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창영 Mar 16. 2018

*진짜를 알면 가짜가 보인다.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다


詩-밥, 밥    

가족을 생각하며 차리는 밥상과

손님을 생각하며 차리는 밥상은     

다르다.    


식당밥상에는 조미료가 들어가지만

집 밥상에는 사랑이 들어간다.    

같은 상추지만 다르고

같은 생선이지만 다르다.    


식당 밥은 육체에 에너지를 주지만

집 밥은 육체와 정신에 에너지를 준다.  

식당 밥은 주인의 돈이 계산 되지만

집 밥은 음식의 영양가가 계산된다.    


매일 차려주는 집 밥상이라 

당연하다고 생각하지만

그 당연함이 당연해지기 위해서    

햇살이 퍼지고

비가 내려

보이지 않는 사랑이 키워져야 한다.    


언제부턴가 식당 밥보다 집 밥이

더 간절해지고,

당연한 것이 감사하다는 걸 느끼게 되었다.    


언제부턴가 식당 음식이 입에 맞질 않았다. 술을 끊고 나니 혀가 제 기능을 발휘하는지 조미료 맛이 싫어졌다. 김치 한 가지라도 아내가 해주는 음식이 맛이 있었다. 그 전에는 밖에서 생활하는 시간이 많았고, 술을 좋아했기에 조미료가 들어간 자극적인 맛을 좋아했다. 그런데 이제는 아니다. 아내는 무엇을 하더라도 지나칠 정도로 음식에 정성을 쏟는다. 그래서 요즈음은 아내가 해주는 음식이면 무엇이나 맛있게 먹는다. 밖에서 다른 사람과 식사 약속이 없으면 혼자 밥을 사먹지 않고 가능하면 집에 와서 밥을 먹으려 한다. 


“내가 안 해서 그렇지 하면 맛있죠?”

아내는 내가 맛있게 음식을 먹는 모습을 보고 꼭 이렇게 생색을 낸다.

“맞아, 당신이 해주니 너무 맛있어.”


나도 맞장구를 쳐준다.    

조미료는 혀를 자극하여 먹을 때는 맛있지만 깊은 맛이 나질 않는다. 또한, 음식에는 고유의 맛이 있는데, 그 고유의 맛을 느끼지 못하게 한다. 하지만 조미료를 사용하지 않는 아내의 음식은 혀가 느끼는 맛은 덜할지 모르지만 음식 고유의 맛을 느끼게 해준다. 식당 밥은 육체적인 에너지를 주지만, 아내의 밥은 식당 밥이 절대 줄 수 없는 정신적인 힘을 준다.


세상을 살아감도 마찬가지이다. 식당 밥을 즐겨 먹을 때는 혀가 즐거우면 다 좋은 줄 알았다. 다른 사람들이 달콤한 이야기를 하면 그것이 진짜 좋은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조미료 맛이었다. 달콤하게 들리는 이야기는 결코 내 삶에 도움이 되는 말들이 아니었다. 심한 경우 나를 절벽으로 내몬 말들도 있었다.


아내의 밥을 좋아하고부터 혀가 즐겁지 않더라도(그런 경우는 적지만) 그것이 진정 나만을 위한 밥인 줄 알았다. 그것이 진짜 맛이었다. 진짜 맛이 어떻다는 걸 알았기에 식당의 조미료가 들어간 맛이 싫어진 것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깨달은 것은 삶에도 분별력이 생겼다는 것.    


“진짜를 알면 가짜가 보인다는 것.”    


며칠 전 아내가 살아있는 것이 기적이라고 말했다. 그렇다. 하루하루가 기적이 아닌 날이 없다. 뉴스를 보면 매일 사고가 일어난다. 우리 가족 중에 누군가가 사고가 나지 말라는 법이 없으니 매일 매일 가족들이 건강하게 살아있는 것이 기적임에 분명하다. 단지 기적인 줄 인식하지 못하고 살아갈 뿐이다. 사고 없이 살아가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지만, 아내의 말을 들으니 정말 살아있는 것이 기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내는 요즈음 매일 밥상을 차려준다. 예전에는 아내가 밥상을 차려주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했지만, 결코 당연한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아내가 나에게 매일 밥상을 차려주는 것도 기적이며, 그것은 무한히 감사해야할 일이라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