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용신부터 이중섭까지 격동의 미술사

by 데일리아트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상설전시
총 9개의 주제, 약 145점의 소장

국립현대미술관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국립미술관이다. 1969년 10월 경복궁에서 첫 개관한 이래, 1973년 덕수궁 석조전으로 이전해 운영하던 미술관은 1986년 과천으로 옮겼다. 1998년 덕수궁관, 2013년 서울관, 2018년 청주관을 차례로 열며, 한국미술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이를 세계에 확산하는 전략적 거점의 역할을 확대해 오고 있다.

3417_9784_2539.jpg

전시포스터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최근 새롭게 단장하고, 상설전《한국근현대미술 I》을 열어 관람객들의 큰 호응을 얻고 있다. 이번 전시는 1900년대 초부터 한국전쟁 시기까지, 한국미술이 격동의 근대사를 어떻게 마주하고 대응했는지를 총 9개의 주제, 약 145점의 소장품을 통해 풀어낸다.

3417_9785_2556.jpg

우) 허유 초상, 1924-1925, 비단에 먹, 색, 족자, 127ⅹ68cm채용신, 좌) 유인명 초상, 1924-1925, 비단에 먹, 색, 118×64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사진: 원정민

전시는 ‘근대성의 수용’, ‘전통 서화의 재구성’, ‘일제강점기 예술인의 모색’, ‘전쟁과 예술의 상흔’ 등을 주요 키워드로 삼아 시대별 흐름을 촘촘히 짚는다. 1부 '새로운 시선의 등장-광학과 카메라, 근대적 지식체계와 미술'은 근대적 시각 체계의 도입이 한국 미술계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를 조망한다. 특히 광학 기술의 발달과 사진기의 등장은 기존의 회화적 관찰 방식에 변화를 일으키며, 시각예술 전반의 조형 인식에 큰 전환점을 가져왔다.

3417_9786_273.jpg

이영일, 시골소녀, 1928, 비단에 색, 152×142.7cm /사진: 원정민

3417_9788_3059.png

정찬영, 공작, 1937, 비단에 색; 4폭 병풍, 154×232.4.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전통적인 초상화에서 사진 기술의 도입으로 인해 김은호와 채용신의 초상화에서 보이는 사실성과 원근법을 수용한 표현들이 흥미롭다. 그와 함께 전시되고 있는 이영일과 정찬영의 꼼꼼한 공필채색화가 눈에 띈다. 이영일은 일본에서 일본화를 전공하고 한국에 돌아와 정찬영을 비롯한 제자들을 가르쳤다. 그에 따라 당연하게도 일본의 화풍이 보이는데, 당시의 미술 교육, 제작 방식, 그리고 일본화를 중심으로 한 식민지기 미술 환경의 영향력을 읽게 한다. 일제강점기 일본화의 유입과 그에 따른 표현 기법의 변화는 이 시기 미술이 단순한 전통의 계승을 넘어 식민지 근대라는 복합적 조건 속에서 재구성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새로운 시선’은 단순한 기술 변화가 아닌, 시각적 감각의 구조 자체가 달라지는 결정적 국면을 담고 있다.

3417_9789_3237.jpeg

김규진, 해금강총석, 1920, 종이에 먹, 색, 족자 46×451.5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2부 ‘근대 서화의 모색’에서는 근대기 회화의 또 다른 흐름, 즉 전통 서화의 내적 변화와 재편성 과정이 집중적으로 다뤄진다. 조선시대 사의적(寫意的) 표현을 중시하던 산수화는 이 시기 들어 점차 사실적 묘사와 사생(寫生) 중심의 조형 언어로 전환되며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3417_9790_3335.jpg

변관식, 외금강 삼선암 추색, 1966, 종이에 수묵담채, 125.5x125.5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이러한 변화는 단지 양식의 전환에 그치지 않고, 회화 장르의 명칭과 개념 자체를 ‘서화(書畵)’에서 ‘동양화(東洋畵)’로 이행시키는 인식의 변동으로 이어진다. 이는 일본 메이지기 이후 도입된 ‘동양화’라는 개념이 한국 화단에 유입되며 생긴 구조적 변화로, 근대의 회화는 점차 전통과 근대, 자율성과 제도화의 긴장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모색하게 된다.

3417_9791_3623.jpg

변월룡, 북조선 금강산(만물상), 1959, 종이에 에칭, 49x64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이 섹션은 단순히 과거를 재현하는 산수의 회화를 넘어, 전통 회화가 새로운 시대의 미적 감각과 어떻게 충돌하고 변용되었는가에 주목하며, 그 미묘한 이행기를 섬세하게 포착하고 있다. 그에 따라 과거부터 많이 다루어졌던 금강산이 김규진, 조석진, 변관식, 변월룡 등의 작가들에 의해 어떠한 방식으로 묘사되었는가를 확인해 볼 수 있게 된다.

3417_9792_385.jpg

3부 전시 전경

3부 ‘미술 / 미술가 개념의 등장’은 한국 근대미술사에서 예술가라는 주체의 자의식이 본격적으로 부각되기 시작한 시점을 다룬다. 이 시기 작품에서는 자화상, 여성 인물 좌상, 누드화 등 이전에는 잘 등장하지 않던 새로운 회화 주제들이 눈에 띄게 증가한다.

3417_9793_417.jpg

전선택, 자화상, 1959, 캔버스에 유화물감, 45x33.1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이는 단순한 소재 변화가 아닌, 예술가가 자신을 존재론적으로 자각하고, 인간과 현실에 대한 시선을 회화로 풀어내려는 시도의 일환이다. 특히 1세대 서양화가들의 자화상은 작가의 개성과 존재를 선언하는 한편, ‘화가’라는 직업적 정체성이 형성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누드화나 여성 인물 좌상 역시 이 시기의 중요한 회화적 성취 중 하나다. 이는 단순히 서구화된 형식을 수용한 결과라기보다, 근대적 인간관과 개인주의의 수용, 그리고 시선의 주체화를 반영한 것으로 읽힌다. ‘미술’이라는 개념이 전통 회화의 틀을 넘어 자율성과 창작의 영역으로 전환되는 전환점이 바로 이 지점에서 포착된다.

3417_9794_4318.jpg

오지호, 남향집, 1939, 캔버스에 유화 물감, 80×65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4부는 작가의 방으로 오지호의 작품을 조망하고, 5부 ‘조선의 삶을 그리다’는 1930~40년대 조선미술전람회를 중심으로 형성된 전통 풍속화의 계보를 보여준다. 이 시기 화단은 ‘조선적인 것’에 대한 탐구와 함께 초가집, 기생, 장터, 아이를 업은 여인 등 일상 풍속을 주요 소재로 삼은 작품들을 다수 생산했다.

3417_9800_240.png

김중현, 농악, 1941, 캔버스에 유화 물감, 72×91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특히 조선의 풍경을 배경으로 한 인물화가 다수 제작되었으며, 김은호의 제자들인 김기창, 이유태, 장우성 등이 주도한 세필 중심의 정밀한 선묘와 짙은 채색의 인물화는 이 시기의 조형적 정수를 보여준다. 이들은 제2세대 동양화가로서, 전통적인 미적 요소에 근대적 감수성을 결합하거나, ‘신여성’과 ‘여가’라는 새로운 사회적 개념을 화면에 반영하기도 했다.

3417_9783_2125.jpg

이유태의 '화음'과 김기창의 '정청' 사이 윤효중의 '물동이를 인 여인'에서 보이는 물동이를 지고 가는 조선의 아낙네의 모습이 대조적이다. /사진: 원정민

하지만 동시에 이러한 회화는 일제강점기 식민지 권력이 제시한 ‘향토적 이미지’와 조선의 전통미’를 장려하는 정책에 일정 부분 부응했다는 점에서 식민지 시기 문화정책의 시각성과 무관하지 않다. 식민지 권력이 문화정책을 통해 조장한 ‘향토성’과 ‘정감 있는 조선’의 시각적 아이콘에, 이들 회화가 일정 정도 부응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림은 그 시대의 미학이자 이념이었다. 전시는 이처럼 풍속화가 지닌 미적 매력과 이념적 함의를 동시에 성찰할 기회를 제공하기도 한다.

3417_9795_4738.png

좌) 김기창, 흥락도(興樂圖), 1957, 종이에 먹, 색, 221×168cm. 우) 박래현, 탈, 1958, 종이에 먹, 색, 223×122cm /출처:국립현대미술관

6부는 부부였던 우향 박래현과 운보 김기창의 작품을 조망한다. 전시의 7부와 8부는 ‘폐허 위에서’라는 공통된 제목 아래, 한국전쟁 전후 미술계가 직면한 현실과 그에 대한 예술가들의 조형적 응답을 다룬다. 이 시기는 국가적 혼란과 사회적 붕괴 속에서 예술가들이 현실을 재현하고, 상처를 기록하며, 삶의 흔적을 포착하려 했던 시기였다.

3417_9796_4953.jpg

김병기, 가로수, 1956-1970, 캔버스에 유화물감, 125.5x96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7부는 특히 전쟁의 폐허 속에서도 지속된 조형 실험에 주목한다. 단순한 기록화나 선동적 미술을 넘어, 형식과 표현의 해체, 새로운 재현 방식의 탐색이 활발히 이루어진 시기로, 전쟁이 예술에 미친 영향과 그 내면화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3417_9797_5056.jpg

박수근, 할아버지와 손자, 1960, 캔버스에 유화물감, 146x98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3417_9798_525.jpg

김정숙, 엄마와 아기들, 1965, 나무, 99x28x20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8부에서는 이러한 역사적 외상과 국가적 상흔이 보다 미시적인 삶의 장면—가족, 아이, 일상적 장면으로 옮겨간다. 이는 사적인 감정과 회화적 서정이 강조된 시기로, 박수근을 비롯한 작가들이 전쟁 이후의 삶에서 소박하지만 강인한 생의 단면을 포착하려 했던 노력이 엿보인다. 전쟁이라는 극단적 상황에 맞서 예술이 어떤 방식으로 대응하고, 인간적 감각을 회복하려 했는지를 보여주는 예술의 회복력과 윤리성에 대한 성찰적 장이라 할 수 있다.

3417_9799_572.jpg

9부 전시 전경- 좌) 이중섭, 춤추는 가족, 1950년대 전반, 종이에 유화 물감, 22×29.7cm. 우)이중섭, 두 아이와 물고기와 게, 1950년대 전반, 종이에 유화 물감, 펜, 32.8×23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마지막 9부는 이중섭을 조망하며 전시는 마무리된다. 이번 전시에서 주목할 점은, 전시 중간중간 ‘작가의 방’이라는 이름으로 오지호, 김기창, 박래현, 이중섭이라는 거장 한 사람의 세계에 집중하는 섹션들이 병치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관람자는 시대의 흐름 속에 위치한 개별 작가의 예술적 응답과 고유한 조형언어를 더욱 입체적으로 감상할 수 있게 하였다.

《한국근현대미술 Ⅰ》은 단순한 소장품 나열을 넘어, 한국 근현대미술사의 주요 전환과 작가적 사유를 서사적으로 엮어낸 회화적 연대기이다. 격동의 시기를 관통한 작품들, 제도 속에서 길을 모색한 예술가들, 그리고 그 사이에서 피어난 조형적 감각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질문을 던진다. 과천관의 이번 상설전은 한국 근현대미술의 정리이자, 그 이후를 사유하게 하는 공간으로 기능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관람자는 ‘과거를 보는 눈’과 ‘현재를 비추는 거울’을 동시에 경험하게 된다.

전시는 오는 6월 27일까지. 이후에는 동일한 제목의 두 번째 상설전 《한국근현대미술 Ⅱ》가 곧이어 시작될 예정이다. 한국미술의 거시적 흐름과 개별 작가의 깊이를 한자리에서 경험할 수 있는 이 드문 기회를 놓치지 말길 권한다.


채용신부터 이중섭까지 격동의 미술사, 《한국근현대미술 I》리뷰 < 리뷰 < 미술 < 기사본문 - 데일리아트 Daily Art

keyword
작가의 이전글전국 청년작가 공모선정 7인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