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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빅 Feb 20. 2019

당신의 최애 젤라토는?

이탈리아 ㅣ 젤라토 먹기 딱 좋은 날씨야

나의 첫 젤라토 이야기를 끄집어 내려면 지금부터 2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때에도 국적불문하고 한손에 아이스크림콘을 들고 스페인 계단을 찾는 이들이 많았으며, 그들 중 몇몇은 오드리 햅번이 앉았었다는 13번째 계단을 차지하기 위해 눈치 싸움을 하기도 했다. 젖살이 한껏 오른 얼굴로 내 옆의 그들처럼 한 손에 아이스크림 콘을 든 채 배시시 웃고있던 바랜 사진이 집안 어디엔가 아직도 있긴 한것인지 모를 일이다.


20여 년 후 나를 꼭 닮은 아들 녀석과 쏘다니던 로마의 거리에서도 우리 손에는 아이스크림 콘이 들려있었다. 흐느적거리는 8자 걸음으로 햇볕 사워를 즐기며 거리를 누빌때 젤라토는 즐거운 에너지를 샘솟게 하는 유쾌한 동행이었다. 때론 컨디션 난조로 인해 기분 전환이 필요한 아이의 손에 들려주면 효과가 즉각적으로 나타나는 신통방통한 특효약이기도 했다. 젤라토는 예나 지금이나 여러모로 기특한 존재이다.


한편 호기로운 모험과 도전을 하라고 우리를 부추긴 것 또한 다양한 맛을 지닌 각양각색의 젤라토였다. 이탈리아에 머무는 내내 우리는 생각보다 많은 젤라테리아를 들락날락했다. 처음이 언제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마음 내키는 대로 시작된 젤라테리아 순회는 어느새부터인가 젤라토 챌린지로 변해 있었다. 동종의 젤라토에 대해 집집마다 미묘한 맛의 차이를 비교해가며 보다 더 취향에 가까운 젤라토를 찾아 기웃대다 보니 어느덧 여행의 끝자락에 와버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탈리아의 주요 도시들에는 이른바 ‘젤라토 3대 맛집’이라던가 아니면 ‘꼭 먹어봐야 할 젤라토 가게’ 따위의 수식어를 달고 있는 이름난 젤라테리아들이 포진해 있다. 우리가 이탈리아를 여행할 당시 로마에는 기존 3대 젤라토 맛집에 도전장을 내밀면서 신흥 강자 반열에 오른 두 곳을 포함하여 이른바 ‘젤라토 5대 맛집’ 구도로 재편 중이었다. 대체로 위 부류에 속하는 가게에 들러 맛이라도 볼라치면 내안의 인내심을 끄러모은 찾아가야 할 것이다. 입소문을 듣고 유명세에 끌려 혹은 잊을 수 없는 달콤함을 기억해내고 몰려든 대기행렬 틈에서 나의 차례가 오기를 기다려야 하기 때문이다. 


어떤 젤라테리아에 가면 귀에 쏙쏙 들어오는 능숙한 한국어 실력을 장착한 능란한 직원이 먼저 말을 건네오기도 한다. 그들은 보통 급한 성격의 진수를 보여줄때가 많다. 쇼케이스에 코를 박은 채 오감에 시동을 걸며 '오늘은 무슨 맛으로 먹어볼까?' 하는 행복한 고민에 기꺼이 빠지려는 이들을 기다려 줄 시간이 그들에겐 없다. 


일찍이 백여 년 전 교황청에 낙점을 받았으며, 그 후 반세기 넘는 세월 동안엔 이른바 ‘햅번 언니 효과’를 톡톡히 누리며 언제 가든 문전성시를 이루는 젤라테리아도 물론 맛집의 범주 안에 포함되어 있다. 종류가 상당한 그 젤라테리아에서는 관광객이 많이 몰리는 계절에 찾기라도 한다면 기나긴 줄 끝에서 인내하며 차례를 기다리는 수고와 더불어 백 여가지가 넘는 젤라토 가운데 두세 가지 만을 골라내야 하는 내적 갈등을 동시에 겪어야만 한다.





진하고 풍부한 맛 자체로 이미 완벽한 곳도 있었고 톡톡 튀는 데커레이션에 두눈과 마음을 빼앗겨 몇번이고 찾았던 젤라테리아도 있었다. 테스팅해 본 과일 종류 셔벗이 하나도 빠짐없이 나의 취향이기에 고르게 맛보기 위해 몇 번이고 다시 찾았던 곳도 있었다.


유명한 젤라테리아는 먹어본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엄지 손가락을 치켜세우는 이용자 추천 시그니쳐가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때로는 우리들 모두가 알고 있는 시그니쳐와 젤라테리아에서 추천하는 종류가 다른 집도 의외로 많았다. 그럴 때는 내가 먹고 싶은 맛 한 가지를 골라 한 스쿱 올리고, 그에 어울리는 맛으로 추천을 받아 또 한 스쿱을 올리면 최상의 조합이며 실패가 없다.


물론 이탈리아를 벗어난 다른 지역에서도 젤라토를 쉽게 맛볼 수 있다. 런던, 파리, 홍콩은 물론이요, 우리나라에서도 가짓수가 제한적이긴 하나 소위 3대 맛집의 젤라토를 모두 맛볼 수 있게 되었다. 한편 이탈리아 이민자들이 많은 여행지에서 맛보았던 젤라토는 대체적으로 실패가 없다.

 

로마에서의 어느 날. 예외 없이 볕이 좋아서 나보나 광장 근처를 수 시간째 어슬렁거리던 중이었다. 출출하여 간단히 요기를 할 수 있는 레스토랑을 찾아 광장을 벗어나 골목을 헤매다 막다른 길 끝에서 아주 작은 젤라테리아 한 곳을 발견하게 되었다. 협소한 매장 벽면에는 로마를 상징하는 그림들이 어지러이 들어차 있었고 한가운데에는 매장 분위기와 묘하게 잘 어울리는 수더분하고 푸근한 인상의 주인아저씨가 앉아계셨다. 문득 이 집 젤라토가 궁금해졌다. 호기심에 쇼케이스 쪽으로 다가가 보았다.


“너에게 무얼 주면 좋을까? 뭘 좋아하지?”


좀 전까지 배고프다고 아우성치던 녀석은 쇼케이스에 코를 박고 젤라토 위로 왔다 갔다 눈을 굴리고 있었으며, 아저씨는 고개를 낮춰 아이의 입에서 세어 나올 대답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때 내가 불쑥 끼어들었다.


“아저씨가 제일 좋아하시는 건 뭐예요?”

가게 규모에 비해 의외로 가짓수가 많았던지라 아저씨 찬스 써보기로 한 것이다.

“나야 내 가게에 있는 그 무엇 하나 빠짐없이 다 좋아하지. 하지만 우리 집이 처음이라면 화이트 초콜릿으로 만든 비앙코나 프로즌 요구르트로 시작해도 좋아”

두 가지를 테스팅해본 녀석은 주저 없이 요구르트에 손을 들어주었다. 젤라토 맛은 그 어떤 것 보다 직관적이다. 오케이. 요구르트 받고 녀석이 이미 침 흘리며 손가락으로 찜한 쇼꼴라떼도 얹기로 했다. 나는 화사하고 산뜻한 칼라를 입은 여느 가게의 과일 셔벗들과는 달리 색이 바랜 듯 수수한 색감의 과일 셔벗들이 궁금하여 두 가지를 골라 보았다. 풍채도 인상도 좋은 아저씨가 푸짐하게 두 스쿱을 턱 하니 올려 건네주시는데 기분까지 덩달아 좋아졌다.


요구르트는 풍부하나 무겁지는 않은 맛이었다. 깊은 우유의 풍미가 의외로 거친 텍스처에 숨어있는 허를 찌르는 반전의 맛이었달까. 아들로부터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고 있는 초콜릿도 말이 필요 없이 완벽했다. 셔벗은 과연 과일을 통째 먹고 있는 듯한 재료의 신선함이 그대로 느껴졌다. 톤 다운된 색감은 문제가 아니었다.

  






아이스크림 가게는 주인의 푸근한 인상에서 반은 먹고 들어가는 법이다. 무표정한 얼굴들이 기계적으로 주문받고 서빙하는, 차례가 되면 준비된 멘트를 읊듯 주문을 한 후 밀리듯 빠져나오기 바쁜 젤라테리아가 아니라는 점에서 이미 합격이었다. 소박한 외양이지만 젤라토에 관한 자부심만은 여느 가게 못지않았다.


물론 이탈리아의 젤라토는 어느 곳에 들르든 실패할 확률은 거의 없다. 취향에 따른 불호가 있을 뿐 종류를 불문하고 맛 자체로는 중간 이상은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구석진 곳에 허름하게 자리 잡은 숨겨진 보석 같은 이 젤라테리아는 그간 들렀던 도시에서 맛보았던 젤라토들과 후에 들르게 될 크고 작은 젤라테리아 사이의 기준점이 되었다. 여행을 하면서 나를 발견한다? 비루한 공력으로 거기까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의 젤라토 취향을 발견한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쇼케이스 안에서 고운 빛깔을 난사하며 주인을 기다리는 젤라토 앞에서 조금은 진중해져야 할 것이다. 나의 취향, 그날의 기분 그리고 거리의 분위기에 딱 들어맞는 최상의 젤라토 선택을 위해서는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한 법이다. 그것이 나의 손에 쥐어질 젤라토에 대한 예의가 아닐까.


나중에 로마를 가게 되더라도 나보나 광장 한편 막다른 그 골목길을 조심해야겠다. 자칫 눈길 한번 안 주고 지나치기 십상인, 별것 없는 그 조용한 골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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