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인구가 5,200만 명으로 전 세계 28위에 등재되어 있을 만큼 결코 적은 규모가 아니고, 또 한국도 해외 이민을 많이 가는 국가 중 하나라서 그런지 해외의 대도시에 가면 코리아타운이 형성되어 있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과거 내가 거주했던 도시 중, Paris 경우 대도시이긴 했지만 교민 수가 워낙에 적어서 코리아타운이라고 언급할 수 있는 정도의 공간은 없었고 그저 한국 식당이나 식품점만이 시내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하지만 이후 거주했던 Toronto에는 10만이 넘는 교민이 거주한다고 알려진 만큼 시내에 적지 않은 규모의 코리아타운이 있었다. 출장으로 이따금 들르곤 했던 미국의 LA나 New York 등도시에는 교민 수가 훨씬더 많아서 당연히 Toronto 보다 규모가 큰 코리아타운이 있었다.
중국으로 발령받아 와 보니, 중국에도 역시 베이징, 상하이, 광저우 등 주요 대도시에는 코리아 타운이 있었다. 베이징 경우에는 시 동북쪽의 '왕징(望京)'이라고 불리는 지역에 코리아타운이 있었는데 미국의 코리아타운처럼 이곳에도 한국과관련되는 것은 식당, 슈퍼, 이발소, 학교, 과외학원, 당구장 등등 정말 거의 모든 것들이 다 있었다.
전성기 시절 왕징 코리아 타운에만 약 10만 명의 한국인이 거주했다 하니 인구면에서는 미국의 코리아타운에도 크게 뒤지지 않는 것 같았다. 게다가 중국에는 또 조선족이라는 중국 국적을 가진 우리 동포도 있는데, 사업을 하거나 일을 하기 위해 왕징에 거주하는 조선족 인구가 약 5만 명 가까이 되었다 하니, 한국인 인구에 이런 조선족 인구까지 합치면 왕징의 한국어 구사 인구는 대략 15만을 넘었을 것이다.
또 왕징 지역 내 한국인 주민뿐 아니라, 베이징 여타 지역에 거주하는 한국인들도 모임이나 회식을 할 때면 으레 왕징의 한국 식당에서 하는 경우가 많았던 만큼 왕징 전성기 시절 한때는 약 20만도넘을 한국인들이 왕징 곳곳의 거리들을 누비고 다녔을 것이다. 그렇게 한국인과 조선족이 넘쳐나다 보니 그 시절 왕징의 식당이나 거리에서는 한국어로 대화가 가능한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식당의 메뉴나 거리의 간판도 역시 한국어로 표기된 것이 대다수였다.
시내의 다른 지역에 있는 한국 식당에서는 웬만해서는 찾기 어려운 음식 메뉴들도왕징에는 있었다. 한국식의 짜장면과 짬뽕 파는 식당은 물론이고, 전날 마신 술의 숙취를 풀어 줄 얼큰한 콩나물국밥을 그것도 꽤 이른 새벽에 먹을 수 있는 곳도 있었다.
베이징에 출장 갔다 공항으로 돌아갈 때 아침 일찍 일어나왕징으로먼저 가서 그곳에서 콩나물 국밥 먹고 속을 푼 후 상해, 광주 등 타 지역으로 돌아가는 출장자들도 많았다. 나 역시 베이징을 떠나서 대만이나 홍콩에 근무할 때는 출장을 마치고 아침에 공항에 돌아갈 때 좀 피곤하더라도 조금 더 일찍 일어나 우선 왕징으로가서 콩나물국밥한 그릇 후딱 먹고 속을 해장한 뒤에 공항으로 가곤 했었다. 매섭게 추운 겨울 새벽에 먹는 뜨근뜨근하고 얼큰한 그 집 콩나물 국밥 정말 잊기 어려울 만큼 시원했다.
크고 작은 한국식품점 또한 20여 개도 넘게 있었는데 한국 식재료는 거의 모두 구할 수 있었다. 나역시 이곳에서항상 장을 보곤 했었는데, 내가 살던 지역에서 왕징까지는 다소 멀어 매일 장을 보지는 못했고, 일주일에 한 번 주말에 가서 김치, 북어, 고추장, 라면, 어묵, 쌀 등 온갖 한국 식재료를 한꺼번에 잔뜩 사 가지고 오곤 했다. 매주 차 안에 한국 식품 재료를 가득 채우고서 집으로 돌아올 때는 일주일치 일용할 양식이 준비되었으니 마음이 뿌듯하기도 했다.
담배를 끊은 지 10년도 넘어 요즘도 그런 담배가 있는지 잘 모르겠지만, 한국 식품점에 가면 그 시절에 인기가 많았던 'This'라는 한국 담배도 팔았다. 식품점 갈 때는 이 담배도 한 보루씩 사 오곤 했었는데, 당시 판매 가격이 한국보다도 싸서 혹시 짝퉁 아닌가 싶기도 했다. 하지만 수출용으로는 세금이 빠져서 그런 가격에 팔릴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든다.
10 RMB(한화 약 1600원)만 지불하면 한국 영화 DVD를 살 수 있는 가게도 있었다. 한국에서 유명한 영화는 거의 다 있었는데, 때로는 한국에서 개봉된 지 채 1주일도 안되서도그 영화 복제판이 진열되어 있는경우도 있어 좀 놀랍기도 했었다. 요즘도 중국의 방송사들이 한국의 드라마 및 예능 프로그램 Contents를 불법으로 다수 도용하고 있어 지속 문제가 되고 있다고 하지만, 2005~6년 이미 중국의 불법 복제는 수준이나 능력, 조직 면에서 상당한 수준이었던 것 같다.
'한국 국제학교'라는 초등학생이나 중학생을 위한 학교도 왕징에는 있었고, 또 한국인 자녀들을 위한 학원이나 과외 시설도 이 지역에 다수 몰려 있었다. 사실 바로 이러한 교육 인프라 때문에 자녀가 있는 주재원은 왕징에 거주하는 것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경우도 많았다. 또 이곳에는 한국인이 운영하는 이발소도 많아서 한국말로 원하는 헤어스타일을 요청하면서 이발을 받을 수도 있었다.
사진) 2006년 10월에 찍은 왕징 3구, 4구 아파트 및 거리 모습. 첫 번째 사진 녹색 간판 있는 곳이 '이윤당'이라는 내 단골 안마소인데, 들어가 보면 왕징 교민들 포함 안마받는 손님들의 99.9%는 한국인이었다.
한국인이 운영하는 점포는 아니지만 왕징에는 이윤당(颐润堂)이라는 꽤 유명한 안마소도 있었는데 고객은 거의 전부 한국인이었다. 가격도 비싸지 않았고 무엇보다 안마를 너무 잘해서 나도 거의 매주말 그곳에 가서 안마를 받곤 했는데, 매주 그곳에서 안마를 받고 나면 정말이지 지나간 일주일의 피로가 싹 풀리는 것 같았다.
이 안마소를 2017년에 방문한 후 내부 사진을 올린 자료도 검색해 보니 나오던데 내가 방문하곤 하던 시점으로부터는 10여 년이라는 긴 세월이 흘렀지만 내부구조는 거의 변한 것이 없는것 같았다.또 그런 내부 사진을 보니 2005~6년 그 시절 그곳에서 받던 너무나도 시원했던 그 안마가 문뜩오랜만에 떠오르기도 했다.
영상) 2006년 이윤당에 가면서 차 안에서 찍은 이윤당이 있던 왕징 3구 아파트 단지 모습 (00:43)
왕징에는 이처럼 안마소까지 포함해서 한국인이 즐기거나 필요로 하는 거의 모든 인프라가 구축되어 있었다. 왕징 만 가면 웬만한 것들은 모두 해결할 수 있었다는 얘기다. 다만 그런 왕징에도 매우 큰 단점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치안이 꽤 안 좋았다는 것이었다.
내가 베이징에 거주하던 시절 2005년 10월에도 왕징에서 20대 한국인 여성이 납치당할 뻔한 사건이 있었고, 그 몇 주 뒤에는 한국인 어린 학생이 피살되는 사건도 있었다. 또 모 회사 한국인 주재원이 중국인에게 집단폭행을 당한 경우도 있었다. 이런 사건들은 교민 신문에 게재되거나 영사관에서 각 회사에 공지하고, 각 회사는 다시 소속된한국인들에게 전파해 주곤 했는데, 사실 여러 가지 이유로 공식적으로는 신고하지 않고 넘어간 건도 적지 않을 것이니 실제로는 더 많은 사건이 있었을 것이다.
왕징에 거주하던 지인으로 관계사에 근무하던 30대 초반의 여성인데 그녀도 섬찟한 경험을 직접 체험했던바가 있다고 했다. 출근할 때는 그녀의 아파트에서 나와서 아파트 정문 입구에서 택시를 타고 회사로 가곤 했는데, 어느 날 뭔가 좀 이상한 느낌이 들어 택시 기사를 보니 이미 여러 번 본 사람 같더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얼굴을 확실하게 기억해 두고서 다음날도 역시 같은 장소에서 택시를 탔는데 놀랍게도 어제 인상을 기억해 두었던 바로 그 기사였다는 것이다.
아침 출근 시간에는 당연히 택시를 찾는 손님이 꽤 많았을 것임에도그 기사는 다른 손님은 태우지 않고 항상 그녀가 나올 때까지는 근처에서 기다렸다가 그녀가 나오면 곧바로 아파트 입구로 와서 그녀를 태우고 다녔던 것이었다. 물론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매일 아침 동일한택시를 반복해서 탈 수 있는 확률이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결국 이런 사실을 알게 된 이후에는 그녀는 무서워서 다른 길로 나와서 다른 택시를 타고 출근했다고 한다.
지금은 변했겠지만, 2005~6년 당시왕징은일종의 섬처럼 떠있는 동네 같아서 중심 지역은 사람들도 많고 번화했지만 중심에서 조금만 떨어져도 가로등 조차도 제대로 설치되어 있지 않은 컴컴하고 인적도 뚝 끊기는 그런 곳으로 갑자기 연결되곤 했었다. 그런 으슥한 지역에는 매우 불량스러워 보이는 사람들까지 삼삼오오 모여서주변을 두리번거리는 경우도 있었는데, 그러한 곳은 나 역시도 가기가 두려웠던 기억이 있다.
물론 왕징에도 최고급 아파트 단지가 여러 개 있었고, 그런 아파트 단지들은 단지 전체에 높은 담을 두르고 경비원들과 보안 시스템으로 이중 관리를 했기 때문에 일반 아파트와는 달리 상대적으로 치안이 좋았다, 하지만 그 아파트 단지의 담만 벗어나면 치안 수준에서 여타 왕징지역과 차이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그런 아파트에 살더라도 집에 오가기 위해 담 밖을 지나가야 할 때는 차를 타고 다니지 않는 한 동일한 위험에 처할 수밖에 없었다.
초기에는 왕징 3구와 4구의 아파트에 한국인들이 밀집해서 거주했다고 한다. 하지만 왕징이 베이징의 코리아타운으로 본격적으로 성장해 가면서 사람들이 몰리기 시작하자, 훨씬 더 고급스럽고 비싼 아파트들이 기존의 아파트 단지 주변에 들어서기 시작했는데, 빈부차가 심한 국가라 그런지 새롭게 들어선 호화스러운 아파트의 수준은 한국 고급 아파트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대단했다.
그런 고급 아파트 중에 '클래스'라는 아파트도 있었는데 이 아파트에는 아래위 2개 층을 터서 복층 구조로 된 아파트도 있었다. 마침 동료 주재원이 그곳으로 이사를 가게 돼서 나 역시 집들이 가면서 생전 처음으로 그처럼 고급스러운 복층 아파트를 구경해 볼 기회가 있었는데, 호화스러운 시설에도 놀랐지만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복층 아파트가 당시 내게는 좀 신기하기까지 했던 기억이 있다.
그 집이 너무나도 멋져 보이다 보니 한때 나도 이번 기회에 이렇게 멋진 곳으로 이사를 와서 한번 정도는 정말 폼나게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잠시 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이후 몇 달도 지나지 않아 갑자기 대만으로 발령받아 베이징을 떠나게 되면서 그런 고민은 더 이상 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재미있는 것은 왕징이 한국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이라 그런지 새로 건축되는 아파트 중에는 한국처럼 온돌방식의 난방방식이 채택된 아파트도 있었다. 그런데 온돌에는 전혀 익숙하지 않았던 중국인들도 그곳에서 온돌방식을 경험해 본 이후에는 그러한 온돌 난방 방식을 꽤 선호하게 된다고했다. 반대로 한국에 사는 동안 거의 평생 온돌식 난방 방식 주택이나 아파트에 살다온 나는 온돌 방식이 아닌 베이징의 아파트에 거주할 때 정말 많이 추웠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최근의 언론 기사를 보면 왕징의 상황도 이제는 많이 바뀌어, 경제력 상승으로 그 수가 크게 늘어난 중국인 부자들이 점점 더 많이 왕징으로 이주해 오고 있는 반면, 소득 성장이 멈춘 한국인들은 그들에 밀려 외곽으로 빠져나가고 있다 한다.
게다가 사드(THAAD)를 빌미로 중국 정부가 의도적으로 한국업체나 한국인에 대해서 반감을 조장하기 시작하면서, 반한 감정으로 손님도 줄었고, 그 많던 한글 간판도 이제는 대다수가 중국어로 바뀌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처럼 경제적 어려움에 정치적 압력까지 겹치면서 전성기 10만에 달했던 왕징의 한국인 수는 급격히 줄어들어 최근에는 불과 2만 명 수준으로까지 감소했다고 한다.
이 거리뷰 속에 보이는 건물이 '왕징 한국성(韓國城)'으로 불렸던 건물로 건물 내에는 과거 한국식당들이 즐비했었고, 건물의외부도 역시 거의 한글 간판으로 도배되어 있다시피 했었다.
하지만 사드 사태 이후 반한 감정 때문이라는 이유로 건물 이름이 '미식성(美食城)'으로 바뀌었고, 간판도 중국어로 대부분 변경되어 위 거리뷰를 보면 이제는 건물의 왼쪽 끝 부분에 '돌고래'라는 간판 오로지 한 개만 한글로 적혀있다.그런데 아래 블로그 사진을 보면 2019년 여름에는한걸음더 나아가 도시 재정비를 이유로 아예 건물 자체를 허물어 버린것 같다. 과거 한국성이라 불렸던 그 건물 자체를 이제 더 이상 볼 수도 없게 된 것이다.
이 거리뷰에 보이는 지역은 왕징 3구 끝자락 부근에 있었던 쇼핑몰이다. 바로 이 몰에 전술했던 유명 콩나물 국밥집이 있었고, 매주 한 번씩 가서 장을 봤다는 한국 식품점도 역시 이곳에 있었다. 당시에는 이러한 가게들의 간판 포함 건물 앞에 부착되어 있었던 간판들 대부분이 한글이었는데, 이제 거리뷰를 다시 보니 이곳도 한글 간판은 거의 다 사라졌고, 2층에 북한인이 운영하던 호프집의 간판으로 보이는 '평양 대성 산관'이란 간판만 달랑 한 개 남아있다. 국밥집과 한국 식품점은 아예 매장 자체가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곳은 왕징 4구의 쇼핑몰인데, 여기에도 한국식 짜장면을 파는 식당 포함 다수의 한국 식당들이 있었고 건물 외부의간판 역시 대부분 한글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곳도 이제 거리뷰에서 보는 것처럼 한글로 쓰인 간판은 '남가네'라는 간판 단 한 개뿐이다. 간판을 중국어로 바꾼 곳도 있겠지만 이곳도 매장 자체가 아예 없어져 버린 경우가 많은 것으로 보인다.
위의 장소들은 모두가 대로변에 있는 건물들이다. 그렇지만 아파트 단지 안에도 식당들이 다수 있었는데, 검색해 보니 왕징 4구 아파트 단지 안에 있는 식당들 간판은 그나마 아직 한글로 되어 있는 곳이 꽤 남아 있었다. 아마도 노출이 크게 되는 대로변이 아니라 단지 내부라서 한글 간판을 유지하고 있어도 교체하라는 압력이 그다지 심하지 않아서 그럴 수 있었던 것 같다.
정부 차원에서 뿐 아니라 민간인 차원에서까지 의도적으로 반한 감정을 조장하여 왕징이라는 한국인 밀집 거주 지역이 영향받도록 만드는 중국 정부의 행태가 참으로 비열하게만 느껴진다.
되돌아보면 동아시아의 오랜 역사 속에서 한국은 중국으로 인해 이미 너무 많은 고통을 받아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현상이 여전히 진행되고 있는 것인데, 아직도 이에 대응할 마땅한 대책이 없으니 답답하고 서글프기까지 하다.
중국 외교부의 일개 관리가 회담장에 있는 수많은한국인들 면전에서 한국을 소국이라고 언급한 경우도 있었고, 한국에 거주하는 중국인 유학생이 한국 내 대학의 대자보를 함부로 찢어 버리는 일도 여러 차례 있었으며, 심지어 바이러스를 이유로 한국 교민 집을 중국인들이 각목으로 봉쇄해버리는 사태까지도 발생했다.
한국도 중국과 가까이 있지만 베트남은 아예 중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다. 그런 베트남은 중국과 전쟁을 치르고도 지지 않았던 경험이 있다. 그래서 그런지 베트남인들은 최근에도 지속되는 중국과의 '난사군도(Spratly Islands)' 영유권 분쟁에서도 매우 강하게 중국에 대응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심지어 몇 년 전 그 지역에서 중국과 분쟁이 발생했을 때는 베트남 육군이 국경을 넘어 중국 영토를 선제공격할 것이라고까지 중국에 엄포를 놓은 바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