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윤창영이가 불행했던 창영이에게
*내가 나에게 쓰는 편지
행복한 윤창영이가 불행했던 창영이에게
안녕! 창영아.
지금은 생명력이 온 땅에 가득한 봄이네. 며칠 전 경주에 갔었는데, 벚꽃이 만발하여 무척 가슴이 설레었어. 그처럼 설렘을 가득한고 창영이에게 편지를 쓴다.
창영이에게 편지를 쓰는 것은 처음이네. 창영이를 생각하면 인생을 참 쉽지 않게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어린 시절은 그런대로 무난하게 보낸 것 같은데, 고등학교 시절부터 창영이는 많은 가치관의 혼란을 겪었구나. 그래서 넌 술을 마셨고, 담배를 피웠으며 공부도 열심히 하지 않았지. 그때 창영이에게 진심어린 충고를 해준 사람이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어른들은 사는 일에 바빴고, 형들도 창영이에게 그런 조언을 할 만큼 충분히 성숙하지 못했다고 생각해.
하지만 한 가지 괜찮았던 것은 창영이는 글쓰기를 좋아했다는 거야. 글이 되던 되지 않던 막 써내려갔기에 그나마 힘든 세월을 버틸 수 있었다고 생각해. 대학교 진학할 때도 그랬지. 고등학교 시절 수업시간에 공부는 하지 않고 글만 썼기에 국문과를 선택했지. 그것은 지금 생각하면 무척 잘한 일이야. 글을 쓴다는 것은 생각 정리뿐만이 아니라, 치유의 효과도 있는 것이거든. 그때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기에 지금 작가가 된 것이야. 비록 유명한 작가는 아니지만, 지금이 끝이 아니라고 믿고 있기에 글을 쓴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어.
국문과에 올라갔어도 창영이는 정서적으로 안정이 되지 못한 것 같아. 매일 술을 마시고 방황하고, 때론 절망하기도 했지. 창영이는 비를 좋아했기에 비만 오면 비를 맞으러 다녔지. 비 내리던 날이면 비를 쫄딱 맞으며, 강변에서 소주를 나발 불며 시를 쓰던 모습이 떠올라. 대학 1학년 때 고등학교 때 친하게 지내던 재영이가 죽었지.
그것을 창영이는 많이 슬퍼했고 자신의 아픔이 재영의 죽음과 맞물리면서 많이 방황했지. 그땐 태화강도 지금처럼 맑지 않았어. 시커멓게 오염이 되어있었지. 그때 적었던 시가 아직 생각나. 태화강변으로 상징되어진 떨어져 내린 곳은, 도로라는 사회에서 이탈된 장소였어.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일상적인 삶에 끼이지 못하고, 태화강변으로 떨어져 내려 비를 맞으며 술을 마시고 방황했던 그 젊은 날의 창영이를 지금 많이 위로해주고 싶어.
방황하는 강
떨리는 가슴은 땅을 치며
떨어져 내린
태화강변에서 통곡한다.
두 개비의 담배를 문 자동차는
별 없는 밤을 돌고
연인들의 향기론 속삭임과
술 취한 이의 노래가 비틀거리는
태화강변에서
왜 가슴을 움켜쥐고 울어야 하는가.
강 바닥에 내린 불빛은
기다란 손가락으로
나를 비웃는데
다리 위 불빛이
강에 내려 비틀거리는
이 강변에서
소주병을 나발 불며
어찌하라고
밤을 할퀴어대는가?
그러다 군대에 갔지. 의무경찰에 자원입대를 했는데, 군대에서도 재영이 생각을 많이 했지. 그리고 ‘1987년’이라는 영화가 말해주듯이, 그 시대에는 데모가 심하게 일어났고 어쩔 수 없이 데모 진압에 내몰리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어. 그땐 정말 많이 힘들었지? 또한, 울산남부경찰서 대용감방에서 간수로 근무한 적도 있었잖아. 그곳의 경험은 젊은 날의 충격이었지.
하지만 남들이 겪어볼 수 없는 경험이었기도 해. 그때 기억나는 것이 있어. 형제 복지원 박인근 원장과 일당들이 잡혀 왔었지. 그 복지원에서 죽어나간 사람만 500명이 넘는데도, 그 사람은 집행유예로 풀려났어. 아직까지 그가 살아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때 피해를 당한 사람들은 아직도 시위를 하고 있는 것을 기사로 접하곤 해. 무척 슬픈 일이었지. 의경 생활은 원치 않는 데모 진압에 내몰리기도 했지만, 사회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해준 귀한 경험이기도 했어. 제대할 당시 경찰을 하면 어떻겠냐는 제안도 있었지만, 그것을 거절하고 복학을 했지.
복학하고 나서도 여전히 마음의 상처는 치유되지 않아 계속 술을 마셨지. 하지만 그래도 글을 쓰는 삶은 여전해서 다행이야. 가람문학회라는 동아리에 들어 잠시 시를 썼지만, 국문과 내에 ‘창작’이라는 글쓰는 동아리를 죽은 수진이와 함께 만든 일은 진짜 잘한 일이야. 그 모임이 올해로 벌써 30년이 되었구나. 올해는 작지만 그것을 기념이라도 하고 싶은 생각을 하고 있어.
대학 3학년 때부터 취직 준비를 하였지. 마음의 상처는 있었지만 그래도 할 일은 한 창영이가 참 대견스러워. 대학을 졸업할 때, 남들이 부러워하는 대기업에 취직을 했지. 그때는 세상을 얻은 기분이었을 거야. 그리고 미팅을 해서 만난 지금의 아내와 결혼도 하였지. 신혼은 누구나 그렇듯 아름다웠지. 창영이에게도 벚꽃처럼 화사하고 향기로웠을 거야. 그리고 큰아들도 낳았지. 큰아들을 낳을 때 고생을 많이 한 걸 알아. 아내도 그렇고 창영이도 그렇고 아픈 엄마 때문에 다른 사람 손에서 한 달 간 길러진 큰아들도 그렇고. 그 아들이 벌써 스물일곱이 되었구나. 3년이 있다가 둘째 아들도 낳았지. 그렇게 행복을 꾸려나가는 것 같아 다행스러웠어.
하지만 넌 회사 생활을 무척 힘들어 했어. 마음의 상처도 완전히 아물지 않은 상태에서 사람들로부터 또 다시 상처를 입었지. 그때 넌 과녁이라는 시를 지었어. 상처가 나서 구멍이 뚫린 가슴에 또 다시 화살이 날아와 박힌 것으로 표현을 했지. 그때 창영이가 지은 시야.
과녁
몸을 파는 창녀처럼
가슴을 풀어헤치고
밤보다 어둠이 먼저 찾아오는 강변에
과녁으로 서 있습니다.
사람들은 나의 붉은 심장을 향해
화살을 당김니다.
화살이 날아와 박힙니다.
화살이 날아와 박힙니다.
화살이 박혀도 쓰러지지 못 합니다.
박힌 화살을 사람들은 뽑아냅니다.
가슴에는 피가 흘러나옵니다.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피가
흘러내립니다.
상처 위에 또 다시 화살이 날아와 박힙니다.
사람들은 또 다시 뽑아냅니다.
너무 많은 상처 탓에
너무 많은 출혈 탓에
가슴은 구멍이 뚫린 곳도 있습니다.
왜, 화살 맞은 사슴처럼
피 흘리며
차라리 쓰러지지도 못할까요.
숭숭 뚫린 구멍 속으로 바람이 지나갈 때
"휘이, 휘이"
함께 울기만 할뿐.
창영이는 IMF를 겪으며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았지. 그러다 결국 2002년에 창영이를 괴롭히던 상사의 멱살을 잡고 싸웠고, 결국에는 사표를 쓰고 나오게 되었지. 그때 힘들어하던 창영이의 모습이 지금 생각해도 안쓰러워. 회사를 그만 두고 창영이는 논술학원을 차렸지. 하지만 그 일도 뜻대로 되지 않아 많이 힘들어 했어. 논술학원의 수입으로는 경제적으로 안정이 되지 않았고, 가장으로서 책임을 다하기 위해 논술학원은 아내에게 맡기고 중소기업으로 다시 돈을 벌러 갔어.
그때 참 많이 안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래도 대기업에 과장까지 했었는데, 중소기업으로 들어가 생활한다는 것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쉽지 않은 일이었어. 하지만 창영이는 자신보다는 가족을 우선적으로 생각한 것이 기특했어. 하지만 그곳에서 버티지 못하고 또 다른 기업을 찾고 또 그만 두고 하는 과정을 스무 번이나 반복했지.
그것도 여의치 않아 또 다른 사업을 했는데 성공하지 못해 사는 집까지 날려버리게 되었지. 그러다 알코올 중독자가 되었지. 그때가 아마 제일 힘든 시기였을 거야. 자신도 힘들었겠지만, 지켜보는 아내와 아이들도 창영이 만큼 힘이 들었을 거야.
하지만 다행했던 것은 계속 글을 썼기에 등단을 하였고, 시인이 되었지. 그리고 울산 작가회의에서 사무국장을 하며 왕성하게 작품활동을 한 거야. 그것이 창영이의 그 힘들었던 과정을 극복하게 한 정신적인 버팀목이 된 것이라 생각해. 그것이 창영이 시련의 끝이 아니었어.
경제적으로 막다른 골목에 내몰린 사람들이 할 일이 없으면 마지막으로 하게 되는 일이 막노동이고 창영이는 그것을 하게 되었지. 하지만 예전과는 다른 모습이었어. 창영이이가 술을 끊었다는 것이야. 하루 일당 10만 원을 받으며, 이제껏 육체노동이라고는 해본 적이 없는 창영이었지만, 그 힘든 일을 잘 버텼어. 그것을 버티게 한 힘이 글을 쓴 것이라 생각해. 아침 5시에 일어나서 일용직 사무실로 출근을 하였고, 일을 마치면 그 피곤한 몸을 이끌고 맘스허브라는 카페에 가서 글을 적었지. 그 생활이 무려 1년이나 지속되었어. 그리고는 어느 날 그만 두고 글을 쓰기 시작했어.
자기소개서 전문학원을 울산에서 처음으로 만들어 대입 수험생들과 취업 준비생들의 자기소개서 컨설팅을 해주었고, 울산 남구청에 들어가 남구 20년사를 집필했지. 그것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계속적으로 글을 써 온 결과라고 생각해. 그리고 올해 처음으로 책을 쓰기 시작해서 벌써 4권 째 쓰고 있지. 거의 한 달에 한 권씩 글을 쓰는 일은 무척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해.
이제 창영이는 행복해 보여. 왜냐하면 창영이가 진짜 하고 싶었던 글쓰기에 전념할 수 있기 때문이야. 그리고 가족들도 많이 행복해보여. 가장이 바로 서니 방황했던 아이들에게 많은 힘이 되는 것 같고, 술도 마시지 않으니 아내도 너무 행복해 하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창영이의 마음속에 항상 자리하고 있었던 그 상처가 아물었다는 거야. 거의 우울증에 가까웠던 상처가 어느 덧 없어져 버린 거야. 그것이 글을 쓴 효과라고 생각해.
앞으로 창영이는 행복하게 살 거야. 그리고 어떤 어려움이 닥쳐와도 잘 극복하리라 믿어. 그리고 지금 쓰고 있는 책이 다른 사람에게도 행복할 수 있게 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리라 믿어. 언젠가 다시 창영이에게 편지를 쓸 거야. 그때는 아마 더 행복한 사연들을 많이 적을 수 있으리라 확신해.
마지막으로 창영아 많이 힘들었는데도 그것을 극복하고,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니 너무 축하한다는 말을 해주고 싶어.
오늘도 누군가에게 기쁨을 선물하는 하루가 되길 바라며, 이만 줄일게
그럼 안녕.
행복한 윤창영이가 불행했던 창영이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