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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일리아트 Jul 24. 2024

육의전의 후예, 최초의 재벌 아들 백남준

브랜드의 문화사

1935년 금강산 여행 가족 사진. 앞줄 왼쪽이 백남준, 뒤에 서 있는 사람이 아버지 백낙승,   출처: 백남준
한양에서 가장 사람이 많이 모이던 종루 운종가(鍾樓 雲從街) 시전

서울에서 제일 복잡한 곳이 종로다. ‘종로(鍾路)’는 일제 강점기에 붙여진 이름이요, 조선시대에는 종이 있는 누각 ‘종루가(鍾樓街)’, 사람이 구름 같이 많이 모인다고 하여 ‘운종가(雲鍾街)’라 불렸다. 56척(17미터)이나 되는 ‘국중 대로’인 종루가의 양 옆으로는 시전이 형성되었다. 쭉 뻗은 큰길로 궁궐을 오가는 고관대작이 헛기침하며 말을 타고 다녔다.



길 뒤편은 신분 낮은 관료들과 백성들이 다녔다. 고관들의 행차를 거북히 여기는 사람들 때문이다. 이 길이 우리가 잘 아는대로 ‘피마길’이다. 길을 따라 주점과 식당들이 줄 지어 있었다. 흔적이 잘 보존되면 좋으련만 지금은 겨우 명맥만 유지한다. 열차길 같은 노포에서 빈대떡에 막걸리를 마셨던 노신사들이 젊은 시절을 회고하며 주위를 맴돈다. 늘 많은 사람들이 모이고 흩어지는 곳, 시전이 형성되어 있을 때는 물건을 사는 사람, 파는 사람. 사람들을 꼬드겨 전방 주인으로부터 구전을 챙기는 여리꾼들, 길게 늘어진 양반의 소매에 쩔렁쩔렁 소리 나는 엽전을 호시탐탐 노리는 소매치기들에게도 이곳 종로 시전은 아주 매력 있는 곳이었다.



‘소매치기’라는 말도 이곳에서 나온 말이다. 양반들은 장을 보러 갈 때, 돈주머니 대신 소매에 엽전을 넣고 다녔다. 묵직한 소맷자락을 아래에서 위로 치면 돈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그것을 다른 공범자가 잽싸게 주워간다고 해서 ‘소매치기’라는 말이 나왔다. 종로에 사람들이 넘쳐난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나라의 공인시장인 시전이 종로에 있었기 때문이다. '억말무본(抑末無本)', 농사는 본업(本業)이요, 상업은 가장 끄트머리에 속하는 말업(末業)이라 했다. 상업을 노골적으로 천시한 조선에서도 어쨌든 시장이 하나쯤은 있어야 했다.



태종 12년(1412)부터 세 차례의 공사를 실시하여 무려 2천여 칸의 공랑이 조성됐다. 주인은 한 평 남짓한 가게 전방 앞 퇴청에 쭈그리고 앉아 손님을 기다린다. 물건에 가려 얼굴은 잘 보이지도 않는다. 좁은 복도를 따라 들어가면 뒷방에는 쌓아 놓은 상품이 가득했다. 상인들은 파는 품목에 따라 일종의 조합 성격인 도중(都中)을 결성했다.



여기에 등록 하지 않는 가게를 난전(亂廛)이라 했다. 나라로부터 허가받은 상인들은 무뢰배들을 고용하여 난전의 상행위를 금했지만, 조선 후기로 넘어오면서 민간, 경강상인들의 성장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마침내 정조 15년(1791)에 정부에서 공인된 6개 품목 외에는 금난전권을 폐지했다. 이른바 신해통공(辛亥通共)이다. 육의전만 보호해 줬다. 중국산 비단을 파는 선전(종로타워), 국내 면포를 파는 면포전(종로4거리 남서쪽), 명주실을 판매하는 면주전, 종이를 파는 지전(남대문로 1가), 모시를 파는 저포전(종로 3가), 어물을 파는 내외어물전이다. 지금도 종로에는 비단 가게와 귀금속점이, 남대문로에는 종이상점이 많다. 모두 육의전의 흔적이다. 그런데 이런 육의전이 위기를 맞았다.



조선말 1876년, 강화도조약 이후 제물포에 일본 제품이 무더기로 들어왔다. 1899년 경인선이 개통되자 상인들과 그들이 가져온 상품들의 반입이 수월해졌다. 값싸고 품질 좋은 물건이 신속하게 조선인의 생활을 변화시켰다. 공인된 시장이 아니라 어느 곳이든 물건을 사고팔 수 있었다. 육의전의 몰락이 시작되었다.


마지막 육의전의 후예 백윤수


조선의 정치적 변화도 시전의 몰락을 부추겼다. 일본 재정 고문 메가타 다네타로에 의해 단행된 1905년 화폐개혁은 육의전에서 통용되던 어음을 한낱 종이 조각으로 만들었다. 강제 합병으로 시전의 자존심을 지키던 육의전은 마침내 무너졌다. 육의전의 마지막 후예는 누구일까? 조상 대대로 면포전에서 큰돈을 모은 백윤수(白潤洙)이다. 시전이 없어지자 이 자리에 '백윤수 상점'을 차리고 물건을 팔더니, 아예 '대창 무역'이라는 회사를 차려 포목을 직접 수입했다. 청나라와의 교역이 어려워지자 나중에는 '대창 직물'이라는 방직 회사를 차려 직접 포목을 만들어 팔았다.



 

백윤수의 아들 백낙승


1924년 백윤수가 사망하자 일본의 메이지대학과 니혼대학을 나온 막내아들 백낙승에게 최종 경영권이 넘어갔다. 그는 아버지의 대창 직물을 확장시켜 '태창직물'을 설립했다. 조선 사람이 일본군에 어떻게 접근했는지 일본 군복을 만들어 팔았다. 중일전쟁을 치르고 있던 관동군이 얼마나 많았겠는가. 정상적인 방법은 아니지만 군복을 밀납품하여 큰돈을 벌었다. 일본 굴지의 방직회사인 ‘마루베니’나 ‘이토추상사’ 같은 대기업도 태창직물을 통해서 물건을 납품할 수 밖에 없었다. 일본군의 옷을 일본인이 만들어 조선회사를 통해 납품하는 희한한 구조였다.



모두가 일제의 폭압에 식민지 조선이 신음하고 있을 때 백낙승은 오히려 그들을 등쳐먹었다. 이런 그의 수완은 일제 강점기 막대한 정치 헌금과 무기 헌납으로 가능했다. 화신백화점 박흥식이 만든 '조선비행기회사'에 주주로 참여하여 비행기도 헌납했다. 그러나 밀수출이 일본군 감찰대에 적발되면서 상품이 몰수되는 시련을 맞았다. 낙심하고 있을 때 또 다른 기회가 왔다. 해방된 것이다. 견직물의 가격이 폭등했다. 몰수된 물품을 찾아 팔아 더 큰돈을 벌었다. 백낙승, 하늘이 내린 사람인가. 해방 후 좌우익의 혼란이 극심했다. 누가 정권을 잡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는 여러 개의 보험을 들었다. 이승만은 물론 좌파 노선을 걷는 여운형에게도 정치 자금을 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돈을 벌려면 그의 처세와 정경유착을 배워야 할까?



백낙승의 아들 백남준



창신동 큰대문집

백낙승의 막내아들이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이다. 백낙승의 집은 창신동에서 큰대문집으로 불렸다. 백남준과 이웃해 살던 친구가 수필가 이경희 여사이다. 유치원 친구인 이 여사의 회고에 따르면 그 집에 놀러가면 “남준아 네 색시 왔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소꿉친구라고 했지만 당시 양가 부모는 두 아이 몰래 정혼을 맺었다는 말도 있다. 백남준의 집은 육의전 표석이 있는 종로 타워의 대각선 방향, SK 서린 빌딩 자리에도 있었다. 그러나 서울 창신동에서의 삶을 잊지 못했다. 유치원과 소학교를 같이 다닌 이씨를 그리워한 것을 보면 세계적인 아티스트 이전에 고향을 그리워하는 귀소본능의 한국 남자이다.



마지막 육의전의 아들 백남준은 아버지가 번 돈으로 어릴 적부터 음악교육을 받았다. 방송인 김세원의 아버지이자 월북 작곡가인 김순남을 사사했다. 홍콩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다. 외국에 나가는 순서로 여권을 주는 시대에 백남준의 여권 번호가 7번이었다. 아버지가 유학비를 대주지 않았다면 그의 예술은 피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홍콩에서 유학하고 이후 유럽과 미국에서 활동했다. 현대예술의 불모지인 우리나라에서 백남준이 어떻게 글로벌 예술가가 되었을까. 그의 이름 석자는 우리나라를 세계에 알리기에 충분했다. 뭐 저런 것이 예술이냐고 의아해 하면서도 우리는 그에게 환호했다. 육의전과 백남준, 참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지만...



 

이승만과의 정경 유착, 우리나라 최초의 재벌


1945년 10월16일 미국에서 돌아온 이승만은 조선호텔에 여장을 풀었지만 곧 조선 타이어 사장 장진영의 도움으로 돈암동에 있는 돈암장으로 거처를 옮겼다. 돈암장으로 백낙승이 찾아가 매달 50만 원을 생활비 명목으로 주었다. 일제 관동군에게 써 먹던 로비 실력은 녹슬지 않았다. 돈 없는 노정객 이승만을 다루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다. 돈암장을 뒤로 하고 마포장에 거할 때도, 많은 사업가들이 마련해 준 이화장으로 옮길 때도 정치적 목적의 생활비는 계속 지출되었다. 무일푼으로 귀국한 이승만이 대통령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돈이 필요했겠는가.



떠돌이 생활을 접고 이승만이 마침내 경무대의 주인이 되었다. 이제 이승만이 백낙승에게 그동안의 신세를 갚을 때가 되었다. 일본의 귀속 재산이던 고려방직 영등포공장을 백낙승이 사도록 주선했다. 한국 산업은행의 전신 한국 식산은행에 지시하여 5백만 달러를 사업 자금으로 빌려주도록 했다. 백낙승의 탄탄대로는 시작되었다. 홍삼 판매권의 특혜를 몰아주고 일본에서 방직기계를 대량으로 들여와 사업을 일구도록 도와주었다. 마침내 우리나라에서도 재벌그룹이 탄생했다. ‘태창 그룹’이다. 조선시대 시전이 망한 공낭에서 백윤수의 '대창직물'이 탄생했고, 일제강점기 백윤수의 아들 백낙승에 의해 '태창직물'이 세워지더니 해방 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재벌, 태창그룹이 탄생한 것이다.



그러나 백낙승의 로비가 너무 과한 탓인가. 지나친 특혜가 말썽이 났다. 대통령도 막을 수 없었다. 경제적 스캔들이 연이어 들춰지며 세간의 이목이 쏠렸다. 일제 강점기에도 승승장구하던 로비의 왕 백낙승은 1956년 정릉 경국사에서 사망한다. 이승만의 몰락은 그 후에 일어났다. 그는 죽기 전에 자신의 아들 백남일을 후계자로 지목하고 태창그룹을 다시 일으키려 했으나 대세를 돌이키지는 못했다. 태창 방직은 경영 악화로 부정 축재 처리과정에서 전 재산을 몰수 당했고, 후계자 백남일은 일본으로 귀화한다. 5·16 이후 태창방직은 재일사업가 서갑호에게 넘어갔다. 그리고 그룹 이름도 '방림'으로 바뀌었다.



육의전의 마지막 후손의 시대는 이것으로 끊어지게 된다. 참으로 아쉽다. 누대에 걸쳐 가업을 이어가는 외국처럼 우리나라에도 육의전의 대를 이은 기업이 하나쯤은 있음 직한데... 세계적 예술가 백남준을 기억하며 육의전을 생각하게 될 뿐이다.



https://www.d-art.co.kr/news/articleView.html?idxno=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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