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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 첫 번째 사표

■ 그 주재원의 서글픈 기억들 (7편 HK, Macau-37)

by SALT

외 주재 근무 14년간의 기억을 적은 이야기

Paris, Toronto, Beijing, Guangzhou, Taipei,

Hong Kong, Macau

그리고 다른 도시들에서의 기억......



Hong Kong, Macau



37. 내 인생 첫 번째 사표


지금도 그 기억이 생생하다. 지원한 회사 신입사원 면접을 보는 날이었는데, 시청 앞에 있던 그 회사의 면접장 안으로 들어서니 심사위원단 맨 끝에 신문 및 TV에서 너무도 자주 뵈었던 어떤 분이 잔잔한 미소를 짓고 앉아 계셨다. 바로 그 그룹의 회장님이셨다.


이 그룹은 신입사원 면접에 그룹의 총수이신 회장님이 직접 참석하시는 것으로 당시 유명했었는데, 점점 연세가 드셔서 그랬는지 그분이 참석하셨던 면접은 그해가 마지막이었다 한다. 면접장에는 그분 이외에도 6~7명 정도의 심사위원이 재판관처럼 그분 옆에 나란히 앉아 있었는데 그들의 정면에 앉아 있던 나는 너무도 긴장해서 그 자리에서 무슨 질문을 받았었고 또 뭐라고 답변을 했는지 이제 전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어쨌든 그날 면접은 통과했다.


면접까지 통과해서 최종 합격한 이후에는 신입 사원 연수를 받았고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아 군대로 갔다. 그리고 3년 반의 군 복무를 마친 후 회사로 복직하니 바로 그다음 해에 그분이 돌아가셨다. 결국 면접 때 그분을 뵌 것이 처음이자 또 마지막이 되었던 셈이다.


입사 시험에 합격하니 몇 주간에 걸친 그룹의 합숙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해서, 경기도 산속에 있던 그룹 연수원으로 갔다. 연수원에 도착해서 배정받은 방에 짐을 풀고 지시에 따라 연병장 같은 곳으로 내려갔더니, 지도 선배라 불리는 교관 같은 사람들이 연단 위에 올라와 확성기로 뭔가 말을 했다. 그런데 그 말을 듣고 나는 잠시 내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운동장 끝에 보이는 축구 골대를 돌아서 선착순 10명!"이라고 말한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말을 혹 잘못 들은 것은 아닌가 하고 자신의 귀를 의심했던 사람은 결코 나뿐이 아니었다. 주변에 있던 다른 신입사원들 역시 모두 두리번거리며 뭔가 이상하다는 듯이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신입사원 한 명이 갑자기 골대를 향해서 뛰어갔고 그를 시작으로 그곳에 있던 신입사원 수백 명 모두 우르르 골대를 향해 기를 쓰고 뛰어갔다.


그 지도 선배들은 실제 우리들에게 선착순을 시켰던 것이고 우리는 결코 잘못 들은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군대도 아닌 민간 회사, 그것도 유명 대그룹 신입사원 교육이 이와 같은 선착순 달리기로 시작되었던 시절이었다. 군대와 민간 회사 간 조직 문화 차이가 전혀 없었던 셈이다.


그래도 그날 군대에서 군기 잡는 것 같은 선착순을 했다고 사표를 제출했던 신입사원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지만 다른 그룹에 입사했던 내 대학 동창 경우는 신입사원 교육 첫날 사표 제출하고 연수원을 바로 나왔다. 그 그룹의 신입사원 교육도 우리가 받았던 교육과 당연히 별다른 차이가 없었을 것인데 내 동창은 군대에서 는 것 같은 그런 무지막지한 교육을 하는 회사는 다닐 필요조차도 없다는 생각에 입사한 그날 바로 퇴사했다는 것이었다.


사진) 신입 사원 교육을 받았던 연수원 모습. 이후 더 크고 좋은 연수원들이 생기면서 이 오래된 연수원에는 갈 기회가 없었다. 하지만 길고 길었던 내 직장 생활의 시작점은 바로 이 연수원이었다. 사진 오른쪽에 유리로 된 곳이 식당인데 이곳의 식사도 정말 너무나 맛있었지만 통유리로 된 창밖의 산 경치도 매우 아름다웠던 기억이 남아있다.




내 동창처럼 실제 사표를 쓸 용기는 없었지만 돌이켜 보면 28년 직장 생활은 입사 첫날부터 사표를 생각하게 만들던 그런 시간이었던 것 같다. 신입사원 교육을 마치고 회사로 배치되니 그러한 사표의 충동은 더 자주 그리고 더 강하게 느낄 수밖에 없었다. 물론 결코 나만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당시 같이 근무했던 동료나 선후배들 대부분 그러한 충동을 수시로 토로하곤 했었다.


생각해 보면 사표를 시원하게 던져 버리고서 홀연히 회사를 떠나는 영화 같은 그러한 장면은 사실 시절의 많은 신입 사원들에게는 '로망'이라고까지 표현하기에는 좀 과할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꼭 한 번은 해 보고 싶었던 그런 '꿈'과 같은 행동이었다.


그런데 직장 생활을 이어가면서 시간이 더 지나고 보니 그 꿈같은 감정은 오로지 신입 사원 시절에만 국한되었던 것은 결코 아니었고, 이후에도 계속 이어져서 20여 년 후 임원이 되고 나서도 여전히 지속되었다. 즉 사표라는 유혹은 직장 생활 내내 마음속 깊은 곳에 도사리고 있다가 너무 힘들고 지치면 에덴동산의 달콤한 사과처럼 어김없이 나타나서 나 같은 직장인을 진하게 유혹했던 것이다.


물론, 사표는 말 그대로 정말 '꿈'과 같은 것이었다. 시간이 지나고 나이가 들어가면서 꿈에서는 사표를 찾기도 했지만, 현실에서 들리는 소리는 솔직히 사표라는 단어와는 정반대 쪽에 있는 '무조건 버티자'였다. 회사에서 절대 잘리지 말고 '버티자'가 더 절실하게 가슴에 와닿는 현실 속의 소리였던 것이다.


따라서 그렇게 힘들고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불평하면서도 정작 사표를 쓰는 사람은 나 자신도 그랬지만 정말 보기가 어려웠다. 28년 직장 생활하면서 다른 회사로 이직을 하는 경우가 아니면서 그저 힘들고 열 받고 또 지친다고 스스로 사표 쓰고 직장을 떠나는 사람을 본 경우는 없었던 것이다.


아니 생각해 보면 신입사원 시절 딱 1명 있었다. 그는 S 대 독문학과를 졸업한 1년 정도 아래 후배였는데, 도무지 직장 생활이 적응되지 않는다는 말을 항상 입에 달고 사는 그런 후배였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사원들이 그 당시 워낙에 많아서 그다지 특이하게 들리지는 않았다.


심지어 내 동료 중 한 명은 아침 출근길에 버스에서 내려서 걸어오면서 당시 순화동에 있던 회사 건물이 멀리에서부터 보이기 시작하면 그때부터는 눈을 바닥으로 깔고 걸었다는 동료도 있었다. 회사 사무실이 있는 그 건물이 너무도 보기 싫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토록 극심한 혐오의 대상이었던 직장이 결국은 자신이 매일 출퇴근하던 직장이었던 셈인데 그럼에도 그도 결코 사표를 쓰지 않았다.


나와 같은 부서에 있던 대학 1년 선배는 실제로 책상 서랍에 항상 사표를 준비해 놓고 있었다. 그리고 과장이 한 번만 더 열 받는 얘기하면 서랍 속 사표 꺼내서 확 집어던지고 바로 사무실 박차고 나가버리겠다고 퇴근 후 함께 소주 한잔 할 때마다 수도 없이 장담하곤 했었다. 하지만 그도 역시 결코 사표를 쓰지 않았고 그로부터 무려 20년 이상 그 회사를 더 다녀 임원까지 승진한 후 전무에서 퇴직했다.


하지만 독문학을 전공한 그 후배는 달랐다. 자신은 도저히 이런 XX 같은 직장 생활은 조금도 더 할 수가 없다는 사실을 너무도 확실히 깨우쳤고, 아예 대학부터 다시 다녀 인생의 길을 싹 바꿔서 한국에서는 절대 직장 생활을 하지 않아도 먹고살 수 있는 그런 직업을 택하는 인생을 살겠다고 했다.


그리고 얼마 후 그는 실제 사표를 제출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사표 제출 전 이미 모 한의대 입학시험에 합격해 있던 상태였다. 즉 진작 퇴직 준비를 해 왔고 목표했던 한의대에 합격하니 꿈에 그리던 사표를 제출하고 26~27살의 늦은 나이에 1학년 신입생으로 대학교에 다시 입학했던 것이다.


내가 직접 본 사람으로는 그 후배가 완전하게 직장 생활을 정리하는 사표를 제출한 사람으로 첫 번째였고 현재까지는 마지막이었다. 회사에 배치받기도 전 신입 사원 교육 첫날 퇴직해버렸던 대학 동창의 경우는 논외로 한다면 말이다.


나와는 꽤 친했던 그 후배가 회사를 떠나기로 한 후 술 한잔 하면서 내게 했던 말이 지금도 기억난다. "선배님은 계단을 절대로 한 계단씩 오르지 않고, 언제나 두세 계단씩 급하게 올라가는데, 본인은 그것을 알고 있었느냐"는 질문이었다. 그런데 나는 사실 전혀 몰랐다. 아마 말단 사원 시절 모르는 것도 많은데 그날 처리해야 할 일은 너무도 많으니 다급한 마음에 하루 종일 그렇게 몇 계단씩 올라 다녔던 것 같았다. 하지만 어쨌든 항상 그러한 방식으로 계단을 올라 다녔다는 말을 들으니 왠지 시절 말단 사원들의 비애를 새삼 듣는 것 같아서 내가 생각해도 좀 측은하기도 했다.




나는 그 후배와 같이 인생의 판을 완전히 새로 갈아서 다시 시작할 용기는 결코 없었다. 따라서 결국 온갖 험난한 일을 겪으면서도 사표는 절대 쓰지 않고 버텼다.


과장이 중남미에 출장 가면서 지시한 일이 있어서 지시받은 그대로 해서 부장에게 제출했다. 그런데 그 부장이 새까만 신입 사원이었던 나를 부르더니 왜 자신의 지시대로 하지를 않았냐고 했다. 나는 부장 지시를 들은 적도 없었고 과장이 지시한 대로 작성해서 제출했다고 답변을 했는데 그럼에도 녹음기처럼 똑같은 질문을 몇 번이나 반복해서 했다.


결국 그간 푸~욱 쌓여 있던 감정이 그 기계 같이 반복되는 해괴한 질문에 갑자기 봇물 같이 터져 버렸고 나는 "과장이 지시한 그대로 작성했는데, 왜 과장에게 묻지 않고 나에게 따지느냐?"라고 항의하며 그 부장의 책상을 주먹으로 세게 내리치는 엄청나게 용감한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당연히 그 순간 사무실 내 주변은 적막이 흘렀고 그 부장은 미친놈 쳐다보듯이 나를 보더니 이내 가라고 했다.


이후 그 부장은 두 번 다시 나를 찾지 않았는데, 그 해 내내 내가 받았던 평가는 당연히 최하위 평가였다. 그렇지만 그 부장은 바로 다음 해에 해외 주재원으로 발령받았고 덕분에 그 부장 소속으로 계속 최하위 고과 받는 일이 반복되지는 않았다.


또 한 번은 그 부장은 해외 주재 나가고 다른 부장이 새로 온 이후였는데, 부장이 사업부 간 진행되는 회의에 보고 자신 대신 참석하라고 했다. 자신은 급한 일로 외출했다고 얘기하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사실 부장이 부재중인 경우는 차상급자인 과장이 대신 그런 회의에 들어가야 했는데 마침 과장이 해외 출장 중이라, 그 지역 담당자였던 내게 참석을 하라고 했던 것이었다.


부장님이 회의에 참석하라는데 말단 사원인 나는 당연히 그 지시대로 회의가 진행될 회의실로 들어갔다. 그런데 자리에 앉고 나서 주변을 보니 뭔가 좀 분위기가 이상했다. 부장급 한두 명을 제외하면 10여 명 정도 되는 참석자들 대다수가 임원들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임원들이 모여서 하는 회의에 새파란 신입사원이 덜렁 하나 들어가서 앉아 있으려니 회사 물정 너무도 모르던 나 같은 신입사원에게도 그러한 상황은 뭔가 좀 확실히 이상해 보였다.


그러다 결국 사달이 나고 말았다. 회의를 주관한 임원이 못마땅한 듯 나를 몇 차례 힐끗힐끗 쳐다보면서 참을 듯 말 듯하다가 마침내 참지 못하고 한마디 했는데 "이 회의장에 계신 분들을 보고서 자네가 이 자리에 같이 앉아 있는 것이 맞는 것 같은지 한번 말해봐라"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얼마 후 나는 그 회의실에서 쫓겨났다.


나중에 알고 보니 회의를 주재한 임원은 사실 우리 부서 부장보다 후배였는데 먼저 임원이 되었고 그런 후배 임원이 소집하는 회의에 참석하기가 불편했던 부장은 신입 사원인 나에게 대신 참석하라고 했던 것이었다. 결국 후배 임원과 선배 부장 사이의 미묘한 신경전에 엉뚱한 신입사원이 대신 끼어들게 되어 망신만 호되게 당했던 셈이다.


일하던 중에 과장이 갑자기 회의를 해야겠다고 과원들 모두 회의실로 들어오라고 하길래 먼저 화장실 갔다가 회의실로 바로 가겠다고 한 적이 있다. 그런데 과장은 회의 소집한다 했더니 갑자기 화장실 가겠다는 것이 무슨 소리냐며, 과장 말 무시하고 반항한다고 한참 막말하고 난리를 치는 경우도 있었다.


사실 그때 나는 하던 일을 모두 마무리하고 화장실 가려고 정말 거의 터지기 직전인데도 소변을 참고 일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회의를 한다고 하니, 회의 한번 하면 최소한 한 시간 이상은 걸리는 것이 관행이었는데 회의 진행 중 빠져나오기도 애매해 일단 급한 소변을 처리하고 가겠다고 말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말이 도대체 왜 그렇게까지 화를 내야 할 일이었는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물론 이런 해프닝들이야 당시 내 동료들도 모두 적지 않게 겪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일들을 당할 때마다 모두 사표 생각이 간절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사표 쓴 사람은 없었고 나 역시도 이런 일들을 일상처럼 겪어가면서도 사표 제출하는 일 없이 처음에 입사했던 그 한 회사를 수십 년간 꿋꿋하게 열심히 다녔다.




직장 생활하면서 경험한 바에 의하면 확실히 '스트레스'가 만병의 근원이었다. 나 스스로 생체실험을 했다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직접 험한 바에 의하면 스트레스가 거의 모든 질병의 시작이었던 것 같다. 스트레스를 받는 정도가 심해지기 시작하면 우선 소화불량, 설사, 불면, 고혈압 등과 같은 1차 증상들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그다음으로 이러한 1차 증상들이 좀 더 심각한 2차 질병들을 불러왔다.


모 대학 교수였던 동생도 내가 홍콩에서 근무하던 시절 불과 47세의 젊은 나이에 갑자기 사망했는데 사망 전 그가 반복적으로 했던 말도 교수 사회가 정치판보다 더 정치적인 것이 현실이라 너무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동생은 한순간에 뇌출혈로 쓰러졌고 인사불성이던 그 상태 그대 일주일 후 사망했다.


나 역시도 홍콩에 부임해서 스트레스로 인한 건강의 위기를 매우 심각하게 느꼈던 적이 두 번 있었다. 첫 번째는 법인에 부임한 직후 약 1년여간으로 그 당시 법인에는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너무나도 많았는데 모든 것들을 대부분 법인의 힘으로만 해결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본사에 든든한 인력과 조직을 갖춘 스탭 부서들이 그토록 많이 있었음에도 그러한 조직들로부터는 거의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했던 것이다.


법인장이 그런 일 해결하라고 있는 것이니 법인장이 알아서 해결해야 한다고까지 말하는 부서도 있었다. 결국 너무나도 힘들게 문제들을 하나씩 풀어가긴 했지만 그 과정에서 받을 수밖에 없었던 극심한 스트레스는 결코 잊을 수 없을 만큼 기억에 생생하다. 그 당시 오랜만에 나를 본 사람들은 모두 얼굴이 왜 그렇게 검게 변했냐고 할 정도였다.


한편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지만 법인의 그러한 문제들이 거의 다 해결되고 나니 이제는 또 반대로 법인에 대한 본사 스탭부서들의 관심이 부쩍 늘어나서 진단이나 지원 등등의 이름하에 법인을 방문하는 본사 스탭부서 출장자들이 부쩍 늘었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첫 번째 위기는 어쨌든 무사하게 넘어갔다. 그리고 법인의 문제들이 해결돼 가면서 법인의 매출과 이익은 급성장했고 초기에 경험했던 것과 같은 공포스러울 정도의 매우 심각한 스트레스는 겪지 않는 상태에서 2~3년 정도는 주재 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곧 두 번째 위기가 다가왔는데 법인에 부임한 지 약 4년 정도 됐을 때였다. 부임 초기에 겪어야만 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성격의 문제들이었지만 어쨌든 이번에도 역시 몇 가지 문제심한 스트레스를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정도가 첫 번째 보다 좀 더 심했다.


스트레스가 심하니 우선 밤에 잠을 충분히 잘 수가 없었다. 매일 밤 2시경에 깨곤 했는데 그렇게 잠에서 깨면 머릿속에 떠다니는 온갖 회사일들로 다시 잠을 잘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2시경부터 출근할 때까지는 침대에 그저 누워있기만 해야 했었다. 그런데 그렇게 잠을 못 자는 날들이 반복되니 이번에는 혈압이 급속히 높아졌다. 원래 혈압이 다소 높긴 했지만 잠을 제대로 못 자니 점점 더 심해졌던 것이다.


심지어 회사의 건강 검진을 받다 중간에 검진이 중단되었던 일도 있었다. 혈압을 쟀는데 너무 높게 나오니 더 이상 건강 검진 진행이 어렵다며 어느 방으로 가라고 했다. 그런 말에 따라 창문도 없는 어떤 골방에 들어가니 의사가 한 명 앉아 있었는데 방이 동그랗게 보이지 않냐는 등 이상한 질문들을 했다. 어쨌든 그런 몇 가지 질문을 거친검진을 다시 받을 수 있긴 했는데, 다만 무리한 힘을 가해야 하는 검진은 받지 않는 조건이었다.


사진) 2010년과 2011년에 측정했던 혈압. 수축기 혈압이 180이 넘었는데 이것도 혈압이 너무나도 높게 나오니 여러 차례 추가 측정해서 가장 낮게 나온 수치를 기록한 것이다.


혈압이 그렇게 높아지니 그동안은 전혀 경험해 보지 못했던 이상한 일도 연이어서 발생했는데, 아침에 일어나서 샤워를 할 때 일주일에 4~5번 정도는 피바다 위에서 샤워를 해야 했던 것이다. 샤워하다 코피가 터졌던 상황이었는데, 온통 비누와 샴푸로 범벅이 되어 있다 보니 계속 흐르는 코피를 어떻게 처리할 수가 없었다.


결국 코피를 흘려가면서 일단 샤워를 빨리 마치고, 샤워를 마친 후에야 코피를 막았다. 그러다 보니 샤워를 하는 동안 샤워실 바닥은 내가 흘린 코피로 인해 말 그대로 피바다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좀 섬뜩한 것은 아침에 그렇게 코피가 터지면 멍한 것 같았던 머리가 매우 시원해지는 느낌이었다. 아마도 몸 내부의 혈액이 코피를 통해 상당 부분 빠져나감으로써 한참 올라갔던 몸안의 혈압이 낮아지는 효과를 불러왔고 그 덕에 멍했던 머리가 좀 시원해지는 그런 경우가 아니었나 싶다.


만일 그 시절 피가 내 코를 통해서 빠져나가지 않고 내 몸안 특히 머릿속 같은 곳에서 터졌다면 나 역시 내 친동생처럼 뇌출혈로 유명을 달리하는 신세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 일주일에 4~5일은 코피가 계속 터졌던 덕분에, 비록 피바다에서 샤워하는 괴기스러운 장면까지 연출해야 하긴 했지만 어쨌든 지금까지 살 수 있었던 것 같다. 아마도 아직은 더 살아야 할 이유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코피뿐만 아니다. 역시 처음 겪어 보는 현상이었는데, 머리 정수리 부근에 피부가 헐어서 진물 같은 것이 생기고 피도 이따금 흘러나오는 고통스러운 현상을 겪기도 했다. 이것도 역시 스트레스가 원인이었다고 나름 판단한다. 스트레스로 면적 체계가 약화되면서 머리에 그러한 현상이 발생했었을 것이다.


머릿속에 그런 진물이 생기다 보니, 아픈 것을 떠나서 우선 너무나도 불편했다. 게다가 그런 부분이 점점 더 커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워낙 병원을 무서워하는 타입이라 이번에도 역시 자체적으로 해결하기로 하고 법인 근처의 상점에 가서 소형 전기 이발기를 하나 샀다. 그리고 저녁에 집에 들어와 욕실에 가서 그 이발기로 머리를 완전히 밀어 버렸다.


사실 당시 홍콩에는 머리를 그렇게 밀고 다니는 사람이 꽤 있었다. 법인의 직원들 중에도 역시 그런 사람이 있었는데 비록 그 동기는 달랐지만 결과만 놓고 본다면 나도 어쨌든 그들이 머리를 삭발했던 것과 결과적으로는 별 다른 차이가 없었던 셈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 삭발과 나는 너무도 어울리지가 않았는지 주변 사람들은 내 모습을 보고 모두가 경악을 했고 혹자는 심지어 이 세상 또는 회사에 반항하는 의미냐고 묻는 사람도 있었다.


홍콩을 출국하기 전 약 2달 정도는 그렇게 머리를 깨끗하게 밀어버린 상태로 출퇴근했다. 당시 내 모습을 찍은 사진도 남아있는데, 바로 아래 사진이다. 주말에 바닷가에서 찍은 것으로써, 사진에는 화사한 햇살을 받으며 웃는 모습이지만 실제로는 고혈압, 불면, 코피, 버짐 등으로 당시 내 온몸은 만신창이였던 그런 시절이었다.


좌측) 머릿속 진물로 삭발했던 시절 사진. (2014. 6월)

우측) 삭발할 때 사용한 소형 전기 이발기, 손바닥 보다도 작았다. 아까워서 버리지 못하고 있는데 그날 처음 사용한 이후 두 번 다시 사용한 적은 없다.



몸에 그렇게 이상 신호들이 연달아 나타나기 시작하니 이제 슬슬 겁이 나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전술한 것처럼 심한 스트레스로 고생하던 동생이 2009년 말 아직 한참 나이에 갑자기 사망했던 것이 자꾸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동생 사망에까지 생각이 미치니 직장을 다니면서 일을 하고 돈을 버는 것도 살아야 의미가 있는 것이지, 동생처럼 어느 한순간에 허망하게 세상을 떠나버리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냐는 생각이 들었고, 홀로 계신 어머님께 국제 전화를 드려 사정을 설명드리고 상의를 하기도 했다.


이미 동생의 사망으로 너무나도 놀란 적이 있었어머님은 내 말을 들으시고는 바로 그만두라고 하셨다. 자신이 낳은 자식이 자신보다 먼저 죽는 것을 봐야 했던 험악한 경험을 결코 두 번 다시 하고 싶지 않으셨을 것이다.


결국 사표를 쓰는 것으로 결심을 굳혔다. 하지만 28년여간 다녔던 회사를 그것도 현지 법인장으로 해외에 주재원으로 나와 있는 도중에 갑자기 사표를 쓰기는 정말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과 4년 전에 겪었던 친동생의 갑작스러운 죽음, 또 그간 연속해서 나타났던 신체의 변화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러한 모든 건강상 문제들의 근본적인 원인이었던 극심한 스트레스를 이러한 직장 생활을 지속하는 한 앞으로도 결코 피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결정적 판단에 마침내 사표를 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다 보니 사표 방식이 이제 더 이상 신입사원 시절 항상 상상했던 것처럼 종이에 써서 제출하는 그런 방식이 아니었다. 그저 회사의 이메일 시스템에 해당 내용을 적은 후 '발송' 버튼만 누르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사표를 제출하기 전, 주말 내내 또 고민했다. 그리고 월요일 출근해서도 아침부터 퇴근 시간이 지나도록 하루 종일 다시 한번 또 망설였다. 그러다 결국 퇴근 시간이 시간 정도나 지난 오후 5시 52분에야 인사부서로 보내는 사직서의 발송 버튼을 마침내 '꾸~욱' 누를 수 있었다.


사실 회사에서는 나처럼 나이가 좀 있는 임원들이 퇴직하면 결코 싫어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회사가 그랬던 것처럼 좀 더 젊은 사람들로 회사의 임원들이 대체되기를 바랐던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내 퇴직 경우는 상황이 좀 달라서 회사에서도 다소 곤혹스러운 실정이었다. 왜냐하면 국내에서 근무하고 있던 것도 아니었고 해외에서, 그것도 법인장으로 근무하던 중 갑자기 사표를 제출했는데, 법인장이라는 자리가 후임자를 그렇게 쉽고 빠르게 찾아낼 수 있는 자리는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아마 본사에서 근무할 때 사표를 썼으면 회사는 바로 지체 없이 수리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이유 때문에 회사 인사부서에서는 연말까지만이라도 좀 참아 달라는 부탁을 해 오기도 했고 또 회유를 하기도 했었다. 그렇지만 나는 내 뜻을 접을 수 있는 그런 건강 상태가 아니었고 결국 사표를 관철시켰다.


사표는 4월 말에 제출을 했다. 하지만 후임자로 거론되었던 사람들이 관련 부서의 최종 승인을 번번이 통과하지 못하는 바람에 후임자 부임은 계속 지연됐고 그렇게 시간이 흘러서 결국 5월 한 달이 다 지나도록 후임자가 정해지지 못했다. 그리고 6월 초순이 지나고 중순이 돼서야 마침내 후임자가 확정됐다.


사표를 제출한 이후에 거의 2달 정도는 법인에 그대로 남아 있어야 했던 것인데, 그 기간에는 내가 사표를 제출한 것이 직원들에게는 물론 거래선들에게도 이미 소문이 난 상태라 제대로 업무를 수행할 수 없었다. 거래선은 물론 직원들도 곧 회사를 떠날 예정인 사람과 무슨 협의를 하려 하겠는가?


사실 나는 내가 사표를 제출한 법인 외부 인사부서 외에는 결코 사표를 제출한 사실에 대해서 누구에게도 언급한 바가 없었다. 법인 인사부서에도 당연히 알리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사표를 제출한 사실은 법인 업계에 이미 파다하게 퍼져있었다. 어떻게 소문이 났을지....




그렇게 제대로 업무를 수행하기도 어정쩡한 상황이 되니 좀 불편하고 애매하기는 했지만 어쨌든 사표를 이미 제출하고 나니 마음만은 꽤 편했다. 그리고 주말에도 법인 사무실에 습관적으로 출근했던 병적인 행동 또한 이제 더 이상 하지 않았고, 대신 그간 제대로 다녀 보지도 못했던 홍콩 곳곳을 돌아다녔다. 유명한 Trekking Course나 홍콩 주변의 작은 섬들 그리고 심지어 무인도까지도 찾아다녔다. 홍콩에 5년 반 있으면서 다녀 본 아름다운 홍콩 명소 거의 대부분은 이 마지막 약 2개월간의 기간에 다녔다.


그 2개월 홍콩에는 정말 멋진 곳이 너무도 많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달을 수 있었다. 어쩌면 도시 가득 빽빽하게 들어선 초고층 빌딩과 시멘트 덩어리들의 모습만 기억하며 홍콩을 떠날 뻔했는데, 그 애매한 2개월 덕분에 중국 남방 아열대 도시 홍콩의 멋을 맛보고 떠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던 것 같다.


사진) 홍콩 체류 마지막 2개월간 돌아다녔던 홍콩의 명소들 왼쪽은 Sai Kung이라는 거대한 공원이고, 오른쪽은 홍콩 주변 무인도에서 찍은 사진이다.


후임자가 마침내 홍콩에 부임했고 나는 바로 한국행 'One Way' 티켓을 발권해 2014년 6월 19일 한국으로 영구히 돌아왔다.




그런데 회사를 떠나고 나니 너무도 신기했던 것이, 그동안 몸에 나타났던 온갖 이상 증상들이 사표를 제출한 지 몇 달 만에 모두 바람과 같이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스트레스가 사라지니 스트레스로 인해 야기되었던 증상들까지 함께 사라진 것이다.


정말 단 한 번도 병원에 가거나 약을 먹어본 적이 없었는데, 아침에 샤워할 때면 매주 4~5회 정도는 꼭 터졌던 코피는 퇴직한 이후에는 전혀 경험할 수 없었다. 아예 코피 자체를 퇴직 이후에는 7년여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한밤중 2시경에 깨고는 이후 아침까지 잠을 못 자던 증상도 사라졌다. 잠은 역시 그 시간쯤에 꼭 깨긴 했는데, 근심하고 걱정해야 할 것이 별로 없으니 바로 다시 잠에 들 수 있었던 것이다.


머리 정수리 부근 진물 같은 상처도 역시 단 한 번도 병원의 치료를 받지 않았지만 거짓말처럼 사라졌고 이후 지금까지 두 번 다시 재발하지 않았다.


혈압 역시 점차 떨어지기 시작해 정상 범위 내로 들어왔고 때로는 그 수치가 꽤 낮아서 혹 저혈압 아닌가 하는 걱정을 해야 하기도 했었다.


사진) 최근 측정한 혈압 사진. 홍콩 법인에 근무하던 시절 수축기 혈압 180 수준과 비교하면 차이가 너무도 크다.


지나고 나서 다시 생각해 보면 그 당시 내 온몸에 나타났던 경고들을 무시하고 연속되는 스트레스 속에서 직장 생활을 계속 이어갔다면 아마 나 역시도 내 동생처럼 갑자기 다른 운명을 맞이하게 됐을 가능성이 꽤 높았을 것 같다. 하지만 다행히 정말 쉽지 않은 결심을 할 수 있었고 그 덕에 무사히 살아서, 살아 있는 내 발로 한국으로 돌아와서 지금 이렇게 이런 글까지 쓸 수 있는 것 같다.




28년간 한 회사에서 직장 생활하면서 수없이 많은 문서를 작성했을 것이다. 그런데 결국 마지막으로 작성했던 아래의 문서, 즉 아래의 사표 하나로 그 28년 간이라는 기나긴 직장 생활에 종지부를 찍었다.


사표를 다시 보니 이렇게 사표를 작성하기까지 끊임없이 고민을 거듭했던 당시의 기억들이 떠오른다. 초등학교 6년, 중고등학교 각각 3년, 대학교 4년, 군대 3년 반도 아니고, 이 모든 것을 다 합친 것 보다도 더 긴 시간인 무려 28년을 머물렀던 미운 정 고운 정 다 들었던 그 회사를 떠나겠다고 작성하는 마지막의 문서였으니 어찌 고민 없이 쉽게 작성할 수 있었겠는가...... 푸릇푸릇한 20대 청춘에서 희끗희끗한 흰머리가 보이는 중년이 되어버린 길고 긴 시간이었다.


20대 청춘 경기도 어느 산속 연수원에서 '선착순 달리기'로 시작되었던 그 길고 긴 터널과 같았던 28년의 직장생활은 이렇게 짧은 문장의 메일 하나로 그 끝을 맺었다.


사진) 28년 직장 생활을 마감하는 마지막 문서. 내 생애 첫 번째 사표이자 아직까지는 마지막 사표다.


인생은 결국 이렇게 흘러가는 것일 것이다. 또한 언젠가는 이보다 더 길고 무거운 인생의 끝 역시 마주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오래전 신입사원 면접장에서 처음 뵈었던 회장님이 떠나셨고, 그분의 아드님으로 대를 이어서 회장님을 하셨던 분도 작년에 떠나셨으며, 내 동생 역시 10여 년 전 일찍 이 세상을 떠난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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