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1학년 때 발자크의 ‘골짜기의 백합’을 읽었다. 여주인공 이름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앙리에뜨’. 감수성이 예민할 때 읽은 글이라 그 글을 읽고 막연하게 아름다운 사랑을 동경했다. 나와 짝지였던 김재영이란 친구가 있었다. 내가 앙리에뜨를 동경했던 것처럼 그는 소설 ‘춘희’의 여주인공 ‘마르그리뜨 고띠에’를 동경했다. 그리고 우리는 소설 ‘춘희’에 나오는 또 다른 소설 ‘마농레스꼬’를 함께 읽었다. 그때의 사랑은 아름다움 자체였고, 아무리 큰 슬픔이 몰려오더라도 절실한 사랑을 한번 해보고 싶다는 꿈을 꾸었다. 그리고 시를 썼다. 절실한 사랑이란 소설 속에서만 존재한 것이었는지, 슬픈 사랑만이 아름답게 느껴졌는지, 그와 나는 소설 속에 나오는 그런 슬픈 사랑은 해보지 못했다. 고등학교 졸업식 날. 재영이와 함께 붉은 천막으로 만든 포장마차에서 취하도록 술을 마셨다. 슬픔은 다른 곳에서 밀려왔다. 그가 스물의 나이로 죽은 것이다. 1학년이 끝나갈 즈음의 겨울이었다. 학교생활도 재미가 없고 원인을 알지 못하는 무력감과 우울감에 빠져 기도원으로 향했다. 언양 부근의 감람산 기도원, 그곳을 가는 길에 언양에 사는 고등학교 때 친한 친구였던 재영이를 찾았다. 그는 대학교에 떨어져서 재수하고 있었는데, 그를 만난 날은 아주 날씨가 추웠다. 그의 집으로 들어가니 불도 피우지 않고 혼자 있었다. 둘은 오랜만에 만나 소주를 마시며 옛날이야기를 했다. 감람산 기도원에서도 내 생각은 정리가 되지 않았다.
얼마 후 재영이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언양 반천에서 주검으로 발견되었는데 그의 삼촌이 발견했다는 것이다. 그가 죽고 장례를 치르고 난 후 얼마 뒤에 그 소식을 듣고 그의 집을 찾았다. 그는 아버지가 없이 어머니의 손에서 자란 외동아들이었다. 그가 죽고 난 후 그의 집을 찾아가 어머니와 함께 많이 울었다. 그리고 다시는 그 집을 찾아가지 못했다. 나를 보면 어머니께서는 아들이 생각나 너무 슬퍼하실 것 같아서였다. 이 시는 재영이의 죽음을 생각하며 적은 글이다. 재영이와 그 추운 방에서 나눈 사연들, 그날들을 생각하면 불현 듯 그는 부활을 꿈꾸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부활에 대한 추억
3444
3학년 4반 44번
고등학교 때 짝지였고
4란 숫자에 무거운 의미를 부여한
그의 교번이었다.
생의 마지막 수라 했던 "4
나름의 생활에 절룩이며
언양 감림산 기도원 가는 길에 그를 찾았다.
(세상에서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재수하는 방엔 온기가 차단되었고
닫힌 창, 사선으로 굴절되던 빛만이
생기의 전부였다.
이불을 목까지 올리고 앉더라도
얼굴이 시린 겨울 방.
벌벌 떨며 우리는 소주를 나발 불었다.
3대 독자인 그는 불완전한 순수의
선명한 이미지를 사랑했다.
순수 속에서의 불순이 아닌
춘희의 "마르그리뜨 고띠에"와 같은
불순 속에서의 순수를.
문틈으로 새어 오는 바람이 차가웠다.
흑백T.V가 흔들리며 `지지'그렸다.
모든 책들은 거꾸로 꼽혀 있었는데
단지 바르게 꼽힌 책은
`부활에 대한 연구'
냉기가 스민 "1을 느꼈다.
언양을 가로질러 흐르는 강변에서
실종 3일째 되는 날.
그는 자살한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강둑에는 유품으로 보이는 작은 수첩이 있었고
444444444444444444444444444444444444444444444
45개의 4가 메모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