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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이 May 10. 2021

전과 100범

때를 미룬 죄.

생일날, 이런저런 안부 끝에 좀 더 색다른 안부 인사를 들었다.


"좋은 소식 없어?"

"좋은 소식?"


좋은 소식이 무엇일까? 나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살면서 좋은 소식의 척도는 동전을 뒤집듯이 뒤바뀌곤 한다. 하물며, 한 사람의 좋은 소식조차 때마다 바뀌는데, 사람마다 좋은 소식의 척도가 다른 건 당연한 게 아닐까?


누군가에겐 연애가 좋은 소식일 테고, 누군가에겐 완쾌가 좋은 소식일 테고, 누군가에겐 일감이 많은 게 좋은 소식인 것처럼 말이다. 일러두자면, 내게 좋은 소식은 일감이 많고 계약서가 차곡차곡 쌓이는 것이다. 그래서 난 당당하고 기분 좋게 답했다.


"좋은 소식 있지. 계약서가 쌓이고 있어."

"그건 좋네. 난 아마 내년 이맘쯤엔 결혼할 듯"


갑자기? 내 계약서가 쌓이고 있는데, 갑자기 내년 이맘쯤에 결혼을 한다고? 이쯤에서 합리적인 의심이 들었다. 내 생일에 안부 인사를 건넨 이유가, 내 좋은 소식엔 관심 없고, 오로지 자신의 좋은 소식을 알리고 싶었구나 라는 의심 말이다. 내가 이래서 브런치를 못 끊지. 며칠 전에 내가 적은 글이 떠오른다. <안부 없는 대한민국을 꿈꾼다.> 


연락을 마무리하고 다시 일을 하는데 헛웃음이 나왔다. 내 생일 안부 연락이었는지, 아마 내년 이맘쯤에 있을 자신의 결혼식 안부 연락이었는지 궁금할 지경이었으니.


"하는 일 잘 됐으면 좋겠어, 책 나오면 한 권 주고."


마무리까지 대단했다. 내 오랜 꿈을 두고, 태어난 날을 두고, 사랑하는 일을 두고 잠깐 사이에 몇 번이나 발길질당했나? 정해둔 시간 안에 최대한 무례하게 굴기 대회에 나갔더라면, 장려상은 받았을 재목이었다. 이래서 대한민국엔 안부가 사라져야 한다. 그냥, 인사만 남아야 한다.


그렇게 당당히 내게 좋은 소식이라며 운을 뗀 이유를 그 친구의 하는 언행을 미루어 보아, 조금은 알 거 같다. 아마도 30살인 우리는 이제 결혼할 '때'에 들어섰고, 자신은 그 '때'에 잘 맞춰 제대로 길을 가고 있다는 성취감 때문이겠다.



10대엔 열심히 공부할 때, 20대엔 열심히 사랑할 때, 30대엔 결혼할 때인가? 잠깐, 혹시 때를 지키지 않으면 불법인가? 내가 모르는 사이에 법이라도 바뀌었던가?


때를 지키지 않는 게 불법이라면, 난 전과 100범은 넘을 테다. 여태껏 살면서 때를 지키며 살아본 적이 없으니까. 10대에 열심히 공부하며 연애도 해봤고, 20대엔 열심히 공부하며 연애도 하며 일도 했다. 아직 30대 된 지 1년도 되지 않아서 잘 모르겠다만, 30대엔 열심히 일할 생각이다. 지금은 일 할 때니까. 연애는 하면 좋고, 아님 말고.




난 비혼주의자이다. 그래서 같은 비혼주의자끼리 연애하면 좋겠다만, 아직까진 진짜 비혼주의자인 남자를 찾지 못했다. 그렇다고 비혼주의를 알리지 않고 연애하는 것은 생각도 하면 안 된다.


이런 부분에서 10대, 20대 때엔 연애가 참 쉬웠다. 대화 잘 통하고 사람 좋고, 함께 있을 때 웃음이 나오면 사귀는 데에 하등 문제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20대 후반부터 연애가 쉽지 않아졌다. 약 180일가량 사귀고 나면, 꼭 결혼 이야기가 나온다. 분명 비혼주의자임을 알리고 시작했어도, 결혼 이야기는 빠지지 않았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내 신념을 두고서 능력 좋은 영업사원처럼 상대를 설득해야만 했다. 그게 귀찮고, 싫어졌다. 그래서 시작도 전에 포기한 연애가 몇 번인가.


아니지, 사실 핑계다. 정말 잘 맞는 커플이었다면, 어쩌면 비혼주의자에서 딩크족으로 내 생각이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따라서 우린 서로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 헤어진 거다. 그래서 헤어진 건데, 난 비혼주의자이고 그는 결혼을 꿈꿨기에 헤어졌다며 합리화시킬 뿐. 딱 거기까지인 연애였다. 그리고 당분간은 그런 거기까지인 연애를 하고 싶지 않다. 굳이 그럴 필요가 사라졌다. 연애로 얻을 수 있는 정서적 안정감과 따듯함을 다른 곳에서 찾았으니까.


굳이 연애를 하지 않아도 행복할 수 있는데 왜 아파하고 불편해하며 연애를 해야 할까? 이래서 체질적으로 연애와 맞지 않다. 하지만 남들은 못할 짓이라 여기는 내 일은, 내겐 충분히 해볼 만한 행복한 짓이다. 그래서 오늘도 연애할 때를 미루고 기계처럼 글을 적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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