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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이 Apr 23. 2021

태초의 시험을 앞둔 쌍둥이

경쟁과 시험

막냇동생들이 태초의 중간고사를 코앞에 두고 꽤 난감해하고 있다. 우리 때는 초등학생 때부터 중간고사, 기말고사를 꼬박꼬박 치렀지만 막냇동생 세대는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시험을 본단다. 와, 세대차이가 이렇게 느껴질 줄이야.


나야 어릴 적부터 혼자 계획을 짜고 혼자 실행하는 데에 이골이 난 터라, 시험 계획표 짜는 건 아메리카노 커피 원샷만큼 쉬운 일이다.


그걸 자~알 알고 있는 막냇동생이 내게 계획표를 짜 달라며 연습장을 들이밀었다. 그런 동생들에게 "라떼는 말이야! 시험 한 달 전부터 공부했어!"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이 역시 세대차이라 생각하며 꾹 짓눌렀다. 그리고 연필로 슥슥 그어 계획표를 짜서 비쳐주니, 마치 내가 대신 공부라도 해준 것처럼 안도하더라.




인생 첫 시험은 초등학교 입학시험이었다. 모교는 교육대학교 부설 초등학교인지라 입학부터 험난했다. 거기에 일명 뺑뺑이란 걸 통해 구슬 색에 따라 입학 여부도 갈린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게 무슨 난리 인가 싶지만, 아무튼 내 태초의 시험은 7살이었던 셈이다. (강하게 자랐다.)


내 초등학교 동창들의 마음을 물어보고 싶다. 그만큼 애써서 들어올만했는지, 6년 동안 행복했는지. 30살이 된 친구들의 마음을 물어보고 싶지만 딱히 물어볼 만큼 교류하는 친구가 없다. 그래, 부질없다 이거다. 물론, 나중에 만날지도 모르겠지만 당장은 각자 먹고사는 데에도 빠듯하다.


본론으로 돌아와, 내 동생들은 15살이 되어서야 태초의 시험을 준비한다. 참으로 좋아진 세상이다. 이랬어야 했고, 앞으로도 이렇게 해야만 한다. 최대한 시험이라는 매개를 늦게 겪도록 하고, 경쟁이란 각성제도 늦게 겪도록 해주고 싶다. (이렇게 말하면서도 이번 시험 망치면 조금은 속상해하겠지.)




태초의 시험이 7살이었던 것뿐이지, 난 유치원생일 때도 늘 경쟁해왔다. 더 착하고 똑똑한 어린이가 되어, 상을 받아 칭찬과 인정을 받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착한 어린이가 되고 시험과 경쟁에서 살아남아도 행복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아등바등 힘겨워했고, 중학생이 되니 내가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 의문이었다. 어디 청소년 권장 도서에 적혀있을 법한 레퍼토리지만, 정말이다. 내가 왜 이렇게까지 공부를 해야 하는지 이해가 안 됐다.


당시 과학수사대 CSI를 보며 CSI 요원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아무리 열심히 공부를 해도 내 성적으론 무리였다. 하루는 그림을 배우고 싶었지만, 연합고사를 앞둔 16살 학생에겐 사치였기에 포기했다. 하루는 뮤지컬 배우가 하고 싶었지만, 평범한 17살 학생에겐 불장난에 가까운 꿈이었다.


도대체 그럼 왜 공부를 하느냐고 물었더니 어른들은 이렇게 답했다.


"나중에 네가 꿈이 생기면 그때, 너의 성적이 뒷받침해줘야 이룰 수 있어."


"꿈이 있다고 말했잖아요."


"아, 근데 그런 꿈은 안돼. 현실적으로 생각 하렴. 미술이나 노래 같은 건 타고난 애들이나 하는 거야."


"아."


이런 대화가 반복되다 보면 자연스레 꿈을 찾지 않게 된다. 그럼 또, "넌 학생인데 꿈도 없니?"라며 떠민다. 이런 패턴은 희망고문에 가깝고, 나중엔 진을 빼고 영혼을 쪽 빨아먹는다. 그래서 남는 건 무미건조한 껍데기뿐인 20살짜리 사회 초년생이다. 내가 그랬다.




그래서, 내 동생들에겐 함부로 꿈을 묻지도 않고 장려하지도 않는다. 대신에 요즘 관심거리에 대한 질문을 많이 하는 편이다. 쌍둥이 막냇동생 중 1분 형인 넷째는 기계를 잘 다루는 편이다. 몸을 쓰는 일에도 능하고, 공부도 잘하는 만능이다. 하지만, 자기가 하기 싫은 공부나 일은 절대 절대 하지 않는다. 대답만 잘할 뿐, 절대 하지 않는다. 특히 영어를 절대 하지 않는다.


녀석의 마음을 감히 읽자면, 못하는 과목이라 더 손이 안 가는 것이겠다. 하라면 곧잘 할 거지만,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뒤처진다는 생각이 들게 한 과목은 괜스레 미운 것이다. '야, 됐어. 너 말고도 다른 과목 많거든?' 이런 마음이려나. 평소에 공부깨나 잘한다는 소릴 듣는 녀석인데, 영어 앞에서만 서면 무기력해지고 작고 초라해지는 게 싫고 두려운 것일지 모르겠다.


그래서 하루는 날을 잡아 영어교과서 본문을 함께 공부해줬다. 역시나. 내 예상보다 훨씬 잘 따라와 줬고, 잘 해냈다. 그래서 더욱 칭찬을 해주고, 토닥여줬더니 그 이후론 진저리 치진 않는다.


넷째는 은연중에 자신이 기계를 잘 다룬다는 걸 알고 있다. 그렇기에, 개발자나 프로그래머 같은 IT계열에 관심이 많다. 그래서, 한마디 붙여줬다. "개발자든 프로그래머든 영어는 해야 할 텐데. 그냥 남들 만큼?"라고. 그랬더니, "그럼 해야죠."라더라.



막냇동생 중 1분 동생인 막둥이는 영어를 제일 잘하고 제일 좋아한다. 팝송도 앉은자리에서 외우고 가사를 보며 단어를 외우는 녀석이니, 언어능력에 뛰어난 듯하다. 다만, 막둥이가 영어를 잘하자 넷째가 그 모습을 보며 영어를 더 싫어하게 됐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만약 쌍둥이를 두고 비교하고 경쟁하게 만든다면? 상상만 해도 소름이 돋을 지경이다.


"넷째는 잘하던데, 넌 왜 못해? 너희 쌍둥이잖아."


"막내는 잘하던데, 넌 왜 못해? 넌 심지어 1분 형이잖아."


학교를 다니는 순간부터 아이들은 좋든 싫든 경쟁사회로 던져진 것이다. 그런데, 지친 몸을 끌고 하교했더니 집에서도 경쟁하라? 이건 아이들이 삐뚤어지기 딱 좋은 환경이 아닌가! 집이 집 같지 않고 낯설어지는 순간, 아이들은 삐뚤어지기 일쑤니까.


그래서, 우린 쌍둥이지만 같은 옷도 색이라도 다르게 사준다. 사진에서도 같은 디자인이지만, 색상이 다르지 않은가. 그렇다. 각자 취향에 맡겼다. 그래서인지, 우리 집은 쌍둥이끼리 싸우는 일은 정말 정말 드물다. 서로의 성격을 너무 알기에 각자 화가 일을 만들지 않고, 싫어할 말을 뱉지 않는다. 그리고, 앞으로 살면서 수도 없이 겪을 경쟁과 시험에서 서로의 등받이되어주라 가르친다. 서로는 절대 경쟁상대가 아님을 수도 없이 강조한다.


그 결과, 둘은 둘도 없는 친구이자 선생님이 되어줬다. 막둥이는 넷째에게 영어를 알려주고, 넷째는 막둥이에게 수학을 알려준다. 둘을 가만히 보고 있자면, 참 잘 자라고 있구나 라며 마음이 따듯해진다.


하지만, 또 모르겠다. 중간고사 결과지를 안고 서로 무슨 생각에 잠길지. 그래서, 부모는 힘든 거 같다. 고작 누나인 나도 이렇게 머리가 아픈데, 우리 엄마는 얼마나 머리 아프실까. 그래서 난 오늘도 부모이길 포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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