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 처남 이야기

오빠! 잘 가래이

by 윤창영

*둘째 처남 이야기


포항에서 셋째 처남의 딸인 혜지가 결혼을 했다. 결혼식에 참여를 하니 둘째 처남의 아들인 진보와 처남댁이 왔다. 진보는 둘째 처남을 꼭 빼닮았다. 오랜만에 진보를 보니 둘째 처남이 생각났다. 신혼 시절 경주 처형 집에 자주 갔었는데, 둘째 처남은 갈 때마다 거의 매번 만났다. 우리 부부가 가면 처남이 포항에서 과메기를 사들고 왔다. 그 당시 나도 술을 좋아할 때라서 처형과 처남과 과메기를 안주로 술을 많이 마셨다.


그런 처남이 죽은 지가 벌써 15년이 넘는다. 유명을 달리한 처남을 생각할 때마다 그 과메기가 생각난다. 울산에 살면서도 포항의 명물인 과메기를 몰랐다. 결혼하고 나서야 과메기를 처음 먹었는데, 꽁치를 반쯤 말려 기름이 줄줄 흐르는 생선을 처음에는 먹을 수가 없었다. 평소 생선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로 좋아했지만, 처음 먹는 과메기는 내 비위에 맞지 않았다. 하지만 술을 좋아했던지라 안주로는 억지로 먹을 수 있었다. 그런데 처음에만 그랬지 그 다음부터는 먹으면 먹을수록 맛이 있었다.


토요일 경주로 간다고 하면 처남은 포항까지 가서 과메기를 사왔다. 그리고 경주 언니 집에서 과메기 파티를 했다. 과메기는 미역과 초장과 함께 먹는다. 거실에 처형과 동서, 처남 부부, 우리 부부 이렇게 둥그렇게 둘러앉았고, 처남은 과메기 껍질을 벗기고 먹기 좋게 장만했다. 기름기가 줄줄 흐르는 과메기를 안주로 소주를 마셨다. 과메기를 안주로 술을 마시면 잘 취하지도 않았고, 그 다음 날 일어나도 속이 그다지 쓰리지 않았다. 단지 얼굴에 기름이 번들거렸을 뿐.


나의 신혼에 대한 추억은 경주에서 시작한다. 그래서 신혼만 생각나면 벚꽃과 같은 화사함과 과메기와 함께 처남이 생각나는 것이다. 아내가 큰아들 성원이를 임신했을 때 처남은 살아있는 가물치를 울산까지 가지고 왔다. 그만큼 우리 부부를 끔찍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당시 차가 없던 우리를 위해 자기의 차를 우리가 사용할 수 있게 몇 달씩이나 빌려주기도 했다. 사람 좋은 처남은 정말 우리에게 잘해주었다.


그런데 처남은 45살 즈음에 간경화로 죽었다. 문병 차 병원을 찾아갔었는데, 우리가 온다는 연락을 받고 복수가 찬 배를 움켜쥐고 포항까지 가서 회를 사왔다. 숨을 몰아쉬면서도 그렇게 우리를 위해 애를 써주었다. 그때는 그 고마움을 절실하게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니 그 사랑이 얼마나 큰 것이었나를 조금은 가늠할 수 있겠다. 우리가 다녀간 지 얼마 후에 처남이 죽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죽기에는 너무 아까운 나이였고, 우리에게 잘해준 사람을 잃는다는 사실이 너무 가슴 아팠다. 화장터에서 마지막으로 떠나는 처남을 향해 아내는 울부짖으며 소리쳤다.


“오빠, 잘 가래이.”


글을 쓰는 이 순간 그때가 생각이 나 눈물이 핑 돈다. ‘지금 살아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강한 아쉬움이 남는다. 처남을 통해 진정한 정의 의미를 알았다. 그만큼 처남이 우리에게 준 정의 농도는 짙었다. 요즈음은 울산에서도 과메기가 겨울철이면 빠지지 않는 음식이 되었다. 가끔 과메기를 보면 처남을 떠올린다. 이후로도 오랫동안 처남의 과메기와 그 사람 좋은 웃음이 기억에 날 것이다. 이 글을 쓰는 지금 처남의 음성이 들리는 것 같다.


“윤서방, 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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