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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일리아트 Jul 24. 2024

홍승일 작가 (2)

[화가의 아뜰리에]

서울예고 김흥수, 김병기, 김창열, 정상화로 이어지는 화려한 계보
김창열 선생이 담뱃갑을 눈감아 줘 화가 이두식 퇴학 면해
윤영석 가천대 교수, 강애란 이대 교수, 이웅배 국민대 교수 등 같은 시기에 서울예고 다녀

지난 5월 20일자에 [화가의 아뜰리에] 홍승일작가 1편에 이어 홍승일작가 2편을 게재합니다. [화가의 아뜰리에는] 화가가 작업하고 있는 현장을 찾아가 화가의 삶과 작품에 대해서 인터뷰하는 형식입니다.  -편집자 주


- 홍익대학교 다닐때의 에피소드나 학창시절 했던 작업에 대해 부탁드린다.


참으로 열심히 학생 시절을 보낸 것 같다. 미술을 전공했기 때문에 학교에서 크고 작은 전시회가 많았다. 어떤 작품을 출품할지 교수님과 상의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교수님들은 우리가 열심히 그려 출품하려는 작품을 보다가, 망친 그림이나 빽칠만 하고 더 그리려고 한 쪽애 처박아둔 것을 보고는 '이게 좋으니 이거 내라'는 식이었다. '하이퍼리얼리즘'(극사실주의)이나 '모노크롬'(단색화)이 대세를 이루던 시기의 일화이다.

고향 포천 이동에서 여동생과 함께, 7살 때의 모습이다.

우리는 그때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했는데, 절제와 구도자적인 태도보다는 '표현의 가능성'과 '물성이 표현 매체로 드러나는 작업을 중시했다우리가 결성한 '메타복스'는 홍대 출신이 만든 그룹이고, '난지도'라는 그룹은 타 대학 출신과 홍대 출신 동년배들이 만든 그룹이었다초창기에는 메타복스가 관심을 받았다. 88 올림픽 때 정부는 과천 미술관에 '50명 초대 작가한국 현대미술 특별전시를 기획했다그 가운데 젊은 작가들은 난지도와 메타복스 멤버들이었다나중에 미술계의 반발로 처음 선발된 50명 외에 몇 백 명의 인원으로 늘기는 했지만.

메타복스 시절 멤버들과..

그러나 우리들 메타복스의 활동이 주요 미술 매체에 언급이 안 되었다그 때 미술계에서 영향력을 행사한 <월간미술>의 관계자들이 메타복스보다는 민중미술을 선호하는 편집진들이라 우리들 활동은 외면하고 민중미술 쪽으로 쏠렸다아마 당시의 민중 민주 진영의 영향이었을 것이다그 때 일본의 기자가 우리들 활동을 일본 미술 수첩에 소개하기도 했으나정작 우리의 활동이 국내에서는 조명을 받지 못했다그때 내가 한 작업은 홍대 캠퍼스에서 나무의 가지치기를 할 때 주운 가지와 건축 중인 홍대의 건축 폐자재와 마대를 이용한 작업이었다그런 걸로 작업을 했고김찬동 선배는 한지로 작업했다한지를 오브제에 붙였다가 그것을 떼어내서 껍질만 남는 모양을 작품화 했다오상길 선배는 광목천으로 한복 저고리 형태를 꼴라쥬 처럼 붙이는 작업을 했다.


처음에는 깨끗한 판넬이 거푸집으로 이용되면서 너덜너덜해지는 폐자재의 표정들이 나에게는 흥미가 있었다그것이 내 마음에 많은 영감과 공감적인 요소로 다가왔다군 복무 후복학하고 나서부터 3, 4학년 때는 자신만의 작업을 해야 했다그때부터 대상을 그리는 것보다는 물성을 이용해서 표현하는 것에 관심이 생겼다그리고 오브제적인 표현에 대한 관심이 메타복스 운동을 하면서 심화되었다.


나중에는 공사판 판넬을 이어 붙이는 큰 스케일의 작품을 했다메타복스가 해체된 이유는 선배들의 그룹 활동이 본질을 벗어나 계보가 되는 것에 비판적인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더 이상 우리의 메타복스가 활동의 의미가 없을 때는 그룹을 해체하자고 시작부터 생각했다그래서 네 번의 메타복스전을 끝으로 그룹을 해체하였다한 가지 아쉬운 점은 미술계 주류와 언론에서 관심을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모더니즘과 당시 유행했던 민중미술 양쪽에서 모두 왕따 당하는 분위기였다.

1979년 홍대 2학년 재학 시절


- 서울예고에서 오랫동안 근무하셨는데 학교 얘기 좀 부탁한다.


서울예고에서 재직 기간 중 이론수업을 도맡아서 했다. 선생 입장에서 실기 수업은 편하지만, 이론 수업은 수업 준비, 수행평가, 시험 문제를 내고 채점해야 하는 잡일이 많았다. 그러나 나는 일종의 사명감으로 미술 이론 수업 시간에 동기 부여가 될 만한 작가를 학생들에게 소개하고, 작품을 분석하는 방법들을 가르쳐서 학생들의 안목을 키웠다. 그것이 큰 보람으로 남는다.


서울예고는 1953년 휴전 후 설립되었다. 이화재단, 감리교 선교사들이 이화학당을 세우고 우리나라의 예술 교육기관이 필요하다고 해서 부산 피난 시절에 설립된 학교이다. 휴전 이후에 서울 정동으로 올라왔다. 처음에는 이화여고안에 따로 학교가 있다가 이화여고 건너편, 지금의 예원학교 자리, 그때는 예원이 없었으니까 그 자리에 서을예고가 생겼다. 음악과 미술로만 시작했다가 무용은 좀 더 지난 후 설립됐다. 음악은 임원식 선생님이 교장을 하게 된다. 신봉조 이사장님이 교장을 하시다가 임원식 선생님이 맡게 되었을 것이다. 미술과는 하모니즘으로 알려진 김흥수 화백이 만들었다. 음악과는 임원식, 미술과는 김흥수 화백이 만들고 그분이 1년정도 계시다가 외국 비엔날레에 나갔다가 안 들어오시고, 그 이후로는 105세로 돌아가신 김병기 선생님이 맡으셨다. 이중섭과 친구이고 평양 분들이셨다. 김병기 선생님의 아버님도 유명한 김찬영 선생이다. 김병기 선생은 미술 이론가였다. 당시의 화가들은 그림만 그렸는데 그분은 그림과 이론에 정통했다. 수준이 높았다. 김병기 선생이 10년정도 미술과 학생들을 지도하며 미술과의 기틀을 잡으셨다. 그 때 지도했던 학생들 가운데 임충섭, 이봉열, 김경인, 최욱경, 석란희 선배님 등이 있다. 김병기 선생님도 비엔날레 참여 작가로 나가셔서 안 들어오시고 미국에서 50년정도 계시다가 귀국하셔서 몇 년전에 돌아가셨다.

그 후임으로 오신 분이 물방울화가 김창열 선생님이시다. 서양화 이두식, 동양화 오용길, 조각은 박충흠 선배님이 서울예고 선배님들이신데 나중에 오용길, 이두식 선생님은 서울예고 교사를 하셨고, 김창열선생님이 이분들을 지도하셨다.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이두식 선생이 예고 학생 시절 담배를 가지고 있었다. 갑자기 선생님들이 남학생들을 불러놓고 소지품 검사를 했다. 당시에는 걸리면 퇴학당하는 분위기였다. 선배들도 흡연으로 중도하차한 사람이 많았다. 이두식 선생은 영주에서 올라오셨는데 이제 영락없이 고향으로 가야 되는구나 하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김창열 선생님이 몸을 더듬다가 가슴 위 주머니에서 담배가 만져졌으나 그냥 모른 척 눈감아주셨다. 아마도 제자의 재능을 알아보고 봐주었을 것이다. 그때 김창열 선생님이 아니었으면 자기의 미술 인생은 끝났을 것이라고 회고하신 바 있다. 그때는 그런 낭만이 있었다.

2011년 빛을 향하여, 패널에 혼합 재료

김창열 선생님도 몆 년 예고에서 가르치다가 비엔날레 나갔다가 안 들어오시고후임으로 오신 단색화 화가 정상화 선생님도 외국에 나가 비엔날레 갔다가 안 들어 오셨다그 후에는 서양화 하동철조각의 전준 선생님이 오셔서 지도하셨다나는 전준 선생님오용길 선생님이두식  선생님박영성 선생님에게 배웠다. 2학년 때 형진식 선생님이 부임하셨다형진식 선생님은 아방가르드적인 난해한 작업을 하셨던 것이 인상적이었다박영성 선생님은 미술과장으로 대통령상까지 받은 분이시고 이화재단에서 모셔온 분이셨다. 나는 그분들에게 훌륭한 지도를 받았다고 생각한다.


나는 남자중학교를 나왔는데 그 당시 거의 모든 중학교에서는 몽둥이로 학생들을 지도하는 분위기였는데예고는 전혀 그런 분위기가 아니었다교복도 검정색 신사복과 검정 넥타이를 했고머리도 일반 학생들보다 약간 길었다남학생과 여학생이 같이 수업을 했다한반 64명중에 남자가14명이고내가 3학년 때 1학년 미술과는 남자가 5명뿐이었다여학생 일색이었다해외 공연을 위해 특별히 머리를 기르는 것을 허용한 음악과 남학생도 있었다.

예고 2학년때(1976년) 이두식,형진식,박영성 선생님과 함께. 왼쪽 앞 첫번째 학생이 이화여대 강애란 교수이다.

같이 공부했던 사람 중에 1년 선배 윤영석 선배님이 있었다지금은 가천대 조소과 교수가 되었다당시에는 무서운 선배였다지금과는 분위기가 전혀 다르다동기로는 임영선이 있는데 가천대 교수이다. 2년 선배로는 지금 제주도에서 활동하는 이명복 선배님이 있었다후배로는 이대 서양화과 강애란 교수가 1년 후배이다. 국민대 이웅배 교수도 1년 후배이다.

생의 순환 π, 420cm x 230cm, mixed media, 2024 (1)


- 화업 50년 이상 중에 별다른 사람이 다 있었을 것이다아쉬운 분이나 안타깝게 생각되는 분들 이야기를 해 달라.


우리가 홍대 다닐 때 박서보하종현최명영서승원 선생님들이 계셨다지석철주태석  두분이 조교이셨다우리는 80년대 새로운 미술 운동의 신 세대로 등장했다이 운동을 주도한 그룹이 대학원에서 홍대 성격의 메타복스이고, 타 대학 출신과 홍대출신이 홍대대학원 다니며 결성한 난지도 그룹도 우리와 비슷한 성격이다우리는 민중 미술에 비해 널리 알려지지는 못했다그러나 80년대 미술 운동은 재조명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난지도 작가로서 주목 받은 사람들이 윤명재신영성조성모 등이다윤명재는 78학번 동기이고조성모는 다른 대학에서 다른 전공을 하다가 온 것 같은데, 그런데 두 사람윤명재조성모는 잊혀진 작가가 되었다전화번호도 모르고현재까지 이후로 활동 소식을 못 들었다조성모는 한지에 나무껍질이나 천을 붙여서 평평하고 평면적인 릴리프 같은 고정된 사각 틀이 아니고 옛날 문자 도형 같은 바탕에다 오브제를 붙여 당시 파격적인 작품이었다윤명재는 사과 궤짝 같은 나무에다 먹물을 칠해서 커다란 설치 작업을 했던 친구들인데 연락이 두절되어 안타깝다.



- 앞으로의 게획에 대해서 말씀해 달라현재 삶에 만족하는지앞으로의 작품은 어떤 것을 하고 싶은지?


나는 예고에서 학생들 실기를 가르치는 강사보다 전임교사를 하면 작업을 할 수 있는 여유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그런데 막상 해 보니 그렇게 되지 않더라서울예고가 할 일이 많은 학교이다퇴임 이후에 드는 생각이 좀 더 일찍 작업실에서 집중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다지금 경제적으로는 어려워졌지만 작업에 전념할 수 있어서 좋다하루 일과는 보통 새벽 2시나 3시에 취침을 하고 오전 9시부터 기상을 해서 마음껏 작업을 한다외출을 거의 하지 않는다어쩌다 집에 갈 때는 반찬을 가져오거나 잠을 자고 오기도 하는데 거의 작업실에서 생활을 한다. 4월 개인전 이후에 특별한 일정은 없지만 꾸준하게 작품을 모색하려고 한다.


1996년 죽은 갯벌과 황폐한 영혼


- 그림을 시작하는 학생들에게 한마디 당부를 한다면.

처음에는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해서 전공을 시작하지만 내가 경험한 바로는, 결국 제일 중요한 기본에 집중하라고 말하고 싶다작가의 소양을 갖추는 것에 집중하고작가가 되기 위한 통찰력집중력끈기유연한 사고 같은 소양이 정말 필요한데, 그것을 자기 체질로 만들어 놓으면 작가로서 꾸준하게 작업을 지속해 나가는 원동력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올바른 미술 감상법에 대해서 한 말씀 해 달라.


음악도 듣다보면 마음에 와 닿는 음악이 있지 않나그림도 마찬가지이다그림을 보다 보면 끌리는 작품이 있다그림이 좋다고 생각만 하고 그냥 넘어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그런데 그렇게 하기보다는 왜 이것이 나에게 좋은가를 찬찬히 찾아보고 분석하고 생각해 봐야 한다그 이유를 곰곰이 찾다 보면 그게 왜 나에게 끌리는지 깨닫게 되는 순간이 온다그 과정이 시간이 다소 걸릴 수 있다천천히 그림을 보고 생각해라그러다 보면 왜 이 그림이 나에게 좋은지 이유를 알게 된다그런데 그것은 한 번에 잘 안보인다색채 관계나 구도비율 등의 요소 속에서 왜 내가 저 그림을 좋아하는지 알게 된다뭔지 모르지만 다른 작품보다 더 끌리는 작품은 이유와 원인이 있을 것이다그 깨달아지는 요소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그림 앞에서 찬찬히 묵상하듯이 봐야 한다그러면 나와의 관계성을 알게 된다그것은 자기가 살아 왔던 삶의 관계성에서 이해될 수도 있을 것이다그림이나 입체 설치 같은 작품도 마찬가지이다영화를 보더라도 감동 때문에 여러 번 보게 되는데, 한 번, 두 번, 세 번 보다 보면 그 작품을 이해하게 되고 분석하면서 아, 이 요소 때문에 내게 좋았구나 생각하지 않나그 순간이 작가와 작품을 이해하는 만남의 순간이다자연적으로 끌리는 작품을 보다가 끌리는 작품을 감각적으로 찾고이 그림이 이런 요소 때문에 나에게 좋은 작품으로 다가 오는구나 하면서 작가와 작품을 이해하는 순간이다작가가 어떤 특별한 답을 정해 놓은 것이 아니다작가는 자신의 생각을 작품에 표현할 뿐이고 감상은 자신이 주체가 되어서 하는 것이다유행하는 음악이 어필하는 요인이 있듯이 작품도 그런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누가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니 자주 전시장에 가서 그림을 보면 끌리는 작품을 마주하게 되고 그 이유를 찾아 작가와 나를 연결하는 것그것이 가장 올바른 작품 감상법이다.

작품 앞에서 필자


- 마지막으로 데일리 아트에 바라는 점을 부탁드리며 긴 시간동안 인터뷰에 응해 주셔서 감사를 드린다,


이번에 한이수 대표를 통해서 이 매체를 알게 되었다요즘은 미술계의 재미있는 비하인드 스토리나 이런 것에 관심이 많다데일리 아트는 다양한 미술 관련 정보를 제공해 줄 수 있는 유연하고 발 빠른 매체라고 생각한다이런 매체가 발전해야 우리나라 예술계가 발전한다고 생각한다.



https://www.d-art.co.kr/news/articleView.html?idxno=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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