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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셜리shirley Jan 23. 2022

1. 여초직장에서 막내로 생존하기

- 첫 직장 인천공항 안내데스크 회고록

  2011년 11월, 생애 처음으로 상경한 그해 나는 겨우 스물 네살이었다. 항공사 지상직 취업을 준비하던 어느 날, 인천공항에 덜컥 취직이 되어 부산에서 갓 올라온 촌스러움도 다 벗지 못한 채 나는 떠밀리듯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첫 사회생활은 내게 추운 서울의 날씨만큼 혹독했다. 안내데스크라는 포지션이 데스크에 앉아 고상하게 안내만 할 거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천만의 말씀. 공항의 모든 시설들과 출입국 전반에 관한 정보를 숙지해야하고 출국장 너머의 면세구역안내, 출도착 비행기 안내 및 각종 컴플레인 핸들링, 방송신청, 유실물처리까지 그야말로 멀티플레이어가 따로 없다. 게다가 하루에도 몇십만명이 왔다갔다 하는 인천공항이었다. 한국인 진상부터 전 세계 진상은 다 모아놓은 그 공항에서 살아남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24시간 운영되는 공항이라 3교대 근무를 해야 했는데 오전조 근무는 새벽 5시반에는 출근을 해야 했고, 심야근무는 밤 9시에 출근해 아침 6시는 되어야 퇴근 할 수 있었다. 첫 사회생활도 적응하느라 정신없어 죽겠는데 난생처음 교대 근무로 인해 낮밤이 바뀌자 쏟아지는 잠과 싸우는 것 역시 고역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힘들었던 건 여초직장에서 막내의 포지션이었다. 팀원 전원이 여자였던 안내데스크에서도 하필 우리 팀의 분위기는 굉장히 수직적이고 군기가 센 걸로 유명했다. 첫 OJT에서 그 당시 호랑이 같던 주임은 내가 뭐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내 데스크에서 나가라며 소리를 질렀을 정도였다. 동료들은 신입이라면 한번은 거치는 푸닥거리라고 생각하라고 할 정도로 전통이 된 이 군기는 실로 무시무시했다. 더군다나 그 당시 팀원들 중 나는 가장 나이가 어렸고, 내 밑으로 들어온 후배들은 나보다 나이가 많은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모두들 나를 막내로 생각하는 분위기였다. 시간이 지나도 이 막내생활의 끝은 도무지 보이지가 않았다. 뭐만 하면 막내가 해야지를 강요하는 이 분위기가 내겐 굉장한 스트레스였다.

 2년차에 접어들었을 즈음, 불규칙한 교대근무와 반복되는 스트레스로 인한 위경련으로 너무나 괴로워 약을 먹고 잠들었다가 알람을 듣지 못해 새벽교대를 늦게 갔더니 나를 호되게 혼냈던 선배의 그 매섭던 눈빛과 말투가 아직도 생생하다.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서러움에 눈물에 차올랐지만 울지 않으려 얼마나 애썼는지 모른다.    

 또한 나는 부산출신이라고 특별히 말하지 않는 이상 부산사람인걸 잘 모르는 경우가 많은데 내가 부산사투리를 완벽에 가깝게 고치게 된 것도 내 딴에는 표준어라며 쓰는 말투를 듣더니 그게 무슨 표준어냐고 핀잔을 주는 선배의 말 한마디 때문이었다. 안내데스크 특성상 표준어를 쓰는 게 프로페셔널해 보인다는 말에 동의했기에 고친것도 있었지만 지방에서 올라왔다는 이유로 무시당하고 싶지 않았던 자존심이 더 컸다. 그만큼 나는 서울에서의 생활을 어떻게든 버텨내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결코 적지 않은 연봉과 인천공항이라는 타이틀이 주는 허울 좋은 평판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는 2년을 버티고 버티다 결국 스물여섯살 겨울, 결국 퇴사를 결정한다.

물론 정말 나를 챙겨주는 따뜻한 선배와 동기들도 있었고, 그 좋은 직장 왜 때려치냐며 말리는 목소리들이 많았다. 하지만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이미 방전된 상태의 나는 이미 버틸 만큼 버텼다고 생각했고, 이곳에서 더 이상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며 소모되고 싶지 않았다. 사직서를 내고 고향인 부산으로 돌아왔고, 나는 다시 서울로 올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10년 후, 나는 생애 두번째 상경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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