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작품 이야기 ④] 영원한 빛의 노래-넌지

by 데일리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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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면의 번개와 함께 살았다. 13살이라는 나이의 어린 소녀가 교회 수련회를 마치고 돌아오던 길. 야밤의 덜컹이는 봉고차 안. 소녀는 친구들과 선생님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인생 첫 대발작을 했고, 그 이후 현재까지도 머릿속에 번쩍이는 번개 구름을 지니고 있다. 병명은 뇌전증(간질) 이었다. 어린 나는 내 몸과 정신을 통제하지 못했던 경험에서 무력함을 느꼈고, 이를 나의 치부이자 비밀로 여기며 성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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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지, New learn-경계를 넘어#1(beyond the boundaries), 2022, Acrylic, collage on wood panel, 45.5x53cm

리모컨의 전원 버튼을 눌렀을 때, TV 속 화면이 찰나의 가로줄 흰빛을 내며 꺼지듯. 갑자기 찾아오는 섬광과 함께 의식이 점멸되는 경험은 내겐 곧 죽음과 같이 느껴졌다. 나의 정신과 생각을 잃게 될까 봐. 내 존재의 영역이, 나의 생명력이 TV가 꺼지듯 암흑으로 영영 사라질까 봐 두려웠고, 잠 못 드는 밤들이 늘어났다.

아기가 밤에 잠을 자지 못하고 울음을 터트리는 이유는, 자신이 눈을 감고 잠드는 것이 곧 죽음에 이르는 것이라 느끼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죽음에 대한 원초적 두려움에 저항하고자, 목청을 높여 어미를 찾는 것이다. 나는 밤이 두려운 아기의 마음에 깊이 공감한다. 훌쩍 커버려 성인이 되어도, 매일 맞이하는 나의 밤이 고요치 못할까 봐 두렵다. 불 꺼진 밤이 무섭고, 자아를 잃는 죽음의 경험이 또다시 찾아올까 늘 전전긍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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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지, 먼지행성과 용골자리 성운(Dusty planets and the Carina Nebulal), 2023, Mixed media on wood panel, 72.7x72.7cm

삶은 순간의 빛과 같다. 스위치가 켜지면 찬란히 타오르다 이내 소리 없이 꺼지는 전구처럼, 나의 존재 또한 그러할 터였다. 이 깨달음 이후 나는 주어진 전기 신호로 유한한 빛을 내는 전구에 동질감과 평안함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그 유한함 속에서도 영원한 노래가 울릴 수 있음을, 예술을 통해 표현하고 싶어졌다. 비록 나란 전구의 수명은 방대한 우주의 시간에 비하면 한없이 유약하고 짧으나, 나의 내면과 의식이 살아있는 동안은 이 영혼의 기록과 발자취를 그림으로 남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 우주상에 나라는 빛깔이 있었음을.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끝없는 섬광과 점멸을 느끼며, 자신의 필라멘트를 지키기 위해 노력한 별 먼지가 있었음을 작품으로 기록하는 것. 이 행위는 내 남은 삶의 목표이자 이유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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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지, Revolution No.12, 2023, Oil on canvas, 72.7x60.6cm

뇌전증이라는 병이 선사하는 예측 불가능한 전기 신호를 작품 세계의 벗으로 삼은 후로, 그것은 나만의 색감을 빚어내는 빛의 원천이 되었다. 머릿속의 전류 감각은 인간 뇌파의 움직임을 시각화하는 영감을 주었고, 나는 그 전기 신호가 그려내는 무형의 풍경 속으로 들어갔다. 그것은 단순히 뇌의 활동이 아니었다. 나의 의식이, 더 나아가 인간의 의식이 우주의 끝까지 닿을 수 있을까 하는 근원적인 물음이며, ‘살아있음’으로써 생명의 빛을 발산하는 우리 존재들이 얼마나 소중하고 찬란한 흔적이 되는지를 그림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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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지, 불친절한 편안함, 2029, Oil on canvas, 112.1x162.2cm

어둠이 짙게 깔린 밤하늘, 잠 못 드는 밤. 혹은 내면의 깊은 심연. 그곳에는 고통의 흔적이 남긴 번개 같은 섬광이 별이 되어 박혀 있었다. 뉴런의 복잡한 연결망은 희미하게 빛나며 우주의 은하수를 닮아갔다. 전구의 필라멘트가 뿜어내는 온기 어린 빛은 유한한 생명의 찬란함을, 그리고 그 빛이 부서져 흩어진 별 먼지들은 영원히 이어지는 존재의 순환을 노래했다. 나는 이 고요함 속에서 나의 존재가 얼마나 미세한지, 그러나 동시에 얼마나 거대한 우주와 연결되어 있는지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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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지, The Bagel of Sgr A*, 2025, Acrylic, oil on canvas, 100x100cm

내 그림 속에서 영구히 빛나는 빛들은, 번쩍이는 나의 삶이 세계에 던지는 수많은 질문들이자 그 질문 속에서 피어나는 깨달음이었다. 유한한 전구처럼 잠시 빛나다 사라질지라도, 그 영혼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 우주 본연의 에너지와 이어져 있었다. 하나의 별이 작렬하게 자신을 태우다 적색거성과 초신성을 지나 블랙홀이 되듯. 그 죽음을 통해 또다시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듯. 나의 고통과 유한함은 역설적으로 생명의 무한한 가치와 빛나는 아름다움을 증명한다. 나의 작업은 그렇게, 한 개인의 내면에서 시작된 미시적인 빛이 우주적 감각과 맞닿아 영원히 울려 퍼지는 노래를 시각화한 작품이다. 나의 뇌세포가 진정한 깨달음을 얻어, 우주의 끝에 닿는 그 순간까지. 이 빛나는 노래를 계속 그리며 기록할 것이다.

넌지 작가, 서초구립양재도서관 기획전시 '예술가의 서재' 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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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지 작가가 오는 7월 5일(토)부터 8월 28일(목)까지 서초구립양재도서관 전관에서 열리는 특별 기획전시 '예술가의 서재'의 세 번째 선정 작가로 시민들을 만난다. 이번 전시는 예술가와 그의 서재를 조명하며, 독서와 예술의 융복합적 경험을 선사할 예정이다.

'예술가의 서재'는 1년에 걸쳐 총 5명의 작가를 선정하여 그들의 작업 세계와 영감의 원천이 되는 서재를 깊이 있게 탐구하는 서초구립양재도서관의 연간 기획 전시다. 넌지 작가는 그중 세 번째 주자로 나서, 꿈과 우주를 다루는 깊은 철학적 사유가 담긴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선보인다. 특히 뇌전증과 불면증이라는 개인적인 고통을 통해 '빛'과 '생명', '의식'의 찬란한 가치를 발견해온 작가의 이야기는 시민들에게 깊은 공감과 위로를 전할 것으로 기대된다.

이번 양재도서관 전시는 넌지 작가에게도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예술 작품이 흔히 접하기 어려운 갤러리나 미술관의 틀을 벗어나, 일상 속 친근한 도서관 공간에서 시민들과 더욱 가까이 호흡하려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자신의 작품 세계에 깊은 영감을 준 책들을 직접 큐레이팅 했으며, 작가와 평론가, 사서가 넌지의 그림을 통해 엄선한 책들을 그림과 함께 만날 수 있다. 이를 통해 넌지 작가는 독서가 주는 사색의 깊이와 예술이 선사하는 영감의 확장성을 동시에 경험하게 하며, 시민들이 예술을 통해 삶의 다양한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여정을 제안한다.

이번 전시를 통해 시민 관람객들은 예술과 독서의 새로운 융합을 경험하고, 삶과 우주를 빛나는 시선으로 바라보는 넌지 작가만의 예술적 여정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작가소개

넌지(None Z) : 2015년 단국대학교 예술대학 회화과를 졸업했다. 인사아트프라자갤러리에서의 첫 개인전으로 데뷔하여, 이후 세종문화회관 세종미술관,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 관악문화재단 관악 아트홀, 홍익대학교현대미술관, 오스트리아 비엔나 클림트 빌라 아뜰리에, 센프란시스코 BlueStream Gallery 등 다수의 국내외 주요 기관 전시에 참여했다.

주요 작품 소장처로는 서울특별시청 문화본부박물관, 한국뇌전증협회 등이 있다. 넌지 작가가 작품 전반에 걸쳐 항상 전달하려고 하는 뚜렷한 주제는 개인의 고통과 내면의 혼돈 속에서도 생명의 찬란함과 우주적 조화를 발견하는 희망적 메시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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