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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일리아트 Jul 24. 2024

② 감정에 대하여 - 마크 로스코

[미술로 생의 철학 질문하기]

마크 로스코, 현대 추상표현미술의 대가로 평가받는 러시아 출신의 미국 화가
거대한 화폭에 단순한 사각형의 색면을 칠한 판화의 작품, 그러한 양식이 특징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감정'에 관련한 작품을 남겼다.  

[미술로 생의 철학 질문하기]  시리즈는  당대를 비롯하여 현재까지 미술계에 영향을 끼치며 회자되는 예술가를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각 편마다 예술가의 삶과 작품을 통해 철학적 질문을 던지며 고통, 행복, 불완전함 등 삶의 본질에 가까운 개념을  예술로 엮어 질문한다.

 


“이성이 인간을 만들어 낸다고 하면, 감정은 인간을 이끌어간다.” 


- 루소


Mark Rothko, Untitled, 1951


마크 로스코 Mark Rothko


아마 위 작품을 접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위 작품은 마크 로스코의 '무제(Untitled)'다.


2020년에 방영된 JTBC 인기 드라마 시리즈 <부부의 세계>에 사용되었다. 이 드라마에서는 여러 회차에서 마크 로스코의 작품을 출연시켰다. 그러나 마크 로스코의 작품이 '왜' 나왔는지까지는 꿰뚫기가 힘들다. 미디어에서 예술 작품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인물의 내면 및 상황의 이해도를 시각적으로 돕기 위함이다. 짧게 등장하는 마크 로스코의 작품은 무엇을 시사하는지 알기 어렵다. 그의 작품은 너무나도 단순해 보이고, 해석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간단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관객의 입장에서 간혹 예술의 진위성을 의심하게 된다. 전문성을 갖지 않고서도 그릴 수 있을 법한 여러 그림들을 보며, 그것이 작품으로 불리게 되는 경위에 의구심을 품고 하나의 질문을 던지게 된다.


"예술을 통해 무엇을 얻으려고 하는가?"


마크 로스코의 작품이, 그가 삶을 통해 직접 얻은 진실성이 조금이나마 그 질문의 해답이 될 수 있기를, 당신이 예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에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Mark Rothko, No. 6 (Violet, Green and Red), 1951


마르쿠스 로스코비츠 Marcus Rothkowitz


그의 작품은 시대적 배경이 중요하다고 평가받는다. 본인이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그의 작품 전체가 그의 생애 및 시대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1903년에 출생한 마크 로스코(Mark Rothko). 개명 전 이름은 마르쿠스 로스코비츠(Marcus Rothkowitz)로, 유대인 부모를 둔 러시아계 소년이었다.


그가 열 살이 되던 해, 부모를 따라 미국 오리건 주 포틀랜드로 이민을 가게 되면서 그의 미국 생활이 시작된다. 예일대학교에 장학생으로 입학해 심리학, 법률 등을 배웠으나, 재학 도중 장학금이 취소된 사건을 계기로 예일대와 미국 전체에 퍼져 있던 '엘리트주의적' 정서와 인종차별적인 학생들의 태도에 반감을 느끼게 된다.


이전까지 예술과 접전이 없던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예일대를 중퇴한다. 중퇴 직후 뉴욕의 아트 스튜던츠 리그로 전학해 해부학과 연극에 몰입했고, 그림을 그리게 된다. 그는 이때까지만 해도, 추상표현주의의 거장이 아니라 예술 부문에 있어 문외한이었다. 

 

Mark Rothko, Blue and grey, 1962


단순한 감상이 아닌, 감정의 순환으로


그는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서, 초월적인 세계에 관심을 갖게 된다.


미국 추상표현주의를 대표하는 클리포드 스틸(Clyfford Still) 과의 만남으로, 그는 그 작품의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는 '색면 회화'(Color-feild painting) 를 발전시키게 된다.


그가 이러한 색면 회화 작품만을 그렸던 것은 아니다. 그가 자신의 예술적 정체성을 미처 완성하지 못했을 당시에는 신실한 신앙심과 신화에 관한 설명을 모티브로 이루어진 '추상표현주의적 기법을 띄지 않는' 여러 작품을 그렸다. 그러나 그가 추구했던 예술의 궁극적인 이치는 묘사에 있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현재의 그의 명성이 존재하게 한 예술적 통찰이 시작되었다.


그는 예술은 즉 감정이라고 판단했고, 감정은 몰입에서 나온다고 결론내렸다. 또한 몰입에서 나온 감정은 소통을 통해 순환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견해를 기점으로, 그가 예술가로서 추구하는 방향성은 더욱 확고해졌다.


그는 다양한 인간의 감정들을 그림으로 담아내는 것에 초점을 두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모호하고 불분명한 경계선을 색면으로 채워진 커다란 캔버스에 표현하고 긍정과 부정, 그것을 넘어선 절망에 이르는 여러 감정들을 그려냈다. 그림을 감상하는 행위를 하는 것만으로 '함께' 느낄 수 있는 표현. 감정의 전달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현대 회화에 비판적인 시선을 갖고 있던 그는 묘사로 이루어진 재현적인 주제보다는 형태, 공간, 색채 등의 보다 본질적인 면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관객과의 진실된 소통을 원했던 그는 자신의 그림에서 선을 빼게 된다. 결국 그는 자신의 캔버스에 재현적인 요소를 모두 제거하고, 서서히 물감을 스며들게 하여 색면을 만들어 내는 자신만의 특별한 회화 양식을 발전시켰다. 색만 존재하는 그림을 그리게 된 것이다. 


그의 작품 대부분은 대표적 색채와 불분명한 경계선으로 이루어져 있다. '완전한 추상'을 추구하려 한 작품들은 거대한 캔버스를 수평과 수직만으로 기하학적으로 분할한 후 단색으로 화면을 칠하는 방식이었다. 형식적인 미술 양식과 구형적 이미지가 사라지고 다층의 색면, 구도가 등장하는 이른바 '다층 형상'의 시기는 마크 로스코의 작품 세계 안에서 오래토록 지속되며 발전해 나갔다. 


Mark Rothko, Untitled , 1951



 내 예술은 추상적이지 않다. 그것은 살아서 숨쉰다.


사실, 그의 작품을 이야기하는 과정에 있어 그의 생애나 인물에 관한 부가적인 설명은 필요하지 않다. 그는 보는 이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분명했고, 그것은 결국 '몰입, 소통, 감정'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 세계는 말년으로 향할수록 암울해졌다. 그에게는 음악, 철학, 역사, 종교 등의 수준 높은 인문학적 지식이 있었고, 추상표현주의의 중심으로 언급될 정도의 능력과 영향력이 있었지만 그의 끝은 비극으로 이어진다.


인간의 감정에 있어, 감정을 표현하는 방식에 있어 누구보다도 진솔했던 그의 최후가 자살로 이어진 항우울제 중독자라는 점에서 우리는 삶의 비관을 느끼게 된다. 


그는 죽기 전, '빨간색이 검정색을 삼키지 않길 바랄 뿐'이라고 말했다. 죽음이 삶을 삼키지 않는, 다채로운 감정을 가끔씩이나마 느낄 수 있는, 그런 삶을 바랐다. 그가 중요시 여겼던 철학 중 하나는, 예술 작품은 그리는 이뿐만 아니라 보는 이에게도 상상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 그가 언뜻 보기에 단순하고 간결해 보이는 예술로 향하게 된 것은 오로지 진실성에 근거한다.


그는 인간의 삶에 필요한 것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고, 근본적인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면 그것으로 인생이 끝난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가 인정보다 몰입을 중시하고, 이성보다 감정을 그려낸 근원적인 사고는 생존 욕구에서 나온다. 그가 타고났던 감정의 제어와 흡입력은 보는 이에게 하여금 느끼는 바가 '다른 것'이 진짜 예술임을 알린다.


확실한 것은, 그의 작품은 감상을 넘어 고뇌하게 만드는 부분이 있다. 그의 작품은 거대한 캔버스에 그려지고, 관람 환경 역시 텅 비어 있다고 생각될 정도로 큰 장소를 배경으로 한다. 그의 어록 중에는 "작품과 관람객 사이에는 아무것도 있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는 작품과 가까워지는 것이 예술 소통의 첫 단계로 여겼다. 그의 사후 여럿 작품전을 비롯해 국내에서 열린 마크 로스코 전시에서도 45cm 거리를 기준으로 작품을 전시해둔다. 


당연하게도, 감정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향해야 할 길을 가장 고통스럽게 보여준다. 감정을 가장 아름답고도 잔혹하게 감상한 마크 로스코의 작품은 가까이서 봐야 한다. 사실, '본다.'는 행위보다 '관찰'이라는 표현이, '관찰'보다는 '느낀다'라는 서술이 더 어울릴 것이다.


그는 개인이 겪는, 사회가 겪는, 불분명하고 경계가 나뉘지 않게 분포되어 있는 우리의 아픔과 즐거움, 환희. 감정의 모든 것인 희로애락(喜怒哀樂)을 구축한다. 자신이 보는 방식으로 세상을 보고, 느끼고, 즐기게 한다. 그의 작품을 사랑하는 입장에서, 그의 견해를 따라 평면적이지 '않은' 예술만이 진실되게 남을 것이라 믿는다. 





나는 추상주의 화가가 아니다.
나는 색채나 형태나 그밖의 다른 것들에 대해서는 조금도 관심없다.
나는 비극, 황홀경, 운명 같은 근복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데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로스코 예배당 (로크소 체플) 전경



https://www.d-art.co.kr/news/articleView.html?idxno=6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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