저녁 늦게 선배 가족은 도착했고, 당일은 오랜만에 회포를 푸는 거나한 술을 함께하는 저녁 식사를 한 후 바로 잤다.


이후 토~일요일 이틀이라는 짧은 기간에 만리장성(萬里長城), 자금성(紫禁城), 후통(胡同), 798 예술구, 이화원(頤和園), 천안문 광장(天安門廣場) 등 베이징의 유명 명소는 모두 다 돌아보기로 했는데, 토~일요일 이틀 저녁에도 역시 거나하게 술 한잔 곁들인 저녁 식사까지 포함해서 이 모든 곳을 방문했었으니, 정말 문자 그대로 주마간산(走馬看山) 식으로 급하게 여행 다닌 셈이다.




만리장성(萬里長城)을 첫 번째로 방문했다. 이 만리장성은 북방 민족들이 남쪽으로 밀려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 축조한 성이라 하는데, 세계 불가사의 중 하나라는 말이 있을 만큼 긴 성벽이다. 산하이관을 기점으로 계산해도 장성 총길이가 6,000km가 넘는다고 하니, 서울-부산 간 거리의 15배가 넘는 거리에 성벽을 축조한 셈이다.


그 긴 길이의 성벽을 쌓기 위해서는 당연히 오랜 시간과 엄청난 규모의 인력과 물자가 동원되어야만 했었을 것인데, 그럼에도 그 기나긴 장성을 굳이 구축했던 것을 보면 과거 한족(漢族)에게 북방 민족이 얼마나 두려운 존재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직접 가서 본 만리장성은, 한국에서 보던 성벽보다는 역시 높고 웅장했다. 하지만 그 길이를 외로 하면 높은 산속에 성벽이 위치하고 있어서 그런지, 시안(西安)과 같은 평지의 도시에서 보던 중국의 성벽과는 달리 성벽의 높이가 그만큼 높지 않았고 폭 역시도 상대적으로 좁았다. 시안에서 봤던 성벽은 높이도 꽤 높았지만 특히 폭이 상당히 넓어서 성벽 위가 거의 4차선 도로로 보일 정도였는데, 만리장성 성벽의 폭은 그에 훨씬 미치지 못했던 것이다.


(서안의 성벽)

https://beyondtheboundaries.tistory.com/280


아울러 주말이라 그런지 외국인뿐 아니라 중국 전역에서 온 중국인 관광객들도 너무 많아 넓지도 않은 성벽이 더 좁아 보였고, 그런 사람들에 치여서 유물이나 경치에 집중하기도 어려웠다.


중국에서 이미 너무나 크고 웅장한 성벽들을 여러 번 봐서 그런지, 만리장성은 소문으로 들었던 것만큼 인상적이지는 못했던 것 같다.


사진) 만리장성. 주말이라 관광객들이 많았다 (2006년 11월 11일 토요일)




반면, 만리장성에 이어서 방문했던 자금성(紫禁城)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명(明) 나라 때 1420년에 완공되어 청(淸) 나라에서도 황제의 궁궐로 사용됐다는 자금성은 그 면적이 72만 제곱미터로 세계 최대라 한다. 그런데 한국의 경복궁 면적도 43만 제곱미터라 하니, 그 규모에 있어서 그다지 작은 궁은 아니었던 것 같다.


다만, 자금성을 둘러싸고 있는 담의 높이는 꽤 높아서 다소 아담해 보이기까지 하는 경복궁의 담과는 비교할 수 없었고 나름 꽤 위압적인 느낌이었다.


(자금성 성벽 높이를 수 있는 사진)

https://m.blog.naver.com/bing5835/221051024837


나중에 한국에 귀국해서 말로만 듣던 그 유명한 문경새재를 한번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그런데 문경새재를 보기 전에 이미 중국의 너무 거대한 성벽들을 보고 난 이후라 그런지 문경새재의 낮고 아담한 성벽을 보면서 중국에서 보곤 하던 성벽들과 비교되어 혼란스럽기까지 했던 기억이 있다.


(문경새재 성벽 모습)

https://m.blog.naver.com/bogirang/221962956426


그렇게 낮고 아담한 문경새재 성벽이 과연 군사적인 기능을 제대로 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는데, 굳이 좋은 점을 찾는다면 그만큼 한국의 군주는 성벽을 좀 더 두텁고 높게 쌓는 데에는 관심을 덜 가졌다는 얘기도 될 수 있을 것 같아서 어렵고 불쌍한 백성들의 노역도 그만큼 줄어들 수가 있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은 들기도 했다. 중국은 성벽과 건축물이 그렇게 높고 웅장했던 만큼, 그런 것을 건축하는 데에 동원되어야만 했던 중국 백성들의 노역과 부담도 분명 그만큼 컸을 것이다.


한편, 자금성을 보면서 청(淸) 나라의 마지막 황제 얘기를 다룬 1987년 영화 '마지막 황제'의 여러 장면에 등장했던 바로 그 자금성을 눈앞에서 실제로 보고 있다고 생각하니, 감회가 새롭기도 했었다.


(영화 마지막 황제 끝부분 06:00)

https://youtu.be/MItvf7rfJ_Q


한편 자금성의 공식 명칭은 고궁박물원(故宮博物院)인데, 세계 4대 박물관에는 루브르 박물관 등과 함께 중국의 온갖 보물이 다수 소장되어 있는 이 고궁박물원이 거론된다. 단 좀 아이러니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고궁박물원은 중국 수도 베이징에 있는 그 고궁박물원이 아니라, 같은 이름을 가진 대만의 고궁박물원이다.


모택동에 패해 장개석과 국민당군이 대만으로 도피를 할 때 장개석은 자금성에 보관돼 있던 청나라 황실 보물 등 중국 전역의 보물 수십만 점을 함께 배에 실어 대만으로 가지고 갔다. 그리고 대만에 동일한 고궁박물원이라는 이름을 가진 건물을 새로 건축해서 가져온 보물들을 그곳에 전시하였다.


결국 베이징의 고궁박물원은 그 껍질만 남게 됐고, 그 안에 있던 정말 중요한 알맹이 보물들은 이런 과정을 거쳐 모두 대만의 고궁박물원으로 이관되게 된 것이다.


(장개석이 대만으로 가져온 보물 관련 기사)

https://mnews.joins.com/article/23397216


(대만 고궁박물원 소장 보물 소개 블로그)

https://blog.naver.com/petrascience/221580076809


사진) 자금성 방문 당시 성 내부에서 찍은 사진. 붉은색으로 칠해진 성벽이 인상적인데 이 거대한 문이 자금성 내부에서 찍은 천안문이다.



자금성의 천안문을 통해 외부로 빠져나오면, 바로 앞에 그 면적이 44만 제곱미터로 세계 최대의 광장이라는 '천안문 광장(天安門廣場)'이 나타난다. 이 광장에서 천안문 방향을 바라보면 거대한 모택동의 초상화가 성벽에 걸려 있는 것이 보이는데, 뉴스나 사진에서 너무나도 자주 봤던 익숙한 그 모습을 현장에 와서 실제로 바라보니 기분이 좀 묘했다.


그런데, 역사의 아이러니지만, 지금은 모택동의 초상화가 걸려 있는 그 천안문에는 1946년부터 약 3년간 장개석의 거대한 초상화가 걸려있었다 한다. 하지만 국민당이 패퇴해 대만으로 쫓겨나고, 공산당이 1949년 베이징을 점령하게 되면서 장개석의 초상화는 모택동의 초상화로 대체되었고 오늘날까지도 그 상태가 유지되고 있다. 장개석의 초상화는 현재 모택동의 초상화보다 더 크고 더 위쪽에 걸려 있었다 한다.


(천안문에 걸려 있던 장개석 초상화)

https://blog.naver.com/dovan125/140212013052


천안문 광장은 '천안문 사건'이라고 불리는 민주화 시위가 1976년 및 1989년 10여 년 간격으로 두 차례나 발발했던 곳이다. 그래서 그런지 광장 도처에는 정복을 입은 경찰이 다수 배치되어 있었다. 그 외에도 군데군데 경직된 인상의 짧은 머리를 한 사람들이 광장 안의 관광객들을 끊임없이 주시하고 있는 것으로 봐서, 정복을 입은 경찰 이외에 사복 경찰들도 다수 배치되어 있었던 것 같았다.


(1989년 천안문 사건 관련 사진)

https://blog.naver.com/happyhany1/221185076845


사진) 자금성에서 나와 천안문 광장에서 찍은 사진. 왼쪽 뒤편으로 거대한 모택동의 초상화가 걸린 천안문이 보인다.




따샨즈 798 예술구도 방문했었다. 다른 곳은 모두 나 역시 처음 방문하는 처지라 길도 모르고 소개할 내용도 없었다. 하지만 이곳은 이미 여러 번 와 본 적이 있어 오랜만에 좀 더 자신 있게 예술구 곳곳을 소개하고 다닐 수 있었다.


당시는 아직 이 예술구가 본격적으로 확대되고 유명해지기 전이었음에도 선배 가족들 역시 이 예술구에 대해서는 모두 꽤 인상적으로 받아들였다. 이 예술구에 대해서는 이전 글 '2006년 5월의 798 예술구' 부분에 상세한 내용이 있다.


사진) 798 예술구 안의 화랑에서 가족사진을 찍는 선배.




이화원(頤和園)도 방문했었다. 이화원은 중국이 서구 열강 침략을 받아 만신창이 신세가 되어 있던 청(淸) 나라 말기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이 연거푸 번씩이나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던 만행이 저질러진 곳인데, 당시에 영국과 프랑스가 약탈해간 이화원의 수많은 유물 소유권 문제로 요즘도 종종 중국과 두나라간 국제적 이슈가 되기도 한다고 한다.

(이화원의 모습 동영상, 01:38)

https://www.youtube.com/watch?v=YJw52QTBH8U


이화원은 건축양식이 아름답고 특이해서 세계적으로도 꽤 유명한 곳이라 하는데, 그토록 너무 아름다워 그런지 당시 청나라의 실권자였던 서태후(西太后)도 이 궁을 사랑해서 자신이 직접 이곳에 거주하기도 했다 한다.


그런데 참으로 어이없는 것은 아편전쟁 이후 중국이 서구 열강의 반식민지처럼 되어 있던 당시, 청나라의 실권자였던 서태후와 그 측근들은 서태후가 거주하고 있던 이 이화원의 복구에 투입할 자금이 부족하자 무너져가는 국가의 국방력 회복을 위해 조성된 거액의 해군 자금을 빼내 궁의 복구에 사용했다고 한다.


국가의 운명이 풍전등화 같고 많은 국민이 도탄에 허덕이는 상황에서, 그 국가 지도자라는 사람들실권자가 거주하는 궁을 보수하기 위해 군자금마저도 유용했을 정도니 이것만 봐도 청나라의 운명은 이미 그 끝을 다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시청, 구청, 도청, 주민센터 등의 건물은 점점 더 그 규모가 커지고, 더 화려해지고, 더 아름다워지는 반면, 한겨울이나 한여름이나 폐지들이 가득한 수레를 끌고 다니며 생계를 유지해야만 하는 어르신들은 전혀 줄지 않고 여전히 너무도 흔하게 볼 수 있는 요즘 한국 현실이 그러한 이화원과 연관되어 연상되는 것은 왠지 모르겠다.


사진) 무더운 한여름에 허리가 많이 꾸부러진 어르신들이 폐지가 든 리어카를 끌고 다니시는 모습 (2017년 6월)


이화원에 대해서는 서태후와 그 태후를 추종하던 탐관오리, 그리고 호수를 보기가 어려운 건조하고 삭막한 베이징에서 오랜만에 볼 수 있었던 거대한 호수 쿤밍호(昆明湖) 외에는 별로 기억에 남는 것이 없다. 이화원은 한마디로 백성들의 고혈로 만들어진 왕족의 놀이터 같은 느낌뿐이었다.



베이징의 유명한 골목길인 '후통(胡同)' 또한 이 여행길에 마침내 가 볼 수 있었다. 후통은 서울의 북촌이나 서촌 또는 전주의 한옥마을 같은 오래된 주택들이 여러 채 모여 있는 그런 공간이었다.


사실 나는 골목을 꽤 좋아해서, 서울에서는 물론 과거 내가 주재했던 해외 모든 도시에서도 시간이 생기면 그 도시의 이곳저곳에 있는 골목길들을 혼자 하염없이 헤매고 다니곤 했었다.


골목길을 다녀보면, 웅장하고 잘 꾸며진 화려한 공간에서는 결코 맛볼 수 없는 그 나라와 그 나라 사람들의 깊은 모습을 보는 느낌인 것 같아서 좋았고, 무엇보다 그런 좁고 아늑한 골목길이 내게는 꽤 정이 가는 공간으로 느껴졌다. 필름을 사용해서 사진 찍던 시절에도 비싼 돈을 지불해 필름 사고 매번 인화까지 해가며 그런 골목길 사진들을 찍어두었는데, 정말 안타깝게도 한국에 남겨 두었던 그 모든 사진은 내가 해외 근무로 오랜 기간 한국을 떠나 있는 동안 거의 전부가 분실되어 버렸다.


베이징에서도 역시 매일 걸어서 회사에 출근하고 주말에는 교회도 걸어서 가면서 이곳저곳의 골목길들을 경험해 봤다. 하지만 정작 가장 유명한 후통 골목길은 직접 찾아가 보지 못했는데 선배 가족들을 가이드하게 된 덕분에 이곳에도 마침내 처음으로 방문하게 되었다.


(후통의 주택 및 거리 모습)

https://m.blog.naver.com/barasun/222269268256


서울은 1394년 이성계가 개경(開京)에서 한양(漢陽)으로 천도하면서 조선의 수도가 되어 현재까지도 한국의 수도로 유지되고 있다. 하지만 베이징은 그보다 수백 년이나 앞선 1100년대에 여진족(女眞族)의 금(金) 나라가 중국의 북방 지역을 지배하던 시절부터 수도로 사용되었던 곳이고, 이어 중국을 통일한 원(元) 나라, 명(明) 나라, 청(淸) 나라 시절 역시 수도로 사용되었다.


그만큼 수도(首都)로서의 역사가 오래된 곳이었고, 그러다 보니 당연히 오래된 골목길도 많았다. 물론 현재 베이징에 남아있는 골목길이 모두 금나라 시절부터 있었던 길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원나라는 베이징을 점령한 후 베이징시를 초토화시키고 거의 모든 것을 새로 건설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좁고 오래된 후통의 골목길을 걷다 보니, 북촌이나 한옥마을보다는 내가 태어났고 또 성장했던 서울 돈암동의 낡고 오래된 골목길이 더 연상되는 것 같았다. 우리 가족이 돈암동 골목길 허름한 주택에서 한때 삶을 영위하며 인생의 한 순간을 보냈듯이, 후통 골목길에서도 우리의 가족들과 비슷한 사람들이 오랜 기간 그 좁고 꾸불꾸불한 길 주변의 주택에서 비슷한 인생의 희로애락을 느끼며 삶을 영위했을 것이다.


후통의 오래된 골목길과 주택들에는 아직도 오래전 그곳에 살았던 사람들의 숨결과 온기가 가득 남아 있는 것 같은데, 아쉽지만 초고층 건물이 가득한 도시로 베이징이 급격하게 변모되는 실정에서 그 오래되고 푸근한 후통 골목길이 과연 언제까지 남아 있을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사진) 2박 3일간 급하게 서둘러서 돌아다니는 여정이 몹시 피곤했는지, 선배 부인과 딸은 차 타고 이동하는 시간에는 내내 이렇게 차 안에서 나란히 앉아 잠을 자곤 했었다.




유명 명소는 아니지만 내게는 생소했던 베이징 서쪽 지역도 역시 서울에서 온 지인 덕분에 처음 가 볼 수 있었다.


베이징에 근무하던 시절 현지인 임원 한 사람이 회의 중 여담처럼 말하기를, 나 같은 스텝부서의 주재원들은 베이징 서쪽 지역은 좀처럼 다니지 않는 것 같은데 베이징을 좀 더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서쪽 지역에도 한 번 가보라고 추천한 적이 있었다.


그 말을 듣고 생각해 보니 실제 그 임원 말대로, 회사도 동쪽 지역에 있었고, 주재원들이 거주하는 지역이나 코리아타운 왕징, 심지어 자주 가는 식당이나 술집 모두 베이징시 중심 혹은 동쪽에 몰려 있었다. 그러다 보니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나 역시 서쪽 지역은 한 번도 가 본 기억이 없었다.


그즈음 이번에는 직장 후배 가족이 단체 관광으로 베이징에 왔던 차에 자유시간에 만나자고 연락이 와서 저녁에 식사를 접대하기로 하고 후배가 체류하고 있던 호텔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런데 마침 그들이 머물고 있는 호텔이 베이징 서쪽 지역에 있는 호텔이라 처음으로 서쪽 지역을 방문하게 되는 기회가 생겼다.


호텔에 차를 가지고 가서 후배 가족을 태우고 호텔 근처에 있는 중국식 해산물 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함께 했었는데, 그때 처음 가본 베이징시 서쪽 지역의 분위기는 역시 동쪽 지역과는 좀 달라 마치 다른 도시에 와 있는 것처럼 생소한 느낌까지 들었다. 뭐라고 할까, 동쪽 지역이 서울의 강남과 비슷한 분위기라면 서쪽 지역은 강북을 연상시키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당시 중학생이었던 후배의 딸 2명도 그날 같이 식사를 했는데, 나름대로는 멀리서 여행 온 후배 가족들 융숭하게 접대한다고 살아 있는 랍스터 같은 꽤나 고급 해산물로 저녁 식사를 접대했음에도 나중에 약 10년 후 두 딸을 다시 만났을 때 당시 맛있는 식사 접대한 아저씨 기억나냐고 물었더니, 한 명도 아니고 두 명 모두 나를 앞에 두고도 합창하듯이 전혀 기억이 안 난다고 했다. 하긴 한참 먹성 좋았을 그 나이에 음식이 중요하지 아버지 친구 누가 사줬는지는 전혀 관심이 없었을 것이다....




대부분의 월급쟁이가 그랬겠지만 사실 주말에는 아무것도 안 하고 졸도한 것처럼 그냥 푹 쉬고 싶기도 했다. 그럼에도 서울에서 여행 오는 지인들이 부탁해 오는 경우, 오랜만에 만나서 반갑기도 해서 그렇게 현지의 가이드 역할을 하기도 했는데, 지나고 보니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집, 회사, 식당, 술집 등등 정해진 공간만을 헤매던 베이징 생활에서 그나마 그렇게 가이드 역할을 한 덕분에 베이징 명소를 조금이라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던 것 같다.


비록 나 역시도 처음으로 방문해 보는 그들과 같은 처지의 '왕초보' 가이드이긴 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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