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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빅 Jan 02. 2019

밤기차 그리고  뜻밖의 라이프 셰어링

이탈리아 ㅣ  길 위의 친구에게 ‘나’를 말한다는건

차가운 밤공기는 감당할만한 것이었으나 차츰 굵어지는 빗줄기가 문제였다. 운하와 좁은 골목길이 얽혀있는 거리를 헤집고 다니던 미로 찾기 놀이를 끝낼 때가  것이다. 우리의 다음 여정은 자정 무렵 베니스를 떠나 로마로 향하는 기차에 오르는 것이었다. 유인 라커가 문을 닫기 전에 서둘러 기차역으로 돌아와 맡겨둔 짐부터 찾았다. 그런다음  다리를 쉴만한 곳을 찾아 기웃거렸다.


산타루치아 역의 대합실 여건은 바깥 날씨보다 훨씬 열악했다. 파고드는 찬 공기에 몸이 절로 웅크려졌다. 자세를 고쳐봐도 불편한 건 매한가지였다. 나의 아들은 딱딱한 의자 위에서 수차례 뒤척이다 그마저도 포기했는지 여전히 불편해 보이는 자세로 나에게 기대 왔다. 내려다보니 미간을 구긴 채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아니 한 가지 있기는 했다. 일렁이는 운하의 물결에 시선을 고정한 채 떨어지는 빗소리를 위해 귀를 열어두는 일.


밤이 깊어지자 역사 내부는 침잠에 들어갔다. 간간이 플랫폼으로 미끄러져 들어오던 기차도 끊어졌다. 수시로 전광판을 올려다보았으나 고장이라도 난 듯 미동이 없었다.

아들은 훗날 로마행 열차를 기다리던 그날 밤이 여행 중 가장 힘든 시간이었노라 내게 이야기했다. 밀려오는 한기와 졸음을 참아보라고, 참아야 한다고 말을 건네는 나 또한 묵직한 눈꺼풀과 전신에 파고드는 피로감으로 힘들기는 매한가지였다.


초등학생인 아이와 단둘이 떠난 여행길에 야간 슬리퍼가 옳은 선택인가에 대해 스스로에게 물음을 던져본 적이 있다. 무엇보다 아이의 안전과 컨디션이 우선이므로 야간에 이동하는 것에 대해 마음이 쓰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익숙한 안락함 대신 고단함이 수반되더라도 여행의 기억에 다채로운 색을 입힐 수 있는 경험을 안겨주고 싶은 마음이 좀 더 컸던 것 같다. 녀석은 평상시에도 무모한 도전을 일삼는 엄마를 둔 덕분에 다른 아이들에 비해 감내해야 하는 것들이 많긴 하다.


한참 동안 지루하기 짝이 없는 시간을 보낸 후에야 우리가 탈 열차의 정보를 전광판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기다림이 끝났다는 뜻이다. 굳어진 관절을 펴고 선잠에 든 아이를 추스려 열차에 오르기만 하면 된다. 우리가 꿈나라에서 유영을 하고 있는 사이 밤을 가르며 달린 열차는 아침 해가 떠오르는 로마로 데려다줄 것이다.


추위와 졸음으로 힘겨워하던 아이는 객차에 들어서자 비로소 웃음기를 되찾았다. 에든버러에서 런던을 향할 때 이용했던 슬리퍼와 비교한다면 내부도 좁고 베드도 그다지 편해 보이지 않았지만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한술 더떠 장난을 치는 녀석을 보니 대합실에서 추위에 떨며 졸게 만들었던 미안함이 조금은 누그러졌다.


나머지 두 개의 베드 주인은 없는 듯했다. 이탈리아에서 이용하게 될 침대차는 2인용이 아니라 4인용이라는 얘기를 들었을 때 밤새 모르는 사람과 객차를 공유해야 한다는 사실에 난색을 표하던 아들 녀석에겐 다행스런 일이라 생각하던 바로 그때였다. 객차 문이 드르륵 열렸다.


"실례해요. 제가 좀 들어가려는데 괜찮을까요?


이 멘트는 무얼까? 우리에게 양해를 구하는 듯한 뉘앙스였다. 나는 본인 객차가 아닌 곳에 들어오겠다는 의사 표시로 이해했다. 얼결에 내가 동의를 하는 제스처를 취했던 모양이다. 이방인은 성큼 걸어 들어와 남은 베드 중 하나에 털썩 앉더니 우리를 향해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아들은 예정에 없던 방문객에 당황하는 기색이었다.


그녀가 우리 객차에 출현하게 된 이유는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이전부터 옆칸에 타고 있었었는데,  직전 정차 역에서 세 명의 여학생이 들이닥쳐 남은 베드를 하나씩 차지했던 모양이다. 이후부터 그들이 얼마나 매너가 없었는지, 부주의한 행동에 더하여 얼마나 참기 힘든 소음을 만들어댔는지에 관한 상세한 설명으로 이어졌다. 듣자 하니 세명의 침입자는 급기야 양해도 없이 음식을 늘어놓고 객차 안에서 그들만의 파티라도 벌인 모양새였다. 단숨에 왈칵 쏟아내는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서도 한편으로는 과연 그녀가 숨을 제대로 쉬어가며 말을 잇고 있는 것인지도 궁금했다.


'객차 이동의 변'을 마친 그녀는 마지막에 한마디를 덧붙였다.


"이런! 반가워요, 난 키이라라고 해요"

새로운 룸메이트와 짧은 인사를 주고받은 나의 아이는 차라리 잠자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는지 담요를 목 끝까지 끌어당겨 덮었다. 그리고 작정한 듯 등을 보이고 돌아 누웠다.

생면부지의 나에게 한마디 양해의 말에 이어 열 마디의 속상했던 마음을 풀어내던 그녀의 일갈은 낯선 것이 아니라 익숙하고 정겨웠다.


간단한 통성명 끝에 우리는 동갑내기 외동아이를 키우는 동년배의 엄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객차를 공유하며 하룻밤 메이트가 된 두 엄마는 잠 잘 채비를 마친 후 복도를 사이에 두고 나란히 누웠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수다가 시작된다는 뜻이기도 했다. 긴 하루를 보낸 아이는 한참 전부터 미동이 없다. 고른 숨소리를 뱉으며 잠에 빠져 있었다.


그녀가 내게 내민 핸드폰 화면에는 귀엽고 잘생긴 사내아이가 밝게 웃고 있었다. 한때 건강 이상으로 문제가 발생했던 아이 때문에 힘든 시기를 보내기도 했다는 이야기로 말문을 튼 그녀는 어떤 이유로 터전인 이탈리아 중부를 떠나 북동부로 이사를 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화제는 계속 바뀌었지만 그녀의 말속에는 자신이 어떤 삶을 사는 추구하는 사람인지, 마음을 많이 쏟는 게 무엇인지에 대하여 담백하게 풀어내고 나아가 나와 나누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보였다. 한편 나의 이야기를 들를때는 종종 내게 물음을 던졌다. 이를테면 내가 어떤 가치를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인지, 내가 생각하는 행복이란 게 어떤 것인지에 대하여 나의 입을 통해 듣기를 바랐다.


12살짜리 사내아이의 엄마라는 공통점으로 엮인 두 사람은 동시에 누군가의 아내이자, 며느리이자, 딸이기도 했다. 누워있던 그녀가 몸을 일으켜 고쳐 앉으며 이어나갔던 이야깃거리가 있었는데 예상하듯 남편과 시댁에 관한 것이었다. 둘의 격한 공감을 가장 많이 끌어냈던 주제이기도 했다. 신기하면서도 우스운 상황이었다. 야간열차의 하룻밤 메이트와의 대담, 것도 예고없는 시작된 라이프 쉐어링이라니. 기차에 오를때 처음 본 이탈리아 아줌마와 시시콜콜한 남편의 험담을 하고 있는 나를 상상이나 했으려고.


몇 시간 전에 처음 만난 두 사람은 키이라의 표현대로 '길 위의 친구'가 되었다. 이탈리아 억양이 도드라진 그녀의 발음은 그리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나의 아쉬운 영어 실력은 크나큰 벽이었다. 분명한 사실은 이야기가 길면 길어질수록 내게 매우 불리한 상황이라는 점. 거친 소음을 뿜으며 밤을 뚫고 나아가는 기차 안에서 길 위에서 만난 친구들의 대화는 끊어졌다 이어가기를 반복하다가 밤의 고요 속으로 가라앉았다.


한참을 자고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니 차창밖이 훤하게 밝아오고 있었다. 잠에서 깨어 시간을 확인한 나는 화들짝 놀랐다. 로마 테르미니역 예상 도착 시간이 임박했던 것이다. 아이를 서둘러 깨우고 분주히 채비를 시작했다. 그때였다.


"이 기차 연착이예요. 놀랄 일도 아니죠. 로마에 도착하려면 아직 더 있어야 하니 좀 더 눈을 붙여도 되요"


키이라는 언제 일어났는지 이미 준비를 마친 듯했다. 오전 6시 35분 테르미니역에 도착 예정이었던 기차는 그 후로도 한참을 더 달렸지만 너른 들판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7시가 넘어도 기차역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고, 오전에 바티칸 투어를 예약해 놓았던 나는 조바심이 났다. 8시 전까지 약속한 미팅 장소에 도착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전에는 우리가 예약한 호텔에 들러 짐을 맡겨둘 작정이었다.


"유감이지만 오늘 바티칸은 힘들겠는데요, 8시까지 오타비아노역에 도착하는 것은 불가능해요"


조바심 내하던 나의 상황을 그녀가 한 번에 정리해 주었다. 기차 연착에 이어 로마 시내 전철 일부 구간이 파업에 돌입했다는 소식을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나도 모르게 마음의 소리가 밖으로 뿜어져 나올 뻔했다. 도착 전부터 매우 인상적인 이벤트를 선사하는 로마는 여전했다. 오랜만에 찾은 내게 로마가 안긴 첫 선물은 기차 연착과 전철 파업이었다. 덕분에 날려버린 오전 일정에 깨끗이 미련을 버렸다. 나의 남편이 언젠가 그랬다. 똑똑한 사람들은 포기가 빠르다고.


한 시간 이상 연착되는 기차 안에서 우리는 미쳐 마치지 못한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내가 지나쳐온 이탈리아의 도시들에 관한 이야기도 나눴다. 그녀는 내가 사는 서울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시끄럽고 번잡한 로마를 처음도 아니라면서 왜 다시 찾으려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로마와는 비교가 안되는 아름다운 도시들이 이탈리아에는 넘쳐난다고 했다.  


나 역시 이탈리아에서 가보고 싶은 중소 도시들이 넘쳐날 정도로 많다. 로마가 시끄럽고 복잡한 도시라는 말에는 백퍼센트 동의. 그러나 로마가 처음인 나의 아들은 땅속에 아직 발굴되지 않은 유적들이 얼마나 더 묻혀있는지 조차 알 수 없다는 미스터리한 스토리에 한창 매료되어 있던 터였다. 그것이 아이손을 붙들고 로마를 가야 할 이유였다. 시끄럽고 복잡한 도시에 발을 디딘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이는 깨닫게 될 것이다. 본인이 지니고 있던 로마에 관한 환상이 단박에 깨어지거나 혹은 품었던 신비로움이 극대화되거나.


지난밤 나눈 이야기 속에는 그녀가 왜 밤기차를 달려 로마로 향해야 했는지에 관한 이유도 포함되어 있었다. 친정쪽에 유쾌하지 않은 이슈가 생겼고, 키이라가 해결사로 지목된 듯했다. 아침에 눈을 뜨고 처음 맞닥뜨린 키아라의 모습이 다시 떠올랐다. 그녀는 긴장한 기색을 품은 얼굴로 미동도 않은 채 침대 끝에 걸터앉아 있었다.


늘 좋은 일만 있는 삶이 어디 있겠는가. 세상밖으로 나온 그 순간부터 시간은 우리를 밀어내며 매번 다른 모습의 나를 보여주라고 말한다. 부모님이 만들어주신 울타리에서 그들의 딸로 살다가 새로운 가정을 꾸리게 되었다. 엄마인 나에게 늘 조막손을 내주며 벙글벙글 웃어주던 던 꼬마 아이는 어느새 나와 눈을 맞추며 이야기를 할 만큼 훌쩍 자라 있었다. 몸도 마음도 여물어가는 아이의 모습에 새삼스러워할 틈도 없이 고개를 들어보니 나와 같은 시간속에서 마찬가지로 세월에 밀려 예전과 다른 몸에 고단한 신호를 보내는 양가 어른들이 나를 보며 서 계셨다. 이탈리아의 키이라나 서울에 사는 나. 사는 모습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각자의 터전에서 엄마이자 아내로, 딸이자 며느리로 불리던 생면부지의 두 사람이 야간열차에서 만나 뜻밖의 라이프 쉐어링이 가능했을 뿐만 아니라 지극히 자연스러웠던 것은 바로 이 이유가 아닐까 싶다. 하나의 침대칸을 셰어 하게 된 둘이 서로의 인생 또한 셰어 할 수 있었던 이유 말이다.  


테르미니역에 도착한 것은 예정시간을 한 시간 반이나 넘긴 후였다. 플랫폼에 내려서자 근심이 함께 담겼을 큼직한 서류봉투를 흔들며 작별인사를 하는 그녀를 향해 나 또한 그녀가 부여받은 로마에서의 임무에 행운을 빌어주며 작별인사를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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