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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반성문

“아빠가 한 5년 전에만 술을 끊었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by 윤창영

*아빠 반성문


글을 쓰다 보니 내 아이들에 대해서 못 했던 부분이 한두 가지가 아님을 생각하게 되었다. 정말 눈물이 나도록 안타깝고 미안하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둘째 아이가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 아내가 외사촌 형수의 권유로 일을 시작한 것이다.


술만 마시는 나로 인해 정신적인 갈등을 겪어 밖으로 나가고 싶은 심리와, 조금이라도 벌어 살림에 보탬이 되고자 한 심리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이란 생각이 든다. 그런 아이를 두고 나갈 수밖에 없었던 아내의 마음도 오죽했으랴. 돌이킬 수 없는 과거를 생각하니 아쉽고 가슴이 아프고 후회스럽다.


아내는 그 당시 근처에 살았던 할아버지에게 둘째를 맡겼는데, 둘째는 할아버지만 오면 엄마가 나가는 것을 알고 아파트 문 앞에서 할아버지를 밀어내었다. 그때 아버지가 한 말이 생각난다.

“난 너그 집에 안 갈란다. 성호가 나만 보면 못 들어오게 밀어낸다.”


중풍에 걸려 반쪽이 불편하신 몸으로 둘째를 돌보느라 얼마나 힘이 드셨을까. 또한 태어나서 처음으로 엄마와 떨어지는 아이는 얼마나 불안했을까? 그 모든 것이 가정을 돌보지 않은 내 탓이다. 왜 그때는 아버지와 가족들이 힘든 것을 살피지 못했을까?


둘째에게는 또 다른 힘든 일이 있었다. 선교원에 보내었는데 그곳에서 화상을 입은 것이다. 선교원 선생님의 잘못으로 미역국을 쏟아 팔과 손에 화상을 입었다. 그런 일들이 둘째에게는 많은 상처가 되었으리라. 그때 좀 더 관심을 가졌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안타깝다.


또한, 첫째가 6학년 때, 둘째가 3학년 때 아이들을 전학시켰다. 당시 무거동에서 학원을 열었는데, 아내와 나 둘 다 밖에 나와 있으니 아이들을 돌보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학원 바로 앞 주택에 세를 얻어 이사를 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을 가볍게 생각했다. 그것은 아이들 생각은 하지 않고 어른들의 입장만을 생각한 것이다. 이사를 하게 되면 그 동안 친하게 지낸 친구들과 헤어져 혼란을 주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다. 이런 사실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아빠, 전학하고 왕따를 당했어요.”


둘째의 말이다. 어릴 때부터 둘째는 코를 많이 흘렸고 그것이 아이들에게 놀림의 대상이 된 것이다. 복산동에서 살 때는 학생 수가 적었고, 아주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낸 동네 친구들이라 이질감을 느끼지 않았는데, 갑자기 바뀐 환경에 둘째는 잘 적응하지 못하였고 왕따를 당한 것이다. 큰아들은 둘째보다는 비교적 적응을 잘 했지만, 중학교에 진학하면서부터 사춘기와 겹쳐 방황하기 시작했다.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며 집에도 늦게 들어왔고 공부도 등한시 하였다.


그러한 와중에 둘째는 전학한 초등학교가 분리되는 바람에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또 다시 전학을 가야했다. 두 번의 전학을 겪으면서 아이는 극도로 정서적 불안을 느꼈을 것인데도, 아빠인 나는 아이들의 정서적인 혼란에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다. 전학을 하게 되면 아이들이 심리적인 불안을 느끼게 된다는 상식적인 것조차 깊이 있게 생각하지 못했다.


당시 난 나대로 13년간 다니던 회사를 그만 두고 새롭게 시작한 사업이 잘 되지 않았고, 그 때문에 중소기업을 들락날락하던 시기라 무척 힘이 든 상황이었다. 하지만 가장 기본이 아빠로서 자녀를 보살피는 것이었는데, 그 기본을 다하지 못하였다. 단지 학교 통학거리만이 관심의 대상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학원이 세 들어 있던 건물이 재개발된다는 소문이 돌아 학원을 비워달라고 주인이 요구를 하였고, 옥동으로 한번 더 이사를 하게 되었다. 이사를 했어야 했기 때문에 아이들은 또 전학을 하게 되었다. 친구들과 친해질 만하면 전학을 시키고, 또 전학을 시켰다. 어른들의 사는 문제 때문에 아이들의 정서 상태를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무엇이 더 중요한 줄을 제대로 몰랐다. 아이들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전학을 시킨 정말 미련한 고집스런 아빠였다. 그 당시 나또한,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아 매일 술을 마셨다. 한 마디로 가장으로서, 아빠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못한 것이다. 이 글을 빌어 아이들에게 정말 미안한 마음을 전하고 싶다. 그리고 그런 못난 아빠를 보고도 바르게 성장해준 아이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아빠로서 모르면 공부라도 했어야 했는데, 모르면 책이라도 읽어야 했었는데, 혼자만의 절망감으로 알코올 중독에 빠져 허덕였으니 얼마나 못난 아빠였는지. 그저 낳기만 낳았지 어떻게 사랑하는지 방법을 몰랐다. 그렇기에 그 피해는 아들과 아내의 몫이 되었다. 몰라도 너무 몰랐다는 생각이 든다. 그 당시 중풍에 걸린 아버님은 나만 보면 많이 우셨다. 중풍으로 몸이 안 좋으면 당연히 눈물이 많은 줄만 알았다.


지금 생각해보니 나를 생각한 안타까운 마음의 표현이었다. 얼마나 안타까웠으면 그렇게 눈물을 흘렸을까? 술만 마시는 나를 아버지의 능력으로 어찌하지 못하는 안타까움. 다리를 절룩거리며 눈물을 흘리던 하얀 머리의 아버지가 정말 많이 생각이 나 눈시울이 시큰거린다. 이제 50이 넘으니 그 마음이 제대로 헤아려진다. 이제 아버지도 돌아가시고 아이도 성인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과거에 대해 자책만 할 수 없는 일이다. 돌아가면서 아버지는 나의 행복을 눈물겹게 빌었을 것이다. 아버지의 그런 바람에 보답하는 일은 내가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아버지는 나에게 마지막 말을 남겼다. 유언과도 같은 이 말

“영아, 술 끊어라.”


늦긴 했지만 그런 아버지의 유언을 지키게 되어 조금은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아들들에게 상처를 준 것에 대해 앞으로 더욱 사랑하며, 어린 시절의 상처를 보듬어줄 것이다.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정말 가족들에게 잘해주고 싶지만 되돌릴 수는 없다. 그나마 다행한 일은 어머니가 살아계시고 아직도 나의 가족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남아있음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사랑해주고 싶은 것이다. 요즈음 어머니는 한번씩 이런 말을 한다.


“니가 술을 먹지 않고 착하니 너무 좋다.”

아내와 아들들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지금은 모두 행복감을 느끼고 살아간다. 지나간 과거는 돌이킬 수 없다. 불행은 시제가 과거완료이다. 하지만 행복은 현재진행형이다.


이 글을 읽는 사람은 나와 같이 어리석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자녀를 사랑한다면, 아버지에 대한 공부를 하여야 한다. 그래야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자녀들을 위해 가치 있게 쓸 수 있다. 글을 쓰면서 많은 것을 느끼게 된다. 예전에는 생각의 기준이 나였다면 이제는 내가 아니라 가족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가족일 것이다. 예전에 둘째가 한 말이 생각난다. 이 말에 묻어있는 간절함을 느끼게 된다.


“아빠가 한 5년 전에만 술을 끊었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앞으로 아빠는 너희들과 지내온 27년보다 더 긴 최소한 30년 이상을 살 거다. 이제껏 못해준 사랑을 2배, 3배 더 해줄 거다. 앞으로 우리 가족은 행복할 일만 남았다. 아빠가 그렇게 꼭 해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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