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문학자의 인문학 공간] 근원적 성찰이 필요한 시대

by 데일리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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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차드 롤랜드 홀스트의 파우스트 포스터, Goethe's Faust, 1918

괴테의 『파우스트』에는 중세의 인물 파우스트가 고대의 여성 헬레나와 시대를 넘어 만나 결합하는 장면이 나온다. “고전적-낭만적 환상”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들의 결합은 정신세계를 지향하는 낭만주의와 형식미를 추구하는 고전주의의 화해로 설명되기도 한다. ‘화해’나 ‘결합’이 말로는 바람직하고 쉬워 보이나, 양자가 ‘주의’나 ‘이념’, ‘이데올로기’가 되면 미학적 ‘입장’조차도 싸움이나 전쟁으로 발전하는 게 더 쉽고 흔한 게 현실이다. 어쨌든 파우스트는 헬레나와 결합하는 순간 이렇게 말한다.

'‘여기에 존재하는 것(Dasein)’은 의무다. 그것이 비록 순간일지라도.”

“여기에 존재하는 것”이라고 번역된 독일어 ‘다자인(Dasein)’은 Da와 Sein의 결합으로서, 하이데거(Martin Heidegger,1889-1976)는 이 개념을 ‘자기 존재’를 의식하는 인간의 독특한 ‘존재방식’으로 사용한다. 한국 철학계에서는 이것을 '현존재'라 번역하여 ‘현재의 존재’의 의미로 이해되는 경우가 많지만, 독일어 Da는 주로 여기(here)와 저기(there) 사이 어느 ‘위치’를 지시하는 용어로 쓰이며, 때로는 예를 들어 “이런 경우 (또는, 이런 상황에서는), 나는 당신을 도울 수 없다” 같은 문장에서 ‘이런 경우(상황에서)’의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영어로 Dasein은 there-being으로 번역되는데, 이것은 공간적 위치를 지시하는 개념은 될 수 있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같은 의미는 담지 못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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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야스퍼스 (우)하이데거 /출처:프레시안

Dasein을 하이데거와 함께 철학의 중심 개념으로 다룬 철학자는 야스퍼스(Karl Jaspers,1883-1969)다. 그에게 Dasein이라는 단어는 일단 “공간과 시간 내에서 특정한 어떤 것으로 등장하는 것”을 의미하며, 이런 의미에서 Dasein은 자아의 밖에(ex=out) 서있는(sietere=stand) 것, 즉 existence와 같은 것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existence의 동사 어원은 라틴어 ex(=out)와 sistere(=cause to stand), 즉 ‘외부에’와 ‘서 있게 되다’의 합성으로, 이것은 세계 내의 ‘객체적 현실’, 또는 세계-내(어느 곳)의-존재를 의미한다.

Dasein에 관련된 예의 의미들을 고려하면 ‘현존재’라는 시간적 함의를 시사하는 번역보다는, 일차적으로 공간적 지점을 지시하는 ‘위치존재’라는 번역이 ‘비교적’ 적절해 보인다. 결론만 말하자면, 한국에서 “현존재”로 번역되는 하이데거 철학의 핵심 개념 Dasein은 공간적, 정신적 상태를 포함하는 ‘위치존재’로, existence는 ‘현실존재’로 번역하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

그런데 야스퍼스는 인간의 존재와 관계된 위치존재(Dasein)를 ‘자아가 (자아 밖의) 자아를 의식하는 존재’의 의미로 사용한다. ‘위치존재’의 ‘위치’는 이제 자아 밖 객체적 존재에서 자아 내 주체로 옮겨오게 된다. 주체로서 작용하는 ‘위치 (의식적) 존재’는 “나는 여기에 있다(ich bin da)”를 의식하는 존재이며, “존재의 자기발견”을 수행하는 존재이다.

야스퍼스는 ‘존재의 자기 발견’을 자신과 신 앞에서 이루어지는 일로 이해하며, 이 단계의 ‘위치존재’를 특별히 ‘현실초월적 존재(existence)’로 규정한다.(야스퍼스, 진리에 대하여) 이로써 ‘existence’는 야스퍼스의 경우 위치존재(Dasein)의 높은 단계로서, ‘현실 존재’라는 원래의 의미와 달리, 또는 반대로 ‘현실을 초월하는 존재’라는 특별한 의미를 획득하게 된다.

위치존재(Dasein)와 현실존재(existence)가 원래 동일하게 ‘현실 객체로서의 존재’를 의미하지만, 특별히 ‘existence’가 ‘현실을 초월하는 존재’로 사용되는 이유는 접두어 ex가 out의 의미로서 ‘밖에’의 의미를 넘어, ‘벗어난’, ‘넘어선’, ‘극복한’, ‘초월한’의 의미로 확장되고 부가되어 사용되기 때문이다.

야스퍼스의 경우 ‘현실을 초월한’ 자기 발견은 신 앞에서 자신(의 생성)의 근원을 찾아 나가는 과정이며, 자아의 이 ‘근원’은 주체와 객체로 나누어지기 이전의 ‘하나’, 또는 ‘통일성’을 예감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하이데거의 경우에도 existence는 ‘존재의 자기 발견’, 또는 ‘자기를 발견하는 존재’라는 사건이 일어나는 과정으로 사용되지만, 신 앞에서의 초월적 자기발견을 의미하는 야스퍼스와 달리, ‘위치 의식적 존재(Dasein)’인 인간이 ‘현실을 벗어난(ex) 존재’로서 ‘시간 (역사)’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발견하는 과정이며, 그를 통해 신비적 미지의 영역을 포함한 자신의 무한한 가능성에 열린 태도를 갖는 상태를 말한다.

이제 ‘현실(초월적) 존재(existence)’와 ‘위치(의식적) 존재(Dasein)’의 이런 의미를 살려 파우스트가 헬레나와 결합하며 하는 말을 해석하면 이렇게 될 것이다. 낭만주의와 고전주의의 양 극이 결합된 “이런 상황 속 존재는 의무이다. 그것이 순간일 지라도”.

‘내가 여기에(이 상황에) 있다(ich bin da)’를 ‘의식하는 것’은, 그 상황의 ‘객체적 현실성’을 ‘벗어나’, ‘초월할’ (ex-(out-) 가능성이며, 이것은 야스퍼스 식으로는 ‘신 앞에 선’ 자신을 발견하고, 분리된 것들의 통일성에 이를 가능성이고, 하이데거 식으로는 시간 속, 역사 속에서 자신을 발견해, ‘자기 자신’으로서의 ‘존재를 획득’할 가능성이다. 그리고 이 가능성은 “비록 순간일 지라도” 의무이다.

그 상황을 의식하지 않은(못한) 채 그곳에 머물러 있다면? 물론, 그 모든 가능성은 실현되지 않는다. 이데올로기나 이념의 “진영”에 빠진 채로 현실적, 객체적 상황을 의식하고 인식하려는 노력 없이, 그 상황에 머물러 있다면? 싸움과 전쟁을 피하기 어렵다.

‘현실 초월적 존재’를 의미하는 existence와, 더불어 Dasein의 한국어 번역 문제는 매우 학문적인 것이기도 하지만, existence라는 용어가 워낙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지고 사용되는 개념이기에 학문적 논의의 장이 아닌 이런 자리에서 다시 한번 일종의 제안을 하려 한다. 이 용어들은 기존의 관행처럼 ‘실존’이나, ‘현존재’라고 번역하는 것보다, ‘현실(탈출과 극복, 초월적) 존재’와 ‘위치(탈출과 극복, 초월적)존재’로 번역하는 것이 적절하다. 그렇게 할 때 하이데거나 야스퍼스 철학을 더 정확한 이해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우리의 현실적 삶을 이해하고 극복하는 데에도 그 개념이 도움이 될 수 있다.

사회적 현실 속에 특정 사안에 대한 ‘입장’은 있을 수 있다. 때론 필요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그것에서 벗어나고 탈출하여 ‘자기 밖’의 ‘객체적 현실’로 의식하는 것은 더 필요한 일이다. 입장으로 인해 분리된 것의 근원을 찾아 나서고, 결국 ‘신 앞에서’, ‘시간과 역사 앞에서’ ‘통합된 자기 존재’를 발견하는 것은 인간에게 부여된 과제와 같은 것이다. 그것이 ‘위치(의식적) 존재’와 ‘현실(초월적) 존재’의 의미이고, 개념이며 이념이다.

우리는 어쩌면 ‘진영’에 갇혀, ‘진영의 포로’로서 현실을 보거나 의식하지 못한 채로 현실을 사는 것은 아닌가? ‘우리는 언제나 옳다’는 진영 내 나의 ‘위치존재’는, 그것이 객체적 의식의 대상이 되지 못하면 자신(들)의 악을 악으로 보지 못하게 한다. 사실에 대해, 악에 대해서가 아니라, ‘자기 진영이 아닌 것’에 (무의식적으로) 악의 도장을 찍는 행위만 반복할 수도 있다. 나아가 타 진영의 선마저 악으로 만들기에만 급급할 뿐이다. 자기(진영)의 ‘위치’와 ‘입장’을 ‘벗어나고’, ‘넘어서’ 자신의 위치, 입장을 객체로서 의식하고 성찰하지 못하는 상태의 행동은 반인간적, 반생명적 폭력일 수 있다.

직접적 이해관계에 있는 사람들에게 ‘위치를 의식하는 존재’, 자신을 객체로 관찰할 수 있는 존재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일반 시민들이라면, 상식을 중시하고 기대하는 사람들이라면 어려움을 느낄 이유가 없다. 진영을 벗어나는 것, 자신의 고유한 존재에 이르는 것, 쉽지 않을지 모르나, 불가능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행동이냐 성찰이냐? 모두 필요하다. 행동 없는 성찰은 무책임한 사변에 머무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찰 없는 행동은 반인륜적, 반생명적 폭력으로 상승할 수 있다. 폭력이 폭력을 전쟁이 전쟁의 악순환을 낳는다면, 남는 것은 모두의 멸망이다. 그러니 우리에게 더 필요한 것은 행동보다는 성찰, 상황에 대한 객관적 인식을 넘은, 그 근원에 대한 성찰이 아닌가? 특히 폭력적 언어와 배타적 자기주장, 행동의 과잉을 심각하게 우려하면서도, 자신이 그 상황의 도구로 쓰이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는, 또는 의식하려 하지 않는 이 역설의 시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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