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na Art] 판화로 나눈 먹빛의 대화

by 데일리아트

한중이 함께 그려낸 동시대의 미(美)

2025년 6월 3일, 허베이미술대학 북구캠퍼스 제2전시실은 판화 특유의 묵직한 기운과 고요한 긴장감으로 가득했다. 《묵운동휘(墨韵同辉)》('먹의 울림이 함께 빛난다'는 뜻) 전은 한국과 중국 작가 40여명이 한자리에 모여, 각자의 손끝에 깃든 시선과 감성을 나눈 국제 판화 교류의 현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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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막식 전경

이번 전시는 허베이미술대학, 한국현대판화협회, 성신여자대학교가 공동 주최하고, 양국 예술교육기관들이 협력하여 기획되었다. 단순한 기교의 과시나 기술적 비교를 넘어, 판화라는 매체가 동시대 작가들의 내면 풍경과 어떻게 호흡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생생한 장면들이 전시장을 채웠다.

참여한 한중 작가들의 작품은 정치적 서사나 이념적 메시지를 지양하고, 자연, 일상, 기억, 도시의 단면, 그리고 감각적 추상 등을 주제로 동시대적 감수성과 정서의 결을 드러냈다. 반복 가능한 인쇄라는 판화의 형식은 작품 화면 안에서 절제된 내면과 사유로 응축시킨다.

전시된 작품들은 회화적 감성과 조형적 실험이 공존하며, 은은한 색면과 여백, 반복되는 선의 조형미를 목판, 동판 실크스크린 등 다양한 매체 위에 펼쳐 전통적인 조형성과 현대적 해석이 균형을 이루는 방식으로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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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근, 소리치다

인상 깊었던 장면은 화면 중심에 서있는 수탉이 울부짖는 장면으로 묘사된 박영근 작가의 출품작 《소리치다》였다. 이 작품은 단숨에 눈길을 끌지만, 오래 바라볼수록 서서히 내면의 리듬이 드러나는 구조를 가진다.

수탉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숫자들은 단순한 시각적 장식이 아니라, 소리의 파장과 시간의 흐름을 은유하며, 화면 하단에 배치된 시계, 사과, 나선형 구조물은 단절된 이미지처럼 보이지만, 실은 하나의 감각적 내러티브로 연결된다. 이들은 각각 시간의 기억, 생명과 순환, 욕망과 이성의 층위를 상징하며, 정제된 화면 안에서 긴장감 있게 배치된다.

작품은 단순히 외침의 순간을 시각화 한 것이 아니라, 그 외침에 내재된 이유, 즉 '왜 외칠 수밖에 없었는가'라는 존재론적 질문을 시적으로 제시한다. 닭이라는 일상적 이미지 속에, 언어 이전의 감정, 억눌린 침묵, 혹은 정체성의 자각이 응축돼 있는 것이다.

작품은 그 자체로 동시대 판화가 지닌 표현의 확장성과 깊이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미지와 상징이 분절되어 있으면서도 유기적으로 이어진 이 작품은 단지 시각적 흥미를 넘어 사유의 가능성을 열어두며, 관람자로 하여금 긴 여운과 되묻기를 유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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뚜젠궈(杜建国), 역사적 기억: 아름다운 시골(历史记忆: 美丽乡村)

뚜젠궈(杜建国) 작가의 작품으로, 얼핏 보기엔 정적인 시골 건물의 외벽을 담은 듯하지만, 그 속에는 시간이 켜켜이 쌓인 기억과 공동체의 정서가 섬세하게 새겨져 있다.

반복되는 창문과 회색 별돌 패턴, 무채색의 화면 구성은 단조로움 속의 질서를 드러내며, 그 자체로 오랜 시간 동안 유지되어온 농촌 건축의 전형성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화면에 가까이 다가서면, 그 구조적 정적 안에 숨겨진 수많은 시간의 단서들이 서서히 드러난다.

벽면 아래에 붙은 붉은색 장식물은 중국 농촌에서 명절이나 혼례때 흔히 볼 수 있는 전통장식이며, 앉아 있는 사람들의 실루엣은 마치 기억의 음영처럼 배치되어 있다. 그들은 직접적으로 묘사되기보다는 잊히지 않는 장면의 흔적처럼, 조용히 벽면 속에 스며 있다.

이 인물들은 일상의 한 장면에서 가족 혹은 이웃들과 함께 모여 담소를 나누거나 휴식을 취하는 모습으로, 시골 공동체의 소박하고 따뜻한 정서를 불러일으킨다. 이를 통해 작가는 집단의 삶이 기억으로 존재하는 방식, 그리고 그것이 장소성과 결합된 감각임을 시각적으로 풀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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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민, 그린벨트

김제민 작가는 식물을 의인화하여 '녹색벨트'라는 제도적 개념을 경쾌하고 유머러스하게 풀어냈다. 중심에는 초록띠를 두른 식물 형상의 캐릭터가 마치 무술 동작을 하듯 역동적으로 포즈를 취하고 있으며, 화면 상단의 'GREEN BELT'와 아래 쪽의 한글 '으잇!'은 만화적 긴장감과 에너지를 더한다.

이 작품은 도시 개발과 환경 보전 사이의 경계를 시각화하며, 동시에 자연이 스스로를 지키고 있다는 상상력을 유머와 활력 속에 담아낸다. 식물이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능동적인 존재로 등장하는 이 장면은, 인간 주심의 시각에서 벗어난 새로운 시선을 제안한다.

작가는 목판화 특유의 거친 질감과 단순한 선묘, 절제된 색체 구성을 통해 강한 시각적 인상을 만들어내며, 관객으로 하여금 웃음과 동시에 생태적 사유를 이끌어 낸다. 이러한 유쾌한 형식을 통해 환경에 대한 질문을 재치 있게 던지는 동시대적 회화의 한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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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옌페이(刘艳飞), 돌아오시게(归来兮)

류옌페이(刘艳飞) 작가의 《돌아오시게(归来兮)》는 바다와 일상이 겹쳐진 어촌의 풍경 속에 시간과 기억이 교차하는 정서를 담아낸 작품이다. 화면 전경에 쌓인 부표와 밧줄, 멈춘 빈 수레, 그리고 스쿠터에 기대어 정면을 응시하는 남성의 모습은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순간이 맞물린 듯한 고요한 정서를 자아낸다.

이 작품은 단순한 풍경의 재현을 넘어, 전통적 노동의 상징물과 현대적 이동수단이 한 화면 안에서 자연스럽게 공존함으로써 농촌이 지닌 다층적 현실, 과거와 현재, 공동체와 개인, 정체성과 변화를 시각적으로 드러낸다.

‘돌아오시게’라는 제목은 단순한 귀향이 아니라, 기억과 감정이 불러내는 내면의 회귀를 암시한다. 이 작품은 떠나간 누군가에게, 혹은 자신에게 건네는 부드러운 부름이며, 공동체의 기억과 사적인 회상이 중첩된 풍경 속에서 관람자에게 잔잔한 여운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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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천, 함께

유동천 작가의 실크스크린 작품 《함께》는 화면 위를 자유롭게 흐르는 선 하나로 '연결된 존재들'의 의미를 시각화한 작품이다. 단순하지만 유기적인 곡선은 끝없이 이어지며, 결코 끊기지 않은 상태로 화면 속에 공간을 감싸고 흐른다. 이는 물리적 접촉이 아닌, 보이지 않는 정서적 유대를 상징하는 듯하다.

하늘과 대지를 나누는 수평적 배경 위에 얹힌 이 선은, 규칙을 따르지 않지만 스스로의 질서를 지니며 흐른다. 각각의 고리는 타인과 엉켜 있으면서도 독립적인 개체로 남아 있으며, 이는 현대 사회에서 함께 살아가는 존재들 간의 긴장과 균형을 은유한다.

작가는 절제된 색면과 리듬감 있는 선 구성만으로도 깊은 감정을 환기시키며 함께 있음의 복잡성과 따뜻함을 동시에 드러낸다. 결국, 단일한 선을 따라 관람자의 시선을 유도하며, 우리 모두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주는 시각적 시(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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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줸(马娟), 서로의 숨결처럼 연결된(息息相关)

마줸(马娟)작가의《서로의 숨결처럼 연결된(息息相关)》 은 현대적 기차역과 고속열차를 배경으로, 기린, 얼룩말, 코뿔소, 원숭이, 홍학 등 아프리카의 야생 동물들이 자유롭게 어우러져 있는 장면을 담고 있다. 열차 위와 하늘에도 동물과 새들이 자연스럽게 등장하며, 인간은 부재한 채 동물들이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점이 인상적이다.

이 기묘하고도 유쾌한 구성을 통해 작가는 인간 중심의 문명에 대한 전복적 상상, 그리고 자연과 인공, 야생과 도시가 사실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은유적으로 보여준다. 기차역은 이동과 귀환의 상징이자, 문명 속 본질로의 회귀를 상상하게 만드는 무대로 작동한다.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경계 없는 세계, 생명 간의 연결성, 그리고 서로의 숨결처럼 맞닿아 살아가는 존재들의 조화로운 공존을 따뜻하고 위트 있게 제안한다. 결국 이 작품은 “우리는 무엇과 연결되어 있는가?”라는 질문을 조용히 던지며, 관객에게 사유의 공간을 열어준다.

개막식에는 한국현대판화협회 회장이자 성신여자대학교 서양화과 교수로 재직 중인 박영근 교수, 추계예술대학교 임상혁 총장을 비롯한 추계예술대 관계자 다수가 참석했으며, 중국 측에서는 허베이미술대학 전중이(甄忠义) 총장을 중심으로 학교 관계자 및 허베이성 미술가협회, 판화예술위원회, 중국 여성화가협회, 한단학원, 청년미술가협회, 허베이전매학원 소속작가와 교수진이 대거 참석해 자리를 빛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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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막식 기념사진

이날 양국 인사들은 예술교육의 국제 교류와 향후 협력 가능성을 두고 깊이 있는 논의를 나누었으며, 단순히 전시를 넘어 판화라는 매체를 중심으로 한 교육적·예술적 소통의 장을 함께 경험했다.

전중이 총장은 환영사에서 "문화는 말보다 예술로 더 깊이 연결된다. 이번 전시는 바로 그 연결 방식이었다"고 강조했고, 박영근 교수 또한 "판화는 반복과 여백 속에 사유를 남기는 매체다. 지금 시대에는 그런 '사유의 틈'이 더욱 필요하다"는 말로 예술의 현재성과 확장 가능성에 대해 언급했다.

이번 전시는 단순히 작품을 나열하는데서 그치지 않고 판화라는 공통된 언어를 매개로 감각을 나누고, 시대를 공유하는 '실천의 장'이었다. 서로 다른 삶의 결이 작품안에 새겨졌고, 이질적인 감성이 겹치는 지점에서 조용한 울림이 피어났다. 작품 하나하나는 먹의 향기를 품은 목소리처럼, 시간과 감각의 결을 따라 관람객의 마음속에 잔잔한 여운을 남긴다.

'묵운동휘(墨韵同辉)'라는 전시 제목처럼, 이번 교류는 양국 예술계의 만남 그 자체가 하나의 울림 있는 풍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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