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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일리아트 Jul 18. 2024

②- 이명래의 동생 이순석, 국회의사당앞 해태상

브랜드의 문화사

국회의사당 해태상 아래에는 무엇이 묻혀 있을까?


한편 이명래의 둘째 딸 이용재(李容載, 1922년~2009년)는 경성여의전(고려대 의대 전신)을 졸업한 의사로서 이명래고약의 대중화에 기여했다. 의사인 이용재가 돌보았던 환자가, 아내가 병으로 사망한 이후 우울하게 보내고 있던 유진오 박사를 소개했다. 유진오(兪鎭午,1906년~1987년)는 신민당총재와 고려대 총장을 지냈고 우리나라 헌법의 기초를 만든 분이다. 유진오와 결혼 후 이용재는 고약의 대중화를 위해 1956년 <명래제약>을 관철동에 설립한다. 고약의 성분을 일부 변경해 대량생산에 나섰다. 이 약을 1980년대까지 많은 사람이 사용했다. 그러나 사람들의 형편이 나아지며 종기로 고생하는 사람들이 없어지고 고약 대신 바르는 연고제가 선을 보이며 2002년 명래제약도 문을 닫는다.

이명래가 약으로 국민들을 종기에서 해방시켰다면 동생 이순석은 우리나라 공에의 선구자이다


이명래가 한국인을 종기에서 해방시켰다면 그의 동생 하라 이순석(賀羅 李順石, 1905-1986)은 우리나라의 예술계에 큰 족적을 남겼다. 맏형이 드비즈 신부의 도움으로 종기 제조법을 전수받은 것처럼 이순석도 드비즈를 통해 회화와 공예를 접할 수 있었다.

1925년 이순석은 동경미술학교 도안과에 입학한다. 도안을 택한 것은 일본의 공예학자 야나기 무네요시의 영향이 컸다. 동경미술학교는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 고희동을 비롯한 김관식과 김찬영이 졸업한 학교이다. 그는 졸업 후 동아일보 강당에서 항아리, 수영복, 포스터 등 30여점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도안전시회를 연다.

이상과 변동림이 만난 낙랑파라


그러나 그가 우리의 문화사에서 주목받는 것은 1932년 7월7일 경성부청(서울시청) 건너편 장곡천정(소공동) 105번지에 경성 모더니스트들의 모임 장소, 문인의 모임 구인회와 화가의 모임 목일회 멤버들의 단골집인 낙랑파라(樂浪 parlour)를 개업했기 때문이다. 그 다방은 프랑스의 ‘살롱’과 같이 예술인들이 모여 고전음악을 들으며 문학과 미술을 논하는 아지트였다. 1층은 다방, 2층은 개인 작업실로 꾸몄다. 당시의 사진을 보면 지금보아도 예사롭지 않은 내부 인테리어를 볼 수 있다. 1930년대 서울의 모던한 스타일이 외국에 비해 전혀 손색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낙랑파라 뒤에는 화가 구본웅이 운영하는 골동품점이 있어서 이순석과 구본웅, 구본웅의 절친 시인 이상이 자주 어울렸다.


그래서 박태원의 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도 낙랑파라와 박태원의 친구 이상이 등장한다. 이상은 종로에서 제비 다방을 폐업하고 금홍이 하고도 헤어진 뒤에 이곳 출입이 잦았다. 낙랑파라의 지배인은 변동욱이다. 이상은 변동욱에게 자그마한 키에 지성미가 넘치는 동생을 소개해 달라고 했다. 그래서 시인 이상과 문학소녀 변동림의 만남은 시작되었다. 둘의 만남은 가히 변강쇠와 옹녀의 만남처럼 우리나라 문예사에서 큰 지진과도 같았다. 이화여전을 갓 졸업한 변동림이 나중에 김환기의 아내 김향안이 될지 누가 알았겠는가? 이상은 금홍이와 헤어진 뒤 헛헛한 마음에 대화가 통하는 모던 걸 동림에게 끌렸고 변동림은 퇴폐적 우수에 가득 찬 이상의 음습한 분위기에 마음을 놓아버렸다. 그들의 만남을 제공한 낙랑파라, 그 다방의 주인이 이순석이니 그것만으로도 이순석은 우리의 일천한 문화사에 이름이 기억될만하다.

시청 앞 프라자 호텔에 있었던 낙랑파라,1930년대 에술인의 아지트


이순석은 다방을 유명 배우 김연실에게 물려주고 1939년부터 해방을 맞을 때까지 충정로에서 형의 사업을 돕는다. 많은 미술인들이 일제 강점기에 친일 논란에 휩싸인 반면 그에게 친일의 오점이 없는 것은 그가 이 시기에 작품 활동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이런 성격은 총독부가 의생(한의사)과 약종상 면허를 받으라 해도 일본이 주는 면허를 받지 않고 오직 실력만으로 어두운 시기를 헤쳐 간 형의 뚝심을 닮은 것이다. 그는 해방을 맞을 때까지 중림동 형의 사업장, 이명래 한의원에서 고약을 달이고 손님을 맞는 일을 도와준다.


이순석은 해방 이후, 우리나라에 불모지와 같았던 디자인과 공예 분야를 온몸으로 개척한다. 1946년 국립종합대학교 내 미술대학 안 구상(국대안)에 참여하여 서울대학교 예술대학 도안과 및 응용미술과 교수를 정년 때까지 했다. 1949년에는 개인전을 열어 진명여중 배지를 도안하고 신생국가인 대한민국의 입법, 사법, 행정부의 휘장 도안을 맡았다. 우리나라 최고의 훈장인 ‘무궁화 대훈장’도 그가 도안한 것이다. 1960년대 우리나라의 산업발전과 수출증대를 목적으로 개설한 디자인센터 설립도 그의 공이 크다. 물건을 만들 줄만 알았지 상품의 미적 요소를 가미할 줄 모르는 기업을 돕기 위한 대통령의 조처였다. 박정희 대통령이 그를 얼마나 신뢰하였는가 하면 상공회의소에 있던 전기로와 선반 절단기 등 기자재를 서울대의 미술대학 실습장에 제공하여 학생들이 마음껏 공예와 디자인을 실습하도록 도와주었다. 또한 금일봉을 하사하여 공예에 필요한 도자기로도 만들어 후진을 양성하도록 도왔다.

국회의사당 앞 해태상,하라 이순석의 작품이다


우리나라 공예와 디자인을 개척 한 사람. 이순석 선생. 그의 작품이 자그마치 3천 점이다. 그러고 보니 우리가 보고 지나치는 것들 가운데 그의 작품이 여럿이다. 대표적인 것이 1977년 완공한 국회의사당 앞의 해태상이다. 우리가 뉴스 시간에 매일 보는 국회의사당의 해태 아닌가. 당시 국회의사당 건립의 자문위원을 맡은 월탄 박종화(月灘 朴鍾和)선생님은 "의사당을 화재에서 예방하려면 해태상을 세워야 합니다. 전에 조선시대 경복궁이 화재로 전소된 뒤 복원 공사 때 해태상을 세워 이후 화재를 예방한 바 있습니다. 그러니 의사당에도 해태상을 세우는 게 좋을 듯합니다.“

해태상을 세우는데 당시의 예산 3천만 원은 ‘해태’를 회사의 심벌로 쓰고 있던 해태제과의 박병규 회장에게 협조 받았다. 이 돈으로 이순석이 작품을 완성했다.

그런데 해태상만 세워진 것이 아니다. 해태 기단 공사를 거의 마칠 무렵 해태제과 박 사장은 ‘좋은 날 술이 있어야 한다’며 해태에서 생산하는 국내최초의 ‘노블와인’이란 백포도주를 두 개의 해태상의 기단 아래 10m에 각각 36병씩 72병을 묻었다. 이것은 100년 후인 2075년에 우리나라의 민주 발전을 기념하며 마시기로 약속하며 묻은 것이다. 이 해태상을 디자인한 이순석 선생도 돌아가셨고 해태상을 만들기 위해 큰 돈을 희사한 해태제과의 박병규 회장도 돌아가신 지 오래이다. 이 술은 누가 마실 것인가?  이 글을 읽는 독자들께서 장수하셔서 시음해 보시기를..

이명래와 이순석, 두 형제는 우리나라의 의약과 예술분야에서 잊혀 질 수 없는 분들이다. 이제는 문화의 시대이다. 우리도 먹고 입고 사는 차원에서 한 차원 높여 이런 선배들의 노력과 스토리를 알고 전해야 할 때가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명래 한의원이 외형을 잃지 않은 것은 정말 다행스럽다. 언제 이 건물도 사라질지 모를 일이다. 음식점으로 변한 이 건물에 가서 이명래 선생이 만든 고약도 생각해 보고 이순석 선생의 업적도 기릴 일이다.

충정로역 1번 출구 사잇길로 가면 퓨전 음식점으로 변한 이 건물을 만날 수 있다.


https://www.d-art.co.kr/news/articleView.html?idxno=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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