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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일리아트 Jul 24. 2024

예술사의 현장을 찾아서 : 박수근 ④

[길 위의 미술관]

명동에 있는 박수근의 흔적
미군PX와 반도호텔

두꺼운 화강암 질감으로 마띠에르를 구성하는 미석화법을 창안하고, 휴머니티 흠뻑 밴 서민의 그림을 완성한 곳이 창신동이라면, 명동은 그의 예술 꽃이 활짝 피는 기반을 만들어 준 곳이다. 그 때문에 명동을 떠나 화가 박수근을 이야기할 수 없다. 특히 미쓰코시백화점과 반도호텔 1층 로비에 있던 반도화랑은 그의 예술을 파악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포인트이다.

혼마치 입구,좌측 건물이 경성우편국(현 중앙우제국 자리)

일제강점기 금융과 유통의 중심지 경성부의 명치정(明治町)은 메이지 천황(明治天皇)의 이름을 붙인 곳으로 동경의 긴자(銀座)같은 곳이다. 긴자 거리를 어슬렁거리며 다니는 젊은 친구들을 '긴부라'라고 불렀다면, 명동의 본정(本町, 혼마치,현재 충무로)거리를 활보하는 경성의 '모뽀모걸'(모던뽀이 모던걸)들은 '혼부라'라고 불렀다. 화려한 네온이 밝혀진 거리를 혼부라들은 건들거리며 다녔다. 지금의 명동 모습과 큰 차이는 없었을 것이다. 이곳은 유통의 중심지일 뿐 아니라 금융의 중심지였다. 미국의 월스트리트와 같은 곳이라고 하면 될까? 만일 타임머신을 타고 일제 강점기의 명동을 간다면, 높은 마천루가 즐비한 고층의 모습은 볼 수 없겠지만, 생각 이상으로 번화한 모습에 놀랄 것이다.

조선은행앞 광장, 일제강점기 문화의 중심지였다.

조선은행(현 한국은행 화폐백물관)에서 종로의 보신각으로 연결되는 '남대문로'는 북촌과 남촌을 이어주는 중심축이었다.조선인들이 많이 모여 사는 북촌의 중심지 종각에서 남대문로를 따라 연결되는 반대편에는 조선은행이 있었다. 조선은행 앞 광장(조선은행 앞 광장을 줄여 '선은광장'이라 부르고 일본어로 '센긴마에 히로바'라고 불렀다.)을 통과하는 전차는 '선은광장'을 지날 때 특별한 의식을 해야 했다. 미쓰코시백화점 뒤로 펼쳐지는 조선신궁을 향해 전차 차장은 '민나상 모꾸또 구다사이'(모두 일어나 목례하여주세요) 하며 참배를 강요했다.

남대문로와 남촌에서 내려오는 교차점에 위치한 미쓰코시백화점. 우리의 문단사에서 이단아라 부르는 시인 이상도 미쓰코시백화점 옥상에 서 있었다. 자신의 옆구리에서 막 돋아날 것 같은 '날개'를 어쩔 줄 몰라하며 경성의 텅 빈 하늘을 비상하려 했다.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꾸나, 한번만 더 날자꾸나!"

아무리 몸부림치려 해도 날 수 없었던 일제 강점기의 이상이 죽고 20년 가까이 흘렀다. 이상이 날려고 했던 미쓰코시백화점, '아래층 서쪽으로 삼분의 일쯤' 한국물산점에 화가 박수근이 앉아 있다. 박수근은 이곳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같은 건물인데 이름이 바뀌었다. 미쓰코시백화점도 아니고, 해방 후에 잠깐 존재한 동화백화점도 아니다. 미8군 PX이다. 이곳에서 그린 박수근의 그림에는 그의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우리나라 서민의 모습이 안 보인다. 다 하나같이 코가 크고 눈이 파란 코쟁이들이다.

초상화를 그리고 있는 박수근(좌에서 세번째) 출처;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전시회

남의 나라 이념 전쟁에 동원된 미군들, 그들은 짬을 내어 가족과 애인에게 줄 선물을 마련하러 이곳에 들렸다. 남의 나라 전쟁통에 언제 죽을 줄도 모르는 운명이지만, 사랑하는 가족과 애인의 모습을 스카프와 손수건에 남기려 했다. 아마도 이 스카프나 손수건이 자신들이 보내는 마지막 선물이 아니기를 바라면서... 여러 환쟁이들이 묵묵히 앉아 그림을 그린다. 극장의 간판이나 이발소 그림을 그리던 사람들이다. 지나가는 미군들을 열심히 불러 모으는 속칭 삐끼가 있다. 앳된 처녀 박완서. 박수근은 자신을 다른 환쟁이처럼 취급하지 말라며 아무 말 없이 자기가 입선한 조선미술전람회 도록을 박완서에게 건네준다. 이들의 이야기는 1970년 출간된 박완서의《나목》에 '옥희도'와 '이경'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그림을 빨리 그리라고 닦달하고, 사진과 닮게 그리라고 갈구었던 박완서. 과묵한 화가 박수근. '나는 환쟁이가 아니라고, 그래도 조선미술전람회에 수상한 경력을 가진 정식 화가라고...'

소설 속 옥희도와 이경으로 만난 두 사람은 일이 끝나고 명동 거리를 활보하며 데이트를 즐긴다. 나중에 박완서는 소설이 실화가 아니라고 잡아떼었지만, 실화면 어떻고 아니면 어떠랴. 후일 우리나라 최고의 소설가와 국민화가로 등극한 두 사람이 젊은 시절, 전쟁으로 폐허가 된 서울의 거리를 누비는 스토리. 우리의 예술사에서 이토록 아름답고 빛나는 시기가 있었던가. 박수근이 1965년 5월 6일 타계하자 아내 김복순 여사는 그해 10월 6일에서 10일까지 중앙공보관에서 유작전을 열었다. 유작전을 보고 난 후 박완서는 자신의 소설《나목》후기에 이렇게 썼다.

박완서의 소설집 표지

"미치고 환장하지 않으면 견뎌낼 수 없었던 1·4후퇴 후의 암담한 불안의 시기를 텅 빈 최전방 도시인 서울에서 미치지도, 환장하지도, 술에 취하지도 않고, 화필도 놓지 않고, 가족 부양도 포기하지 않고 어떻게 살았나. 생각하기 따라서는 지극히 예술가답지 않은 한 예술가의 삶의 모습을 증언하고 싶은 생각을 단념할 수는 없었다." 박완서는 이 이야기로 여성동아 신춘문예에 당선되었다. 결국 박수근과의 만남으로 소설을 써보겠다고 생각했고, 그것이 박완서라는 대작가를 잉태하게 했다. 소설가 박완서의 시작이 화가 박수근이라고 하면 어폐일까. 두 사람은 같은 박 씨이다. 혹시 먼 친척인가? 박완서는 반남 박씨, 박수근은 밀양 박씨이다. 박수근은 1914년생, 박완서는 1931년생, 나이 차는 17살이다.

"S 화랑은 3층이었다....나무 옆을 두 여인이, 아이를 업은 한 여인은 서성대고 짐을 인 한 여인은 총총히 지나가고 있었다. 내가 지난날 어두운 단칸방에서 본 한발 속의 고목, 그러나 지금은 나에겐 웬일인지 그게 고목이 아니라 나목이었다. 그것은 비슷하면서도 아주 달랐다. 김장철 소스리 바람에 떠는 나목, 이제 막 마지막 낙엽을 끝낸 김장철 나목이기에 봄은 아직 멀건만 그의 수심엔 봄에의 향기가 애달프도록 절실하다. 그러나 보채지 않고 늠름하게, 여러 가지들이 빈틈없이 완전한 조화를 이룬 채 서 있는 나목, 그 옆을 지나는 춥디 추운 김장철 여인들, 여인들의 눈앞에 겨울이 있고, 나목에겐 아직 멀지만 봄에의 믿음이 있다. 봄에의 믿음, 나목을 저리도 의연하게 함이 바로 봄에의 믿음이리라. 나는 홀연히 옥희도 씨가 바로 저 나목이었음을 안다. 그가 불우했던 시절, 온 민족이 암담했던 시절, 그 시절을 그는 바로 저 김장철의 나목처럼 살았음을 나는 알고 있다. 나는 또한 내가 그 나목 길을 잠깐 스쳐 간 여인이었을 뿐임을, 부질없이 피곤한 심신을 달랠 녹음을 기다리며 그 옆을 서성댈 철없는 여인이었음을 뿐임을 깨닫는다." (박완서,《나목》, 세계사, 376쪽)

고목인 줄 알았는데 실은 나목이었다. 나목을 쓴 소설가 박완서는 이 소설로 우리의 문단사에서 누구도 넘을 수 없는 거목이 되었다.

반도호텔 브로슈어

명동에는 박수근의 체취가 많이도 묻어 있다. 지금은 롯데호텔로 바뀌어 아무런 흔적도 없는 반도호텔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 1936년 문을 연 이 호텔의 소유자는 노구치 시타가우(1873~1944)이다. 그는 일본 재계 서열 10위 안에 드는 '사업왕'으로 불린다. 수풍수력발전소를 건립하고 함흥에서 기반을 닦아 돈을 벌었다. 그는 경성에서 일을 보고, 당시로서는 조선 최고의 호텔 '조선호텔'에 작업복 차림으로 갔다가 쫓겨났다. 안내 데스크에서 '당신같이 허름한 옷차림을 한 사람은 이런 호텔에 들어올 수 없다'는 냉대를 받았다. 이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아 반도호텔을 지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처음에는 '신 조선호텔'로 이름을 붙이려했다. '조선호텔'의 반대가 심했다. 그러면 우리 조선호텔은 '구 조선호텔'이라는 것이냐? 그래서 이름을 '반도호텔'이라 했다. 왜 이름이 '반도'일까? 일본은 본국을 '내지'라 불렀고, 조선을 대륙 끝에 붙어있는 반도(peninsula)라 했다. 반도인 조선에서 최고라는 뜻이다. 조선호텔에서 반도호텔을 가로지르는 '반도조선 아케이드'가 1977년까지 있었다.

반도조선아케이트 신문광고

반도호텔은 해방과 6·25이후에 초토화되었지만, 다시 복구를 해서 전쟁 이후에는 외국인 전용호텔로 쓰였다. 이 호텔에는 한국 주재 상사원이나 문정관 부인들이 주로 묵었다. 1956년 이 호텔 커피숍 한 켠에 이승만 대통령의 영부인 프란체스카의 협조로 반도호텔 상설미술전시장이 열리고, 이를 계승해서 아시아재단이 인계하여 1958년 '반도화랑'이 개설되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상업화랑이다. 넓지 않은 벽면 사정으로 6평반 크기의 ㄴ자형 구조에 10호 미만의 동서양화 30~40점 정도가 걸렸지만 박수근에게는 유일한 그림 판매처이자 가족에게는 생계의 근원이었다.

나중에 반도화랑의 관장이 된 화가 이대원은 "박 형(박수근)은 주로 3~4호의 크기가 많았고, 그 당시 2~3만원으로 많은 소품이 소화되었으며 내 기억으로 박 형은 그 당시 작품만을 가지고 생활해야만 한 몇 안 되는 화가 중의 한사람이었다"고 회고했다.

개관전에는 김종하와 박수근의 그림이 걸렸다. 김종하는 일본에서 유학했다. 명성으로 치자면 소학교밖에 나오지 못한 박수근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박수근은 4시쯤이면 창신동에서 전차를 타고 명동으로 나왔다. 화랑에서 자신의 그림이 몇 점이나 팔렸는지를 확인하고, 국내에서 드물게 양변기가 설치된 이곳에서 볼일을 보았으며, 이곳에 들렀다가 저녁에는 명동에서 만난 예술인들과 한잔하고 헤어지기도 했다.

황금찬 시인은 '문단사'에서 박수근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어느 날 그는 내게 다음과 같은 말을 영문도 없이 하는 것이다. '황 선생, 내가 죽고 나면 내 그림이 어떻게 될까? 단 한 점이라도 누가 기억해 주는 사람이 있을까? 아니면 어느 날의 낙엽같이 그렇게 쓸려가고 말까?'하는 것이었다."

그의 생각은 기우가 되었다. 우리나라 호당 그림 가격으로 가장 높은 금액을 갱신하는 사람이 박수근 아닌가?

반도호텔 화랑에서 작품을 감상하는외국인들 출처;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전

호텔에 묵은 사람들 중 박수근의 작품을 사 간 외국 사람들은 밀러, 짐머맨, 핸더슨 등이다. 이들이 사 간 작품이 수십 년이 흘러 국내로 다시 돌아왔다. 작품의 뒷면에는 반도화랑의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미국 대사관 문정관 부인인 마리아 핸더슨(Maria Henderson)은 서울아트소사이어티(Seoul Art Society)를 조직하고 한 달에 한 번 화가의 작업실을 방문하는 행사를 열곤 했다. 그녀는 독일에서 미술 공부를 한 조소 예술가였다. 그들이 중심이 되어 반도호텔 내부에 1956년 5월18일 현대한국미술작품전을 열기도 했다.

그녀는「현대미술의 대표적 단명」이라는 글에서 "잘 조화된 장식적 스타일로 배치하여 한국 도자기를 연상시키는 침잠한 백색과 회색의 톤(tone)은 조용함을 발하고 넓은 형식들은 힘을 말해준다"고 평가했다. (최열, 《시대공감》, 마로니에북스 179쪽)

마거릿 밀러가 소장했던 그림

또 한 명의 애호가인 실리아 짐머맨(Celia Zimmerman)은 미국 코넬브라더즈상사 서울영업소 공리양행 책임자인 죠셉 짐머맨의 부인이다. 그녀의 아버지가 화상이기도 한데, 그녀도 반도호텔 상설전시장 설립과 운영에 적극 가담했다.

실리아짐머맨이 소장했던 노변의 행상

그녀는 박수근의 <노상>을 구입하여 샌프란시스코 박물관에서 개최한 <아시아와 서양의 미술> 전시에 출품하였다. 반도호텔 상설전시관은 박수근에게 가장 확실한 작품 판매처였다. 특히 마가렛 밀러(M. Miller)는 박수근의 생애 마지막까지 작품을 구입했다.

마가렛 밀러가 박수근에게 보낸편지. 영문 편지는 박수근의 집 근처에 살았던 이어령 선생님이 번역해 주었다.

문인과 화가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명동. 신세계백화점(미쓰코시, 미8군PX) 옥상은 우리나라 근대 예술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공간이다. 현대 건축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르 꼬르뷔지에의 건축 이론에 따라 백화점 옥상에 카페를 차린 모습은 미쓰코시백화점에서 시작하여 신세계 백화점으로 바뀐 지금도 옛 모습 그대로이다. 식민지의 억압받는 현실 속에서 이곳 옥상에서 작은 날개나마 펼치려 했던 이상. 그는 죽으면서 아내 김향안(나중에 화가 김환기의 부인)에게 마지막으로 "멜론이 먹고 싶다..." 고 하면서 죽어 갔다. 참 이상답다. 죽으면서까지 폼 나게 죽었으니... 천재적인 번뜩이는 아이디어로 세상에 나 보란 듯이 살아가지는 못했던 박수근도 PX로 변한 이 건물에서 가족과 생계를 위해 우직하게 그림을 그렸다. 화가 박수근은 죽으면서 무슨 말을 남겼을까? 간경화와 백내장으로 실명했던 화가 박수근은 "천국이 가까운 줄 알았는데 너무 멀어, 너무 멀어.. " 하면서 1965년 5월 6일에 타계했다.

명동의 신세계백화점은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가는데 이곳에서 잠시 삶의 순간을 지나쳤던 두 예술가의 마지막 말은 이렇게도 대비된다.

https://www.d-art.co.kr/news/articleView.html?idxno=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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