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편백 May 04. 2024

나에겐 수박과 복숭아가 오고 있지

입하에 선 주말 하루

 7시에 깨는 버릇 때문에 대충 그 시간쯤 깼다. 평소에는 그렇게 눈 뜨기가 힘든데, 주말엔 왜 더 자고 싶어도 맑은 정신으로 깨 버리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맑은 정신을 애써 흐리게 하고 싶은 주말이다. 7시인데도 더 잘 수 있어서 너무 좋다... 하다가 스르르 잠에 든다. 일어나서는 아점으로 뭘 먹을지 고민한다. 걸어서 20분 거리인 브리또 대신에 피자를 시켜 먹기로 했다. 감자와 새우가 반반인 피자인데, 테두리에 치즈를 추가했다. 따끈한 피자를 먹으면서 타임 워프가 주제인 애니메이션을 봤다. 아니 죽이기는 왜 죽여어... 한 명이 총에 맞았는데, 이미 한 번 본 사람은 이제 시작이란다. 

 좋아하는 작가님이 작은 책방을 여셨다고 해서 경주에 가기로 며칠 전부터 마음을 먹었다. 사실 조금은 너른 마음이었다. 너무 바빴던 한 주를 보냈던 탓에, 그냥 침대에서 하루 종일 누워 있기나 할까 고민했다. 예약해 둔 버스 표도 여차하면 취소해 버릴 생각이었다. 그래도 가끔은 피곤한 몸을 이끌고라도, 하고 싶었던 걸 하려고 한다. 피곤해, 쉬고 싶어, 하는 마음으로 쉬는날을 채우기에는 하고 싶고 보고 싶은 게 너무 많아서. 내가 나를 좀 끌고 다녀보려고 한다. 그런 굳은 결심으로 버스에 나를 실었다.

 오래 기다리기 싫어서 택시를 탔다. 예전 같았으면 아득바득 기다려서라도 버스를 탔을 것이다. 이제 그런 짓을 하지 않는다. 경제적 여유가 생겠냐 하면, 안타깝게도 전혀 아니다. 이제는 한정된 내 체력에게, 시간도 돈 못지 않은 가치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나무 이파리가 쨍하게 살랑거리는 걸 보며 이제 초여름임을 실감한다. 아직 간판이 없고 지도에 등록되지도 않은 곳이라, 도로명이 일치하는 곳에 대충 내렸다. 어째저째 감으로 찾아갔다. 제로웨이스트 가게를 지나 초등학교를 등지자, '책'이라고 붙은 은색 철문이 보였다. 여기다! 문을 옆으로 밀어 열자 이미 두 번쯤 본 적 있는 까만 강아지가 나를 보고 컹 짖었다. 내 냄새를 몇 번 맡더니 이내 조용해져서 꼬리를 살랑살랑 흔든다. 까만 이마를 쓰다듬기만 해도 긴장한 마음이 풀렸다. 잠시 동안 내가 책을 보러 왔다는 걸 잊었다.

 구석구석 손길이 안 닿은 곳이 없는, 조약돌 같은 공간이었다. 수도가 달린 작은 턱 공간에는 돌을 깔고 식물들을 올려둬서, 작은 바닷가 같았다. 거기서 화분들 물도 주고, 강아지 장난감도 씻는대. 풍경을 스윽 그리기만 해도 너무 다정하고 도란하다. 직접 골라서 판매한다는 책들도 구경했다. '뭐라도 쓸 것!' 이라는 책도 조금 마음에 들었다. 이것도 다음에 사서 읽어 볼 것이다. 

 오랜만에 뵌 작가님과 그동안의 근황을 나눴다. 대학원 수료만 하고 졸업은 안 할 거예요, 저 작가님 책 읽고 삿포로도 다녀왔어요. 작가님 책에 쓰인 커피숍 꼭 가 보고 싶었는데, 시내랑 멀어서 못 갔어요. 그래도 오도리 공원은 다녀왔어요.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정리가 안 돼서 주절주절 풀어놓았더니, 아 진짜요? 하고 큰 눈을 깜빡이며 웃으셨다. 저는 글만큼이나 작가님이 웃으시는 게 왜 이렇게 좋을까요. 행복하시면 좋겠어요. 정말로요. 버스 시간이 얼마 남아서 급하게 나와야 했다. 급해도 야무지게 권과 파란색 손가방을 샀다. '내가 오늘 책'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닳도록 여름 내내 가지고 다녀야지. 

 집에 와서는 우리집 개와 산책을 했다. 이제 제법 여름 날씨가 되었다. 반팔에 반바지를 입고 모자를 쓰고 산책에 나섰다. 5시가 되어서야 오늘의 첫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실 수 있었지만, 그게 주말이다. 좋아하는 동네 빵집에서 명란 치아바타를 사고 싶었는데, 품절이라서 하나도 손에 넣지 못했다. 내일 열두 시에서 한 시 사이에 나온다고 한다. 기억할 것. 

 저녁으로는 들기름 막국수를 해 먹었다. 여름이 오면 치르는 의식 같은 거다. 여름 하면 들기름 막국수. 산책하고 딱 기분 좋게 더운데 시원한 국수를 먹으니 맥주 생각이 났다. 동생과 사이좋게 맥주 한 캔씩을 마시고, 분리수거를 할 겸 다시 산책을 나갔다. 개는 두 번째 산책에 엄청 신이 나서 귀를 앞뒤로 쫑긋거렸다. 종종 산책할 때마다 마주치는 금순이 견주분과 엄청 긴 대화를 했다. 나는 원래 낯을 가려서 강아지들끼리 놀아도 한사코 가만히 있는 편인데, 이 분과는 대화가 편안하다. 맥주 한 캔에 얼굴이 상기된 동생을 보고, 혹시 한잔 하셨어요? 하기에 네, 날씨가 너무... 라는 내 말이 채 맺어지기도 전에, 그쵸? 맥주 참을 수가 없는 날씨예요. 산책도 그렇고요! 하셨다. 온몸으로 사랑스러움과 밝음을 뿜어내는 사람들이 있다. 잠깐 대화만 해도 마음 속의 어둠을 녹이는 햇살 같은 사람. 이럴 때마다 인류애가 살아난다.

 집에 와서는 화분에 영양제를 줬다. 분갈이한 지 얼마 안 돼서 몸살을 앓는 것 같았는데, 오늘은 꽤 싱싱해 보인다. 이제 햇빛 밑으로 옮겨 줘야겠다. 집에 오는 길에는 덩쿨 장미를 봤다. 이제 초여름이라고 조금씩 피어나나 보구나. 그래서 지금 딸기가 맛이 없나 보구나. 올해 딸기는 오늘 산 바구니를 끝으로 잠깐 보내 줘야겠다. 이제 나에겐 수박과 복숭아가 오고 있지. 제로 사이다로 화채를 해 먹어야지. 

 이 글을 쓰는 지금, 매일이 오늘 같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할 일에 치여 살았던 한 주였다. 바빴던 나날들 끝에 얻은 하루여서 이렇게 달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매일 오늘처럼 산다고 전혀 지루할 것 같지가 않은데. 모르겠다. 확실한 건 아직 하고 싶은 게 정말 많다는 것이겠지. 하기 싫은 걸로 빽빽하게 채운 하루에 지쳤을 뿐, 내 삶을 사랑한다는 것이겠지. 사랑할 게 엄청 많다는 것이지. 일단 올 여름에는 짧게라도 제주에 혼자 다녀와야겠다. 가서 파도를 보며 글을 듬뿍 쓰고 와야겠다. 


작가의 이전글 여름의 길목에서 저는 잘 지냅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