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린 나뭇잎들이 푸르게 변해가듯이

-영국 브리스톨

by 셜리shirley

쿠알라룸푸르에서 런던까지는 오만 무스카트를 경유해 약 17시간정도가 걸렸다. 비행 내내 머리를 울리는 아기의 울음소리 때문에 거의 한숨도 자지 못했다. 오만 무스카트에 내려 환승을 하는데 무슨 정신으로 했는지도 모르겠다. 무스카트에서 런던까지의 비행은 꼬박 잠만 자다 내렸던 걸로 기억한다.


런던 히드로 공항에 내린 건 거의 한시간 정도 지연된 저녁 7시 즈음이었다. 짐을 찾고 입국심사를 끝나고 나오자 거의 한시간이 걸렸고, 거기서 다시 코치라는 버스를 타고 브리스톨까지 이동을 해야했다.


녹초가 된 몸을 이끌고 2시간정도 버스를 타고 달려 도착한 브리스톨, 이미 상점이 문을 닫은 시간이라 어둑어둑해진 동네에서 예약한 호텔을 찾아가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겨우겨우 도착한 호텔, 엘리베이터가 없는 곳이라 짐을 들고 낑낑대며 3층까지 올라가서 짐을 풀자 완벽히 뻗어버렸다. 하지만 1인실인 자그마한 방은 꼭 내 맘에 들었다. 작게 난 창문, 침대, 옷장과 콘솔까지 어쩐지 정말 영국스러웠다.

그리고 2년 전, 영국 어학연수를 위해 처음 맨체스터 공항에 내려 숙소에 들어왔을 때가 생각이 났다. 따뜻한 물조차 나오지 않아 덜덜 떨면서 샤워했던, 멀티플러그조차 연결이 되지 않아 핸드폰 충전조차 하지 못했던 그때를 생각하면 그래도 브리스톨에서의 첫날은 꽤나 나쁘지 않았다.





다음날도 여느 때와 같이 일찍 일어나 준비하고, 브리스톨 오픈데이가 열리는 면접장으로 향했다.

브리스톨의 5월은 선선한 바람이 적당히 불었던 날씨였다. 버스를 타고 내려서 조금만 걸어가자 브리스톨 시내가 눈에 보였다. 작지만 아기자기하게 볼거리들이 많은 시내를 조금더 제대로 돌아다니고 싶었지만, 내가 이곳에 온 이유는 면접이었기에. 또다시 유럽에서 보게 된, 그것도 영국에서는 첫 오픈데이였다.

사실 그동안 영국 오픈데이를 참여하지 않았던 건, 영어가 모국어인 곳에서 영국인 지원자들과 경쟁했을 때 그다지 승산이 없을거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날에 다른 도시에서도 열리는 면접은 분명히 있었지만 이상하게 나는 브리스톨에 강하게 끌렸다. 면접을 보는 지원자들 사이에서 어디 도시의 면접을 가야할지 고민될 땐 자신이 끌리는 곳으로 무조건 가는 게 답이라고들 했다. 그래서 그런지 느낌이 좋았다.



면접장에는 생각보다 다른 국적의 지원자들이 많이 몰려있었다. 대기하면서 만난 지원자는 동유럽출신이었는데 영국에서 대학교를 다닌다고 했다. 대학생이면 이제 겨우 스물둘,셋 정도 밖에 되지 않았을텐데, 뭔가 그 나이가 새삼 부럽게 느껴졌다. 지원자격에서 나이제한이 없다고 하는 외국항공사 승무원이기는 하나 암묵적으로 서른이 커트라인. 서른이후의 합격자를 찾기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서른을 앞둔 나에게는 그래서 더더욱 마지막으로 느껴지고 간절했던 걸지도 모르겠다.




지원자도 생각보다 많지 않았고, CV드롭도 간결했다. 이번 면접관은 질문조차 하지 않았다.

그리고 결국 나는 합격하지 못했다. 나뿐만 아니라 이곳에 온 한국인 지원자는 모조리 탈락이었다. 말레이시아 이포에서의 악몽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유럽 면접 첫 도시에서 또다시 한국인 전탈을 경험하자 정말 국적만으로도 탈락사유가 될 수 있다는 것이 가능하다는걸 더욱 절실히 깨달았다. 허탈감. 이라는 말로는 다 표현하지 못할 만큼의 감정들이 몰려왔다.

하지만 나는 이미 유럽까지 온 상황에 첫 면접에서 탈락했다고 손을 놓을 수가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음 면접까지 조각조각난 내 멘탈을 잘 부여잡고, 다음 면접도시로 향하는 것이었다.


다시 숙소로 돌아가기 위해 면접장 호텔로비로 내려왔다가, 로비에 앉아있는 한국인 지원자들과 얘기를 나누게 되었다. 다들 국적탈락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우리끼리 아무리 얘기를 나눠봐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다는 걸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서로의 마음을 위로하고 응원하며 각자의 길을 가야 할 수 밖에 없는, 이곳이 면접의 현실이었다. 그중 숙소방향이 비슷한 지원자들과 함께 점심을 먹으러 가기로 했다. 호텔 문을 나서자 너무나 따사로운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다. 너무나 멋지고도 우울한 오후였다.




우리는 브리스톨 항구쪽에 경치가 좋은 레스토랑에 자리를 잡았다. 아침부터 면접 준비하느라 아무것도 못먹었던 터라 너무나 배가 고팠다. 수제버거는 입에서 살살 녹았고, 맥주는 시원하기 그지없었다. 함께 온 일행은 런던에서 워홀중인 언니, 브라이튼에서 워홀하고 있는 동갑내기 친구, 그리고 나처럼 면접투어를 돌고 있는 동생이었다. 함께 얘기하다 보니 어느새 우리는 오늘 만난 것이 무색하게 친해졌고, 내일 브리스톨에서 워킹투어를 함께 참여하기로 했다.

비록 면접에서 떨어졌지만, 숙소로 돌아오는 길이 그리 슬프지 않았다. 이렇듯 머나먼 유럽땅에서 마음맞는 한국인들을 만나는 건 너무나도 든든한 일이었다.




다음날, 브리스톨 현지 대학생이 진행하는 워킹투어는 오전부터 진행되었다. 면접이 아닌 여행은 사치라 생각했던 나였지만, 나에겐 면접이 아닌 남은 시간들을 잘 보내는 것 또한 면접을 위한 준비라고 생각이 바뀌었다. 물론 나는 가난한 여행자였으므로 최대한 돈이 들지 않는 여행을 해야했다. 워킹투어는 팁투어 형식이라 따로 돈을 받지 않는 투어라 부담이 덜했다. 브리스톨 성당과 대학, 그리고 유명한 화가의 작품들, 역사가 깊은 건축물들을 설명을 들으며 열심히 돌아다녔다. 작은 카페에서 마신 커피는 여유로웠고, 오랫만에 활짝 웃으며 사진을 찍으며 마음껏 이 도시를 담았다.


특히 여린잎이 올라오고 있는 가로수길은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장소였다. 연두빛의 여린잎들은 언젠가 무성한 초록빛으로 변하겠지. 계절이 변하며 성장하고 커가는 나뭇잎들처럼, 나도 그렇게 느리지만 조금씩 자라고 있는 중이기를, 나의 계절이 오면 아주 선명하고 예쁜 초록빛을 내기를.


오후즈음 투어가 끝나고, 시간이 남은 일행 셋이서 함께 해질 무렵, 바다가 보이는 벤치에 걸터앉아 맥주를 마셨던 브리스톨의 봄날은 내게 잊지 못할 순간이었다. 브리스톨이라는 낯선 도시에서 만난 우리는 각자 다른 삶을 살고 있었지만 같은 꿈을 가지고 있었다. 앞으로 각자 또 다른길을 가야하겠지만, 이 브리스톨에서의 따뜻했던 오후를 마음속에 간직하겠지.


내겐 더없이 특별한 도시였던 브리스톨, 나는 이곳이 참 많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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