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창영 Jul 27. 2018

게으르게 살자

죽는 순간 행복해지려고 노력하는 것은 아니다.


쉰다는 것은 징검다리와 같은 것이다. 한번에 큰 개울을 건널 수는 없다. 중간에 있는 징검다리를 짚어야만 개울을 건널 수 있다. 핸드폰을 충전해야지만 사용할 수 있는 것처럼 우리 몸과 마음도 충전을 해야만 사용할 수 있다. 50넘는 인생을 살아오면서 느낀 점은 그런 충전의 시간을 갖지 못하고 ‘해야만 할 일’이라 생각하는 일에 집착하며 살아왔다는 것. 그런데 엄밀히 따져보면 그 ‘해야만 할 일’이라는 것이 온전히 내 생각의 울타리 속에서만 ‘해야만 할 일’이라는 것이다. 하지 않아도 별 문제가 없는 것을, 쉬면서, 다음에 해도 될 일을 지금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처럼 조급증 속에 사로 잡혀 최선을 다하면서 살아왔다는 것이다.   


‘해야만 할 일’을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고 나만이 아니라 가족들을 위해서도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보니 제대로 된 충전의 시간을 가지지 못 했다. 아니 나름 충전의 시간을 가진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술을 마시는 것이었다. 일을 하다보면 스트레스가 쌓이고 그것을 푸는 데는 술 마시는 것이 최고였다. 술에 취해 업무의 스트레스를 푼다고 생각했고, 낭만을 고독을 사랑을 시를 이야기하는 것이 인생을 재미있게 사는 것이라 생각했다.  술을 마시는 것이 나에게 가장 적합한 충전의 방법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것은 그랬으면 좋겠다는 나의 바람에 불과했을 뿐이었고, 자기최면에 불과했다.   

 

어릴 때부터 우리는 ‘최선을 다하자’라는 말을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말 중에 가장 좋은 진리라고 여기며 남발했다. 어른들로부터 직접적으로 세뇌를 받았으며, 최선을 다하는 일만이 인생을 헛되이 낭비하지 않는 최선의 방법인 것처럼 느끼게 되었다. 그런데 최선이란 무엇일까? 생각해보면 참 막연하다. 어디까지가 최선이고 어디까지가 최선이 아닌지 그 경계가 불분명하다. 그러다보니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기울인다는 의미로 인식하게 된 것이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 그 노력은 쉼을 허용할까? 은연중에 우리는 최선이란 쉼이 없거나 최소화한 것으로 인식하였다. 시험을 잘 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 최선의 노력이란 쉬지 않고, 잠도 줄여가며 시험 공부한 것을 의미한다. 우리 세대뿐만 아니라 많은 세대가 시험이 인생의 항로를 결정할 만큼 중요한 학생 시절을 보냈기에, 잠재의식 속에는 쉰다는 것은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것으로 남게 되었다. 인식하든 인식하지 못하든 쉰다는 것은 정상적이지 않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히게 된 것이다. 그 속에서 숨을 쉬며 살다보니, 쉼이 없는 생활이 몸에 배인 습관이 되어버렸다.    


학창시절을 끝내고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성장과정에서 몸에 배인 쉼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은 그대로 답습되었다. 한마디로 쉼 없이 사는 생활이 습관이 되어버린 것이다. 즉,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래야 잘 살 수 있다.’ 이러한 생각은 우리 중추신경의 일부가 되어버렸고, 우리는 그것이 최대의 진리인양 매달려 살아가는 것이 당연한 삶이라고 여겼다. 다른 말로 하면 몸과 정신을 제때에 충전하지 못한 비정상적인 상황에서 세상과 맞짱을 뜨고 있었던 것이다.   

  

또 하나 우리 정신을 지배한 관념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하면 된다’라는 말이다. 인간에게는 무엇인가 이루고자 하는 본능이 있다. 긍정적인 의미로는 꿈 내지는 이상이며, 부정적인 의미로는 욕망 내지는 욕심으로 표현된다. 그런데 꿈과 욕망의 경계는 불분명하기 때문에 자신도 무엇이 꿈인지 욕망인지를 구분하기 쉽지 않다. 그렇게 불분명한 상황에서 ‘하면 된다.’라는 관념으로 최선을 다하며 살아 왔다. 우리나라 교육은 ‘최선을 다하자.’,‘하면 된다.’ 이 두 가지를 어릴 때부터 철저하게 주입했다. 그런데 살아보니 최선을 다하고 사는 인생이 얼마나 피곤한 삶인지, ‘하면 된다’라는 생각이 얼마나 많은 일을 하면 안 되게 하는지 알게 되었다. (물론 동의하지 않은 사람도 많을 것이고 반론을 제기할 사람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이 글은 내가 살아오면서 느낀 점을 서술한다는 것을 감안해주기 바란다. 공감을 하든 하지 않든 그것은 독자의 자유이다.)    


살아보니 ‘해야만 할 일’이 아닌 것이 없었다. 그 일을 하지 않은 것은 곧 최선을 다하지 않음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나이가 들어 돌아보니 ‘해야만 할 일’중에 많은 부분은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었고, 그 일에 몰두하여 최선을 다하다보니 정작 ‘해야만 될 일’을 하지 못한 결과를 초래했다. 그 중에 가장 아쉬운 일이 가족과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한 것이다. 이것이 가장 ‘해야만 할 일’이었는데, 그때는 그것을 인식하지 못했다. 돈을 버는 것만이 나와 가족을 위한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하면 안 될 일이 없다는 관념에 몰두해 나와 맞지 않는, 내가 해도 결코 되지 않을 일을 하는데 많은 시간을 낭비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쉼 없이 최선을 다해 노력했지만 돈도 벌지 못 했고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을 많이 갖지도 못 하고 살아온 것이다.    


오십대 중반에 접어든 지금. 그래도 지금이라도 그 사실을 느낀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시간은 돌이킬 수 없다. 매 시간 중요하지 않은 때는 없다. ‘미래의 행복을 위해 지금 좀 힘들고 불행해도 괜찮아’ 라고 생각하며 최선을 다한다면, 행복한 미래는 다가올 확률은 적다. 왜냐하면 행복은 습관이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지금 행복한 습관을 만들지 못했는데, 미래에 과연 없는 습관이 자연히 만들어질 것인가? 지금부터 행복한 습관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미래에도 행복해질 수 있다. 그렇기 위해서는 ‘하면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기보다는 지금 쉼을 가지자. 그래야 행복해지는 습관을 기를 수 있다. 쉼은 우리에게 재충전의 시간을 주어 현실을 선명하게 볼 수 있게 하며,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인지를 알게 해준다. 난 쉼을 통해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돈을 버는 일이 아니라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을 많이 갖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멀리 가려면 천천히 가야하고, 행복하게 가려면 가족과 함께 가야한다. 그래야 풀잎에 앉은 풀벌레의 노래 소리도 들을 수 있으며, 그를 통해 깨알같이 작은 행복에도 깔깔거릴 수 있다. 결코 ‘해야 할 일’만 해서는 누릴 수 없는 행복이다. 돈으로 살 수 없는 행복이다.    

행복은 순간적인 성취감이 아니라 지속적인 감정이다. 행복은 100m 달리기가 아니라 마라톤이다. 마라톤에는 지구력이 필요하다. 행복에도 지구력이 필요하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100m달리기하는 것처럼 최선을 다해 뛰지 말고, 쉼을 가지며 느긋하게 살아가자. 그래야 인생의 많은 시간을 행복으로 수놓을 수 있다. 흔히 우리는 ‘죽기살기로 일했다.’라는 말을 듣곤 한다. 죽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죽는 그 순간 행복해지려고 앞만 보며 달리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쉼을 가지며 충전하며 살아가자.    

게을러지자. 어찌 보면 그것이 더 잘 사는 일이다. 

작가의 이전글 갑질하는 사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