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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빅 Dec 26. 2018

핼러윈데이, 소매치기 그리고  딸기맛 캔디

로마 ㅣ 핼러윈에 로마에서 소매치기를 만난다면

몇 해 전 이맘때였다. 눈을 두는 곳마다 가을이 한창이던 무렵, 나는 유럽을 여행 중이었다. 유일한 여행 파트너는 초등학생이었던 나의 아들이었다. 의심도 염려도 없이 엄마표 여행사를 순순히 따라와 준 어린 고객과 함께한 낯선 길 위에서 나는 어느때 보다 세심히 살피고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조심했던 탓일까, 여정은 순조로웠고 길 위의 하루하루는 즐거움의 연속이었다. 도시에서 또 다른 도시로 발걸음을 내딛던 중 어느덧 마지막 목적지인 로마에 이르렀다.


로마는 달랐다. 도착 예정시간을 훌쩍 넘긴 기차의 연착과 메트로 파업이 우리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달갑지 않은 웰컴 세리머니 덕분에 로마에서의 첫 일정이었던 바티칸 투어는 보기좋게 불발로 끝이 나버렸다. 이 둘의 기막힌 콜라보가 방금 로마에 도착한 우리를 위해 준비된 이벤트의 서막이었음을 알아차리는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우리가 이 도시를 떠날때까지 연신 나쁜 소식을 퍼날라주었다. 내가 가는 곳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내가 알아차리지 못하게 한 뼘쯤 떨어진 지점에서. 로마는 변한 게 없었다.



고맙지도, 감동적이지도 않은 자잘한 이벤트에 치이게 했던 이 도시에서 서너 날을 보낸 즈음이었을 것이다. 외출후 숙소에 들어서는 우리를 향해 웃으며 인사를 건네는 리셉션 직원을 보자 나도 모르게 맘 상했던 속내가 튀어나왔다.


"좀 전에 나 너무 기분이 별로였어요. 아무래도 콜로세오에서 당한 것 같아요. 누군가 내 점퍼 주머니를 뒤졌어요"

이 말을 들은 매니저는 눈이 두배로 커지며 곧바로 되물었다.

"어떻게 된 일이에요? 일단 당신과 아들은 괜찮아 보이는데, 다른 문제는 없어요?"


그저 덤덤한 어조로 말문을 열었을 뿐인데 당황한 것은 내가 아니라 동공을 확장한채 아들과 나를 살피는 리셉션 직원이었다.


"먼저 진정하시고... 좋아요, 내가 도와줄 수 있어요. 말해보세요, 잃어버린 게 있나요?"


나는 '진정은 내가 아니고 당신이 해야 할 것 같아요'라고 말해주고 싶었으나 묻는 질문에 답부터 뱉었다.


"음... 우선 우리 방 룸키!"

"룸키? 그건 아무런 문제도 아니에요"

직원은 여분의 룸 카드를 꺼내 건네주며 다시 물었다.

"또 뭐가 있죠? 그 밖에 잃어버린 건?"

"우리의 버스 종일권과 콜로세오 입장권!...입장권 그거 통합권이었단 말이에요"




포로 로마노를 그저 먼발치에서 보고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던 좀 전의 상황이 떠올랐다. 더불어 당시의 아들 녀석 얼굴도 떠올랐다. 포로 로마노 입구에 이르러서야 입장권이 없어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아이는 마치 아이스크림콘을 건네받자마자 바닥에 툭! 떨어뜨렸을때나 볼 수 있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여권은요? 혹시 여권도 잃어버렸나요?"

"아니에요. 가방 깊숙이 잘 보관했죠. 여권은 내 가방에 안전하게 있어요"
"그렇다면 신용카드랑 현금은?
"그것들도 무사해요"

비로소 질의응답 시간이 끝났나 보다. 매니저는 이번에는 천천히 입을 뗐다. 그리고 마치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 라고 말하는 듯한 눈빛으로 힘주어 내뱉었다.

 

"마담, 먼저 당신과 어린 아들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에요. 그런데 말이에요, 여권과 카드가 안전하게 가방에 있다는 것은 당신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뜻이에요. 알잖아요, 여기는 로마예요!"


'아직 모르겠어? 여긴 로마잖아!'라고 그녀는 말하고 있었다.


출국을 앞두고 오랜만에 찾은 로마에서 이번에도 예외 없이, 보기 좋게 당했다.



꽤나 오래 전의 일이긴 하지만 대학 졸업을 앞두고 떠났던 첫 유럽여행에서 나를 당혹스럽게 했던 유일한 도시 또한 로마였다. 스무 살 남짓의 나는 등 뒤에 실린 배낭 탓에 둔한 걸음을 떼며 테르미니역을 빠져나왔을 것이다. 그리고 숙소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 역 앞 광장에 잠시 머물렀을게 뻔하다. 그러던 중 주위의 웅성거림에 덩달아 하늘을 올려다 보았던 것이다. 일몰의 하늘은 온통 새까만 무언가에 의해 뒤덮여 있었는데, 그 검은 흐름의 실체가 새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다름 아닌 박쥐 떼라는 사실이 무척 신기했던 기억이 있다.


콧물을 훔쳐가며 시린 겨울 하늘을, 그리고 박쥐 떼가 하늘을 뒤덮은 난생 처음보는 광경을 넋 놓고 감상하던 그날 그 순간, 나는 광장 곳곳의 집시들에게 기꺼이 나의 주머니를 내어주는 은혜로운 존재가 되어 있었다. 현금 몇 푼과 없어도 크게 문제가 안되었던 소지품 몇 개가 당시 내가 잃은 전부였던 것은 불행 중 다행이었다.


여행길에 직접 목격하거나 누군가에게 전해 들은 수많은 소매치기 일화가 생산되는 원산지를 거론할 때 예나 지금이나 절대 빠지지 않는 도시가 로마이다. 나의 경우처럼 털고 잊어버릴만한 가벼운 에피소드들이 더 많았지만 때로는 걱정과 위로가 필요한 험한 경험담도 드물지 않게  들을 수 있었다.


맞다. 경중을 따지자면 내가 겪은 소매치기 경험담들은 개발의 새발이요, 새 발의 피였다. 호텔 직원이 친절하게 확인시켜주기 전에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내가 당한 소매치기 경험은 명함조차 내밀수 없는 한낱 에피소드에 불과하다는 것을... 하지만 오랜만의 방문에 반겨주진 못할망정 내 주머니에 다시금 손을 뻗는 소매치기의 괘씸함은 아무리 봐주려 해도 약이 바짝바짝 오를 일이다.





콜로세오 내부에서 나는 점퍼를 벗어 내내 한쪽 팔에 걸치고 다녔는데, 나의 가죽점퍼 위쪽 작은 포켓 안에는 나와 아들의 버스카드와 콜로세오 3종 통합권 티켓을 넣어두고는 버클을 잘 맞물려두었다. 유독 뻑뻑하여 열고 잠그기에 무척이나 힘들었던 버클을 열어재낀 작자들은 나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어색한 사진 찍기 연출을 일삼으며 관광객 코스프레 중이었던, 과하게 한쪽으로 치우쳐져 있던 가르마가 인상적이었던 그 녀석들이 분명했다.


다음날은 귀국 편 비행기를 타는 날! 우리는 늦은 저녁 비행기라 체크아웃 후 짐은 숙소에 맡겨두고 그간 발길이 안 닿았던 곳 위주로 관광을 이어가기로 했다. 짐을 맡기러 간 카운터에서 직원이 아이에게 인사와 함께 사탕 두 알을 건넸다.


"아! 맞다! 핼러윈이구나!”


전날 들른 한 레스토랑에서 맞닥뜨린 조악한 핼러윈 데커레이션을 보고도 미쳐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이다. 주머니가 없던 아들은 건네받은 캔디를 내게 주었고, 나는 내 손안에 들어온 캔디 두 알을  외투 호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캔디를 무심코 넣은 곳은 역시나 문제의 점퍼 왼쪽 상단의 포켓이었던 것. 불과 어제 웃지못할 봉변을 당했음에도 습관이란 게 참 우습다며 아들과 싱거운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거리로 나왔다.


”엄마, 오늘도 소매치기가 엄마 옷에 손을 넣을까요?”


“글쎄, 그런 일이 또 일어날까? 만일 그렇다면 어떤 멍청한 소매치기는 오늘 핼러윈 캔디를 맛보게 되겠네”


”trick or treat!!!!”


아들 녀석이 하하하 크게 웃으며 받아쳤다.


이날 우리는 오후 무렵까지 로마의 거리를 눈에 담으며 이곳저곳을 쏘다녔다. 골목골목에 숨은 젤라테리아를 순회하면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젤라토에 대한 품평을 하거나 더불어 지나온 도시에 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말이다. 로마의 북쪽 관문인 포폴로 광장에서 초록이 싱그러웠던 보르게세 공원으로, 스페인 계단을 거쳐 또다시 활기 넘치는 나보나 광장으로.




테르미니역을 떠나 공항으로 향하는 열차 안에서 아들은 문득 생각난듯 캔디의 행방에 대해 물어왔다.


"맞다! 주머니에 넣어둔 캔디!!"


따뜻한 날씨 덕분에 이날도 나의 점퍼는 종일 포개진 채 내 팔에 걸쳐져 있었다. 재미있다는듯 웃고 있는 아들과 눈 맞춤을 한번 한후 점퍼 위쪽에 자그맣게 붙어있는 좁고도 깊은 주머니에 손을 가져가 보았다. 뻑뻑한 버클은 잠겨져 있지 않았다. 왜일까? 손을 구겨 넣어 주머니 안쪽을 더듬어보니 레몬맛 캔디 한 개만 딸려 나왔다. 아들 녀석은 이 상황이 흥미로웠는지 키득키득 웃기 시작했다. 언제였을까, 어디에서였을까, 대체 누구였을까. 어느 것 하나 알아낼 재간이 없었다. 하지만 오늘 우리에게 다가왔던 그다지 운이 따라주지 않았던 소매치기의 캔디 취향만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딸기맛 캔디를 가져간 어이, 거기! trick or tre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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