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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일리아트 Jul 18. 2024

①- 이명래 고약과 공세리 성당

브랜드의 문화사


이명래고약을 아십니까?




[브랜드의 문화사 ① – 이명래고약과 공세리 성당]

1970년대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이름을 대라면 ‘영원한 대통령’ ‘박정희’일 것이다. 그다음 순서가 이명래고약의 ‘이명래’ 정도 될까? 1955년 12월 ‘이명래고약’을 상표로 출원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인명(人名) 상표’가 된 이후, 이명래는 어느 집에서나 부르는 이름이 되었다. 지금은 이명래라는 이름도 생소하고 고약(膏藥)도 ‘뭐하는 물건인고?’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1980년대까지만 해도 ‘이명래’는 사람 이름이기 전에 ‘국민의 상비약’이었다. 고약은 환부에 붙이는 모든 약을 이른다. 이명래 고약의 비법은 다른 살은 건드리지 않고 살 속의 고름만을 빼는 발근고(拔根膏)에 있다. 소나무 뿌리를 태워 나오는 기름(송탄유)에 오행초, 가래나무 등을 넣어 끓인 다음 졸인 후에 이것을 동그란 약제 덩어리로 만들면 된다. 기름이 칠해진 종이에 손가락 한 마디 크기의 고약 덩어리를 싼다. 사용할 때는 고약에 불을 붙여 녹인 다음 상처 부위에 기름종이와 함께 붙이면 며칠 뒤 누런 고름이 쏙 빠지고 상처가 아물게 된다.

 기름기 있는 음식을 먹지 못할 때는 피부에 종기가 참 많이 났다. 종기의 종류도 여러 가지이다. 목덜미 머리털이 난 가장자리에 생기는 것은 ‘발찌’라고 하고, 뾰족하게 부어오른 작은 부스럼은 ‘뾰루지’라고 한다. 여고생들의 얼굴에 솟아나는 ‘무허가 건물’ 여드름도 뾰루지이다. 그럼 부스럼은 무엇이냐? 부스럼은 종기의 순수 우리말이다. 종기가 뭐 대수냐 하면 큰일 난다. 조선시대의 성군 정조대왕도 사실은 종기로 사망 했다. 정월대보름에 부럼을 깨물며 한 해의 무사안일을 기원하는 옛 풍습도 종기를 피하게 해달라는 기원이었으니 얼마나 이 종기가 우리 조상들을 괴롭혔는지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명래고약이 생긴 뒤로 국민들은 종기에서 해방되었다.
 
‘브랜드의 문화사’ 첫 칼럼에 이명래 고약에 대해서 쓰는 이유는 데일리아트를 시작하는 첫 달에 독자들도 모두 건강한 한 해를 지내시라는 의미이다. 오늘 이명래 고약을 만든 이명래와 그의 동생 이순석에 대해 이야기 하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당




 충청남도에 내포(內浦) 지역에 아름다운 성당이 있다. 공세리 성당이다. 공세리는 충청지역 40개 고을의 조세미를 쌓아두던 마을이다. 이곳에는 세곡을 실어 나르기 위한 조운선이 수시로 드나들었다. 동네 사람들은 무사 항해를 기원하는 제당을 아산만이 훤히 내다보이는 공세창 언덕에 만들었다. 1895년 5월, 이 마을에 에밀 드비즈 신부(Emile Devise 成一論)가 주임으로 부임했다. 그는 1922년 폐허가 된 조세 창고와 제당 자리에 성당을 지었다. 적갈색의 연와조 벽돌을 구워 고딕으로 건물을 올렸다. 허물어진 공세창의 성벽 돌을 주워다가 성당을 두르고 팽나무와 느티나무를 심었다. 성당이 아름다운 것은 100년이 넘은 나무들이 아름다운 성당과 조화를 이루기 때문이다.
 
드비즈 신부는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는 방편으로 의술을 익혀, 마을 사람들의 종기를 치료했다. 생약 처방에 관한 서양 원서와 한방 의서를 놓고 씨름한 결과 조선 사람이 흔히 사용하던 고약형태의 약을 만들었다. 고약을 종기 난 부위에 붙이니 며칠 지나 감쪽같이 나았다.

 신부는 학교는 다니지 못했지만, 자신의 심부름을 잘해주는 영리하고 똘똘한 소년에게 고약 조제법과 의학 기술을 가르쳐주었다. 이 소년이 ‘이명래’이다. 이명래의 집안은 선대로부터 천주교를 받아들였다. 1890년생인 이명래는 명동에서 태어났지만, 그의 부친이 명동성당에서 만난 드비즈 신부를 따라 공세리로 이사했다. 신앙의 결단이었다. 신부에게 고약 제조법을 전수 받은 그는 1906년에는 스스로 약을 만들 수 있게 되어 아산에서 의원을 연다. 그는 자신감을 얻어 1920년 서울로 올라왔다. 아버지가 신앙을 따라 서울에서 공세리로 갔다면 꿈 많은 이 소년은 사업의 야망을 품고 서울에 진출한 것이다. 지금의 충정로역 종근당 사옥 부근이었다.




 
 한의원 시절의 풍경을 이명래의 막내딸 이용재는 회고한다. ‘매일 3, 4백 명의 환자들이 새벽부터 이곳에 몰려왔다. 그래서 번호표를 나눠주고 대기하게 한 다음에 진찰하고 고약을 팔았다’는 것이다. 앞마당에는 날마다 진풍경이 연출되는데 진찰을 기다리는 사람들 사이로 약재를 큰 가마에 넣고 고아서 고약을 제조하는 사람, 만들어진 고약 덩어리를 으깨서 기름종이에 늘어뜨리는 사람, 고약을 끓이는 아궁이에 불 때는 사람, 고약에 들어갈 재료를 조달하러 이리저리 뛰는 사람 등…많은 사람이 고약 집 앞마당에 넘쳐났다. 사업이 번창하는데 전쟁이 났다. 그러나 전쟁이 화근이었다. 피난가지 못하고 서울에 머물었는데 9.28 수복 때 아군이 쏘아대는 포탄이 둘째 사위 이광진의 집으로 떨어져 이광진을 제외한 둘째딸과 2남 2녀 외손자, 외손녀를 모두 잃었다. 한 술 더 떠 인민군들은 후퇴하며 이명래 한의원에 불을 질렀다. 이 때 사진과 제약에 필요한 자료들이 몽땅 소실 되었다. 이명래는 사위 이광진과 남은 가족을 추스러 평택 서정리로 피난을 갔다. 1952년 1월 7일, 전날 술을 마시고 돌아와 잠을 자다가 ‘피’‘피’외마디 소리와 함께 뇌출혈로 사망한다. 서울로 돌아온 사위 이광진은 폭격으로 잿더미가 된 <명래 한의원>을 재건한다. 가업을 이을 남자가 없어 사위가 총대를 멘 것이다. 보성전문 출신인 이광재는 장인 이 살아 있을 때 물려받은 비법을 토대로 충정로역 뒤편에서 고약을 계속 만들었다. 3대 계승자인 임재형은 경희대 한의대를 졸업하고 이광진의 뒤를 이었다. 사위들이 가업을 이어가는 색다른 구조였다. ‘이명래 한의원’은 고약 집의 이미지가 너무 강하여 돈이 되는 보약 손님은 거의 없었다. 그래서 수익구조를 맞추기 어려워 결국 2011년 영업을 중단했다. 지금도 외형은 이명래 한의원 당시의 모습 그대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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