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그림만 그리는 기획자는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저는 10년 이상 다양한 조직에서 '기획자'라는 타이틀로 업무를 진행해왔습니다. 현재도 Product 팀을 리드하고 있고, 기획 분야의 책도 쓰고, 가끔씩 강의도 하고 있지만 IT 현장에서 기획자가 꼭 필요할까? 에 대한 의구심이 종종 들었습니다.
Why?
디자이너가 설계 단계부터 참여해서 디자인 결과물까지 만들어낸다.
개발자가 설계 문서 없이도 뚝딱뚝딱 필요한 기능을 잘 만들어낸다.
기획자인 나보다 다른 사람들의 인사이트, 제품 방향성이 더 뛰어나다.
논쟁을 해서 대표님, 개발자, 디자이너를 납득시키기가 쉽지 않다. 나 스스로도 그들의 의견이 옳다고 생각될 때가 많다.
기획자는 전문 직군이라고 생각했는데 나의 업무 영역이 다른 직무와 겹치고, 오히려 그들이 나보다 더 나은 인사이트와 결과물을 만들어 낼 때면 스스로 한없이 작아집니다. 내가 기획자로서의 자질이 충분한가? 적성에 맞는가에 대해서도 깊게 고민하게 되죠.
그래서 개발을 배워볼까? 디자인을 배워볼까? 고민했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최근에 정리된 생각은 IT 현장에서 기획자는 반드시 필요하고 앞으로 전문 기획자의 수요는 더욱 많아질 거라 전망합니다. 축구에는 공격수만 있어서도 안되고, 수비수만 있어서도 안됩니다. 중간을 튼튼하게 받쳐주는 미드필더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전문 기획자는 미드필더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 기획자의 Role은 조직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 제품 런칭에 포커스 된 Project Manager의 Role과
- 제품 제작에 포커스 된 Product Manager의 Role을 가지고 있습니다.
축구에도 팀 구성에 따라 포메이션을 달리하듯 기획자도 팀 구조에 따라 적합한 포메이션에 위치해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었을 때 우리는 대체 불가능한 기획자가 될 수 있습니다!
초기 스타트업 및 사내 벤처에서 선호하는 조직 형태로 제품을 빠르게 출시해서 고객의 반응을 보고 시장 요구사항에 맞춰서 제품을 업그레이드해나가는 형태의 팀입니다. 이 팀은 영업자, 운영자, 개발자, 디자이너, 기획자 등 모든 구성원이 제품 중심적 사고를 하는 팀으로 다 같이 고민하고 빠르게 실행하는 조직입니다.
목적
시장이 원하는 제품을 빠르게 출시하고 가능성을 확인한다.
멤버구성
비즈니스 마인드를 탑재한 멤버들로 팀을 구성해야 하며, 제품의 완벽성보다는 시장환경에 따라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빠른 속도가 중요한 팀입니다. 이래서 안돼요, 저래서 안돼요. 기획서가 없어서 못해요를 외치는 멤버가 있다면 과감히 OUT 시키세요!
기획자의 역할
이 팀에서 기획자는 전략가가 되어야 합니다. 설계문서는 굳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입으로 기획해도 되고, 휴지에 대충 쓱쓱 그려도 됩니다. 디자이너와 개발자가 제품 중심적 사고를 가지고 있다면 그들이 알아서 뚝딱뚝딱 만들어냅니다. 이 기능을 왜 만들어야 하고, 어느 정도 중요한지, 핵심 기능이 무엇인지 정도만 납득시켜 주면 됩니다.
시장의 기회를 발견하고, 비즈니스 모델을 구축하고, 고객의 이야기를 끊임없이 들으면서 멤버들을 올바른 방향으로 리드할 수 있는 인사이터가 되어야 합니다.
핵심역량
해당 산업에 대한 도메인 지식, 트렌드 분석, 경쟁사 분석, 고객 분석, 데이터 분석
금융권 백오피스 전면 개편 프로젝트, 신규 OTT 플랫폼 구축 프로젝트, 인공지능 챗봇 구축 프로젝트 등 프로젝트 사이즈가 크고 고도의 기술을 요구하는 형태의 조직입니다.
목적
향후 2~3년 뒤에도 안정적으로 돌아갈 수 있는 탄탄한 제품을 만든다.
멤버구성
프로젝트 규모가 큰 경우 중간에 방향을 바꾸기가 굉장히 어렵습니다. 때문에 제품을 빠르게 만드는 것보다는 여러 사람이 협업할 수 있고 2~3년은 운영될 수 있도록 안정적인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프로젝트 성공을 위해서는 프로젝트 전체 사이즈를 예측하고 적재적소에 인력을 활용하는 Project Manager의 역할이 가장 중요합니다. 주로 경험 많은 개발자 또는 기획자가 PM 역할을 수행합니다. 이 팀에서의 개발자는 예측 가능한 모든 케이스를 고려해서 개발하는 완벽주의자형 개발자가 적합합니다.
기획자의 역할
이 팀에서의 기획자는 전문 설계자가 되어야 합니다. DB 구조를 이해하고, API를 이해하고, 데이터의 흐름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하며, 정책 수립과 플로우차트 구현에 능수능란해야 합니다. 더불어 해당 산업에 대한 도메인 지식과 UX적 사고를 함께 겸비하고 있으면 금상첨화!
핵심역량
시스템적 사고, UX적 사고
제품이 런칭되고 실사용 고객이 어느 정도 확보된 단계로 신규고객 유치 및 기존고객 유지를 위해 지속적인 제품 고도화가 필요한 조직입니다.
목적
신규 고객유치 및 기존 고객을 락-인하기 위한 제품을 만든다.
멤버구성
명확한 비즈니스 모델이 갖추어져 있다면 마케팅, 영업, 운영, 개발, 디자인 등 직무를 세분화하는 것도 좋습니다. 일반적인 IT 기업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형태로 '마케팅, 영업'은 신규고객 유치에 '운영'은 고객 불편사항을 해결하는데 집중합니다. 개발팀은 중앙에서 결정된 우선순위에 따라 제품 고도화 및 버그 개선 업무를 수행합니다.
기획자의 역할
이 팀에서 기획자는 중간자가 되어야 합니다. '신규고객 유치'와 '기존고객 만족' 모두 중요하기 때문에 여기저기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는 이슈를 잘 정리하고, 작업공수 파악 및 우선순위를 결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선순위는 높은데 작업공수가 큰 Task와 우선순위는 낮지만 빨리 해결할 수 있는 Task를 구분하고, 설계가 필요한 Task와 그렇지 않은 Task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하며, Product Manager로서의 업무도 강약 조절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핵심역량
전략적 사고, 고객중심 사고, 시스템적 사고, UX적 사고, 데이터 분석
3~4인 팀을 꾸려 외주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케이스입니다. 팀 멤버들이 본업 외에 사이드잡으로 참여하는 경우라고 보면 맞을 것 같습니다.
목적
의뢰자의 요구사항에 맞는 제품을 일정 내에 출시한다.
멤버구성
외주 프로젝트의 멤버는 서로 포지션이 겹치지 않으면서 신뢰할 수 있는 멤버로 구성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멤버 중 누군가가 나만 희생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든다면 이 팀은 지속되기 어렵습니다.
기획자의 역할
이 팀에서 기획자는 Project Manager와 Product Manager의 역할을 모두 담당해야 합니다.
Project Manager로서는 프로젝트 범위, 일정, 비용 등을 명확히 정리해서 지속적으로 확인 도장을 받아야 하며 계속되는 요구사항을 적절한 범위에서 커트하거나 2차 개발로 유도하는 노련함이 필요합니다.
Product Manager로서는 서비스의 타깃 고객과 의뢰자의 요구사항을 모두 고려해서 설계해야 합니다. 내 제품을 만드는 경우에는 무조건 ‘타깃 고객’을 중심으로 의사결정을 해야 하지만 외주 프로젝트의 경우는 예외입니다. 아무리 의뢰자의 요구사항이 납득이 안되더라도 프로젝트 책임자는 의뢰자이고 비용을 지불하는 것도 의뢰자입니다. 따라서 우려되는 부분은 확실하게 이야기해줄 필요는 있지만 의뢰자의 의견이 틀렸다고 굳이 감정을 세울 필요는 없습니다. 적정 선에서 수용하고 번복하지 않도록 문서화를 해두는 것이 중요합니다.
정리하면,
대체 불가능한 기획자가 되기 위해서는 조직형태에 맞는 기획자의 역량을 갖추거나, 나의 강점을 내세울 수 있는 조직을 찾아 떠나는 것이 정답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는 그림만 그리는 기획자는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조직형태에 따라 유연하게 포지션을 변경할 수 있는 기획자가 되었을 때 여러분은 대체 불가능한 기획자가 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