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적 도피는 때로 꿈의 개념을 엇나가게 한다.
나는 징병신체검사에서 4급 판정을 받았다. 당시 4급 판정을 받은 사유는 신장체중 문제도 있었지만, 결정적인 이유는 '심리적 발달장애 및 소아청소년기 장애'라고 한다. (보통 신장체중 문제 하나만으로 4급 이하의 급수가 나올 경우 병역기피를 위해 고의적으로 체중을 조작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몇 개월 후 재검을 한다.) 흔히 말하는 정신과 4급이다. 왜 정신과 4급이 나왔냐 하면 고2 때 1년 동안 받은 정신과 통원치료 기록을 징병검사 때 제출했기 때문이다. 진단서만으로는 4급은 나오지 않는다.
내가 고2 때 1년 동안 통원치료를 받은 사유는 그때 '아스퍼거 증후군' 진단을 받았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6학년을 마친 직후 익산(내 기억이 정확하다면)에 있는 시설에서 '자폐증일 가능성이 높음'이라는 진단을 받은 이후 고등학교 2학년에 들어가기 전, 다른 곳에서 다시 진단을 받아본 결과 '아스퍼거 증후군' 진단이 나왔다.
이 '아스퍼거 증후군'이 뭐냐 하면...... 의학 서적에서 나오는 증상들에 대한 얘기는 빼고(다른 병처럼 아스퍼거 증후군도 개인차라는 것은 존재한다.) 나의 경우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학창 시절 아이들의 놀림과 괴롭힘에 대한 분노 발작, 그리고 상당히 낮은 스트레스 내성, 직장 내 적응이 곤란할 정도로 낮은 사회 적응력,
그리고 다른 사람보다 높지만, 한없이 내면으로 들어가는 상상력.
토니 애트우드의 저서인 「세상과 소통을 꿈꾸는 아스퍼거 증후군」에 따르면, 아스퍼거 증후군을 가진 사람들 중 일부는 자신의 상상력을 활용하여 내면에 자신만의 가상 세계나, 가상의 이야기들을 만든다고 한다. 저서에 수록된 사례는 다음과 같다.
'레스테튼(Resteten)'은 내가 나의 상상에 세계에 붙여준 이름인데, 조화와 평화로 가득하고 어떤 사악한 일도 일어나지 않는, 우주 멀리 떨어진 한 태양을 돌고 있는 세계이다. 어릴 적 지구에서의 일상이 언제나 힘들고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나는 올림피아 강이 급류를 이루며 흘러가는 그 별의 거대한 산악지방으로 도피했다. 이런 일은 자주 벌어졌다. 아주 어릴 적부터 나는 또래 다른 아이들과 달랐다. 이 점은 다른 아이들이 나를 조롱하고, 때리고, 괴롭히는 이유가 되었다. 나는 나 자신을 방어하지 못했는데, 고자질을 해서 다른 아이를 다치게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내 가슴속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대부분의 아이들이 학교에 가는 이유 중 하나는 친구들과 어울리는 일이었지만 나에게는 그것이 고문이었다. 그러다가 처음으로 나를 위해 항상 도와주는 친구를 만났다. 이노라는 이름을 지닌 남자아이였다. 나를 도와줌으로써, 그 아이는 전에 비해 두드러져 보였다. 이노는 솔직하고 현실적인 남자아이였는데, (내게는 불행히도) 최근 자기가 태어난 미국으로 돌아갔다.
이 사례의 주인공인 리처드의 일화는 나의 학창 시절과 상당 부분 비슷하다. 학교에서 괴롭힘 당한 반동인지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나는 내 머리를 식히기 위해 스스로 여러 가지 이야기를 상상하는 재미에 빠져들었다. 나는 항상 나의 뇌 내에서 극작가가 된 기분으로 상상을 했다. 초등학교 6학년 이후부터 현재까지 무려 16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이 아래의 이야기 몇 개는 내가 남몰래 내면에 짜고 있던 극본들 중 가장 오래, 그리고 길게 결말까지 생각해본 이야기들을 골라 추출해낸 것이다.
루드빅은 어머니, 그리고 하녀 요정과 함께 어느 섬에서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천재지변이 섬을 덮쳤다. 섬은 순식간에 회오리에 휩싸여 사라졌고, 거기에 말려든 루드빅과 그의 어머니는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운 좋게 대한민국에 떠내려온 루드빅은 같이 떠내려온 하녀 요정과 함께 자신의 어머니를 찾는 긴 여행을 시작하였다.
4명의 멤버로 구성된 인기 걸그룹 '프린세스'는 최근 낸 앨범의 실패와 내부의 불화설 등으로 인해 해체 직전에 몰려있다. 어느 날, 스케줄을 소화하기 위해 이동하던 프린세스 멤버들은 큰 교통사고에 말려들었다. 그들이 탄 차는 깊은 낭떠러지 아래로 추락하였다. 기적적으로 살아난 멤버들이었지만, 눈을 떠보니 자신들의 팬클럽은 물론, 지금까지 걸그룹으로 활동했던 흔적들이 없었다. 마치 처음부터 그룹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이내 자신들이 평행세계에 떨어졌다는 것을 안 멤버들은 그곳에서 만난 한 여가수 지망생, 그리고 그녀를 지도하던 프로듀서와 함께 연습생부터 다시 시작하게 되었다.
과거 집단 따돌림을 당한 경험이 있는 한 자선사업가가 자신처럼 집단 따돌림이나 폭력 등에 노출된 괴로운 경험을 한 학생들을 모았다. 그 수는 108명이다. 이 108 왕따들이 자신들이 다니는 학교를 이상적인 학교로 만들어나가는 이야기.
나는 오랫동안 내 꿈이 작가이고 이 위의 시나리오들을 영상화시키는 것이 꿈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위의 시나리오들의 프롤로그도 제대로 집필하지 못했다. 아니, 집필하지 않았다...... 가 정확한 표현이겠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자신만을 위한 현실도피성 지적 유희로 만든 시나리오들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보이는 것을 무의식 중에 거부하고 있었던 것이다. 진정으로 내 꿈이 위의 시나리오들을 현실에 내놓는 것이었다면, 나는 진작에 그렇게 하였을, 하기 위해 노력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시나리오를 쓰는 상상에만 빠져있었을 뿐, 실제로 남긴 결과물은 아무것도 없다. 토니 애트우드의 저서에서도 이런 식의 시나리오를 쓰는 것은 현실 생활에 적응하면서 발생하는 문제로부터 벗어나려는 욕구의 충족이라고 하고 있다.
결국 저 위의 이야기를 쓰는 것은...... 내 꿈이 아니었던 것 같다.
그렇다고 언제까지고 내면의 시나리오들을 껴안으면서 현실도피만 하고 살 수는 없다. 시간은 흘렀고, 나이는 먹었다. 만일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이 위의 시나리오들을 읽고 아주 약간의 흥미를 느낀다면 나는 현실화를 위해 노력해볼 수는 있다. 하지만, 지금은 내 앞에 있는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하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야 할 때이다. 아무리 내 생각에 재미있고 시나리오 구상이 즐겁다고는 하지만, 나의 미래를 위해 봉인해두어야 할 때가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