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드의 악역들은 체제를 긍정한다.
나의 시각이 좁은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한국 드라마를 보면서 느끼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악역과 체제의 관계이다. 한국 드라마의 악역 캐릭터들은 일신의 영달을 위해 체제 안에서 더 높은 위치를 차지하거나 유지하려 하고, 그 과정에서 법과 도덕을 어기는 행위도 서슴치 않는다. 혹은 자신을 건드리지 못하는 체제의 뒤에 숨어 각종 악행을 하고 다닌다. 즉, 체제 순응적이다. 그들은 체제를 긍정한다. 그들은 자신의 비위 행위가 체제의 부조리함 등에 의해 묻혀버린 것을 발판으로 삼아 출세한다. 그러기에 자신들이 높은 자리를 차지한 것은 순전히 노력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을 방해하려는 자가 있다면 모든 수단을 써서 배제하려 한다.
다만, 그들은 체제를 수호하기 위해 싸우지 않는다. 체제 자체를 변화시킬 수 있는 강력한 힘을 가진 캐릭터가 한국 드라마 내에는 없기 때문이다. 악역과 대립하는 선역의 경우 가치관이나 신념, 도덕률을 바탕으로 체제에 문제를 제기하기도 하지만, 악을 행한 특정인의 처단에 집중하는 면도 있다. 예를 들면, 한국 드라마의 단골소재인 '여인의 복수극'의 경우에도 악녀 캐릭터를 파멸시키는 데에 집중하지 체제 자체에까지는 그 생각이 미치는 일은 없다.
물론 우리가 보는 드라마는 심오한 주제를 다루는 이야기는 아니기 때문에 단순한 한국 드라마에서 지금의 체제가 올바르고 부조리하고를 논할 이유는 없다. 다만, 체제 순응형 악역이 계속 나타나는 것이 한국 드라마 자체의 클리셰로 굳어지는 상황을 아쉬워할 뿐이다. 그리고 상상을 자극한다. 만일 한국 드라마에서 「어벤저스:인피니티 워」의 메인 빌런 타노스처럼, 체제의 불합리함을 설득력 있게 말하고 그 해결 수단으로 체제의 파괴를 외치는 캐릭터가 등장한다면 어떤 모습인가 하는 것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