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교문학을 전공하려면 외국어를 3개는 해야한다. 나의 경우에는 영어, 일본어, 독일어. 세 언어 모두 능통한 정도가 다르지만, 어쩄든 나의 주 연구 언어는 독일어다. 어쩌다보니까 그렇게 됐다.
독일어를 공부하기 시작한 것은 학부생 때. 고등학교 때부터 배우고 싶었지만 시간도 기회도 없었다. 미국 대학 수업 시간에, 할머니 할아버지가 독일인이라는 아이들 사이에 끼어서 그렇게 독일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뭔가 쉽지 않았다. 다른 아이들은 척척 배우는 데 나만 뒤떨어지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한국에 와서도 독일어 학원을 조금 다녔다. 그 때는 나랑 좀 더 비슷한 사람들을 만났다. 유학하고 싶은 사람들이 모여서 유학한 사람들에게 독일어를 배웠다. 영어로도 많이 대화했다. 어쨌든 영어로 독일어를 배우기 시작했어서 독일어에 대한 질문도 영어로 하는 게 더 편했다. 한국에 있는 학원에서 정말 많이 배운 것 같다. 오래 공부하지는 않았어도 익숙한 방법으로 배워서 그런지, 그 때 B1 시험 대비를 하면서 말문이 탁 트인 것 같다.
오늘은 박사 과정 시험 대비를 하면서 괴테의 <파우스트>를 읽는다. 아는 말만큼 모르는 말이 많은 것이 너무 아쉽다. 옛날에 영어로 읽었던 기억을 더듬더듬 되짚어가면서 읽는다. 오스트리아 출신 친구가 추천한 오디오북도 들어가면서 공부한다. 글로만 읽을 때, 내가 소리내에 읽을 때보다는 한결 웅장하다.
그렇게 모르는 단어도 찾고, 질문과 관찰도 적어가면서 <파우스트>를 읽는다. 공부만 알지 사람을 모르는 파우스트의 모습을 보면서 웃는다. 웃다보니까 슬퍼진다. 나와 독일어도 꼭 그런 관계 같다. 파우스트는 자신이 법이며 의학이며 섭렵할 수 있는 모든 지식을 다 배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슬픔에 가득차있다고 한탄한다. 그에게 그 지식은 그냥 서재 위의, 강단에 놓인 종이 쪼가리에 불과하다. 그게 그 슬픔의 근원 아닐까.
나는 물론 파우스트처럼 섭렵할 수 있는 독일어를 모두 안다고 말하기에는 한참 먼 애송이다. 그러나 내가 알고 있는 독일어는 공부할 때만 쓰이는 꼭 죽은 말 같다. 나 혼자서만 시간에 쫓겨 공부하면서 중얼중얼거리는 그런 말. 빵을 살 수도, 사랑한다고 고백할 수도, 슬픔을 토로할 때도 쓸 수 없는 그런 말. 노트 한 구석에 가만히 영어로 번역되어서 앉아 있을 수 밖에 없는 말.
그게 언어를 쓰지 않는 곳에서 혼자 외국어를 공부하는 것의 최대 단점이자 슬픔인 것 같다. 내 말은 영원히 반쪼가리밖에 안되는 죽은 말이다. '나'는 지금보다 조금 더 외국어를 잘 할 수 있겠지만 그게 살아있는 '우리'의 말이 되지는 않을 것 같으니까. 그 말을 살리기 위해서는 또 집을 버리고 어딘가로 떠나야한다. 하지만 나는 이제 떠나고 싶지 않다. 여기에서 이 독일어가, 이 외국어가, 어떻게 살아날 수는 없을까? 오늘도 고민한다.
독일어는 나에게 있어 너무 먼 곳에만 있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