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일리아트를 통해 앞으로 우리 민족의 혼란과 변화, 역동과 고난의 교차했던 근대기를 서화를 통해 민족과 함께했던 뛰어난 서화가들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그들의 훌륭한 작품을 다시 한번 감상해 보는 기회를 얻고자 합니다. 근대 시기의 규정은 여러 학자 간에 논쟁이 있지만 여기서는 편의상 1862년 고종이 등극하는 해부터 일제강점기가 끝나는 1945년까지로 설정하여, 이 시기에 활동했던 서화가들을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응원과 관심부탁드립니다. (필자 손태호)
조선시대 서화계의 마지막 불꽃-오원(吾園) 장승업(張承業, 1843-1897)
오원 장승업. 산수, 인물, 꽃과 새, 동물화, 기명절지 등 모든 서화 영역에서 당대 최고의 기량을 선보였던 화가다. 불세출의 화가, 술에 미친 화가, 궁궐에서 3번이나 도망치고 심지어 장가간 후 첫날밤 이후 집에 한번도 가지 않은 기행 등, 조선시대 화가 중에서 장승업처럼 많은 일화와 이야기가 회자된 인물이 또 있을까? 하지만 그 많은 전설 같은 이야기와 유명세에 비해 그의 생애에 대해 밝혀진 부분은 사실 그리 많지 않다. 지금까지 많은 연구자들이 밝혀온 내용을 중심으로 그의 삶과 미술 세계를 짧은 지면으로나마 소개해 보고자 한다.
장승업, 왕몽(황학산초)가 그린 가을강의 모습을 본뜬 그림, 1879, 종이에 수묵, 22×21.4㎝. 서울대박물관 소장
이 작품은 원나라 왕몽(황학산초)의 그림을 본뜬 작품으로, 초기에는 이처럼 중국 그림을 본뜬 그림을 많이 남겼다. 단순히 보고 그린 것이 아니라, 그림 공부의 일부이자 자기화를 위한 노력의 일환이다. 이 그림도 여백을 빽빽이 채우는 원작에 비해 여백을 크게 사용하여 원작의 느낌이 그리 많이 드러나지 않는다.
장승업의 삶
장승업은 자는 경유(景猷), 호는 오원(吾園), 취명거사(醉瞑居士). 또는 문수산인(文峀山人)이다. 1843년(헌종 9)에 태어났는데 출생지나 부모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다만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났다는 이야기만 떠돌 뿐이다. 본관은 대원(大元)으로, 대원 장 씨는 잡과 하급 무관을 여럿 배출한 성씨인데 현재는 인동 장씨에게 흡수되었다. 이름 승업(承業)은 ‘가업을 잇는다’라는 뜻인 걸 보면 부모가 무인의 길을 바라고 지은 이름일 수도 있지만, 부모가 일찍 돌아가시어 이름대로는 살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장승업의 삶과 예술에서 보이는 강건함과 고집스러움은 무인의 기질이 묻어난다고 볼 수 있겠다.
장승업은 어려서 부모를 잃고 집도 가난하여 일가친척 집을 전전했다. 홀연히 고향을 떠나 많은 부랑자가 그렇듯이 수도 한양으로 들어왔다. 그때가 그의 나이 10대 후반쯤이었는데 한양 수표교에 있는 동지중추부사를 지낸 역관 이응헌(李應憲, 1838-?)의 집에서 머슴살이를 하게 된다. 이응헌은 추사 김정희의 제자다. <세한도>의 주인공으로 유명한 우선(藕船) 이상적(李尙迪,1804~1865)의 사위로 서화와 금석문에 뛰어났다. 역관으로 중국을 왕래하면서 많은 서화를 수집한 수장가이기도 하다. 장승업은 이곳에서 일하면서 뛰어난 서화 작품을 접하면서 마음속에 그림을 담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혼자 본 서화를 종이에 그렸는데 우연히 김응헌이 보고 천재성을 발견한다. 그 후 김응헌은 장승업의 후원자가 되어 물심양면 그림 공부를 지원한다. 장승업이 천재적인 재능을 타고났다고 하더라도 좋은 스승 없이는 재능을 꽃피울 수 없었을 것이다. 후원은 김응헌이었지만 초년기 그림 스승은 혜산(蕙山) 유숙(劉淑, 1827-1873)이다. 유숙은 이한철, 백은배와 함께 19세기를 대표하는 도화서 화원 화가다. 추사 김정희와 조희룡 등과 그림으로 교유했던 뛰어난 사람이다. 장승업은 유숙에게 그림을 배우며 장안에 천재 화가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당시 조선의 화단은 추사 김정희 화맥의 남종문인화 계열과 청나라 말기에 유행한 양주팔괴의 신화풍이 유행하고 있었다.
장승업은 어느 한 가지 유파나 기법에 얽매이지 않고 여러 화풍을 받아들여 다양한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이루어 나갔다. 이렇게 실력이 일취월장으로 발전해 나가는 데는 한성판윤 변원규와 역관 오경연의 적극적인 후원도 한몫했다. 특히 오경연은 해주오씨 역관 명문 집안인데, 큰형이 개화파의 비조로 알려진 역매 오경석으로 당대 최고의 중국 고서화 수장가였다. 오경석은 간송 전형필의 스승격인 위창 오세창의 아버지다. 오세창도 집안의 많은 고서화를 통해 당대 최고의 감식안이자 전서의 일인자다. 장승업은 해주오씨와 교류하면서 안목과 실력이 더욱 난숙해지고 다양해졌다.
장승업은 40대에 이르러 크게 유명해져 궁궐에까지 소문이나 고종의 부름을 받게 된다. 도화서 화원이 된 후 궁중에서 그림을 그리게 된 장승업은 자유분방한 성격과 술을 너무 좋아하는 탓에 꽉 막힌 궁중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도망을 친다. 잡혀 오면 또 도망가고 다시 잡혀 오기 일쑤였다. 결국 세 번째 궁에서 탈출한 후에는 임금도 포기한다. 임금의 손아귀에서 자유를 얻은 뒤, 자유롭게 그림에 몰두한다. <춘남극도인>과 <추남극도인>은 이 시기 그린 작품이다.
장승업, 추남극노인(春南極老人), 종이에 채색, 64.1×134.7㎝. 간송미술관 소장
장승업, 춘남극노인(秋南極老人), 종이에 채색, 64.1×134.7㎝. 간송미술관 소장
위 두 작품은 궁궐에서 탈출하여 고종의 노여움을 샀을 때의 그림이다. 민영환(1861-1905)은 벌을 주는 대신 자기 집에 가두고 그림을 그리도록 하겠다고 청을 올린 뒤 완성하게 한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 화보에서 나오는 신선처럼 머리는 크게 그렸으나, 표정은 조선 사람의 모습으로 표현했다. 남극노인은 사람의 수명을 관장한다는 남극성을 의인화한 그림으로 주로 신선의 모습이다. <추남극노인> 왼쪽에 “남극성이 보이면 임금께서 오래 사시고 천하가 잘 다스려진다”라고 적혀 있다. 오른쪽 아래에는 “대령화원인 신 장승업이 바치나이다”라고 적혀있어 장승업이 화원 시절 그림이란 것을 알 수 있다.
술과 여자
장승업의 일화 중 가장 많은 소재는 술과 관련된 이야기다. 술을 너무 좋아해서 앉은 자리에서 두어 말은 거뜬히 마셨고, 대취하지 않으면 술을 그치지 않았다. 또 취하면 한 달이 되도록 깰 줄을 몰랐고, 그림값으로 받은 돈을 모두 술집에 맡겨놓고 매일 가서 마셨다. 그런데 술을 마신 뒤 얼마인지 계산도 하지 않았다.
오원과 같은 시대 문인 화가인 이정직은
“오원은 반듯이 미인을 옆에 두고 술을 따르게 해야 득의작이 나왔다”라고 언급했다.
조선의 화가 중에 술을 좋아했던 일화가 있는 화가는 여럿이다. 연담(蓮潭) 김명국(金明國), 호생관(毫生館) 최북(崔北)이 대표적이고 단원 김홍도도 상당한 애주가였다. 이 들의 공통점은 장승업과 마찬가지로 신분이 낮은 중인들이라는 점이었다. 오원은 이들을 거뜬히 넘어설 만큼 애주가였다. 그는 술은 단순히 기호적 문제가 아니라 자신을 망각하는 수단이었다. 자신에게 그림을 의뢰하는 인물들은 전부 부유한 유학자이자 고관들인데, 미천한 신분으로 그들의 요구에 따를 수밖에 없는 점이 늘 그를 괴롭혔다. 예술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수단이라면 술은 그 반대로 자신을 잊게 만드는 역할이다. 이 두 상반된 의식의 충돌과 절충이 명작을 탄생시킨 원동력이 아니었을까? 여색을 좋아했지만 어디에 구속되는 건 매우 싫어하는 자유분방한 성향이었다. 그래서 결혼했으나 첫날밤 이후 단 한 번도 집에 가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가 얼마나 자유로운 영혼인지 알게 한다.
장승업의 두 제자
그는 뛰어난 명작을 남긴 것뿐만 아니라 우수한 제자들을 길러내 후대에 영향을 끼친 점도 크게 평가받아야 할 부분이다. 장승업은 심전(心田) 안중식(安中植)과 소림(小琳) 조석진(趙錫晋)이란 걸출한 제자를 남겼다. 두 제자는 갑오개혁 이후 도화서가 해체된 후, 한국 근대 미술계를 이끈 인물들이다. 장승업처럼 얽매이기 싫은 사람이 제자들 받아들였다는 점이 좀 이상하다. 이는 특정한 장소에서 스승과 제자로 만난 것이 아니다. 제자 두 사람이 그가 있는 곳을 찾아다니면서 가르침을 받았다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글을 몰랐던 장승업은 제자를 통해서 낙관과 화제를 많이 남겼다. 장승업의 고사인물도 대표작 중 하나인 <풍진삼협도>의 제발은 심전 안중식이 썼다. 이를 통해 안중식이 스승을 어떻게 대했는지 알 수 있는 내용이다.
세 명의 협객에 대한 그림도 주목해 보자. 그런데 그림에서 보이는 것은 두 인물이다. 이에 대한 장승업의 해석이 재미있다.
장승업, 풍진삼협(어지러운 세상의 세 협객), 비단에 담채, 33.2× 125.1㎝. 간송미술관 소장
“일찍이 신묘년(1891) 봄에 육교화방으로 오원 선생을 찾아갔다. 선생이 막 이 그림을 그리고 계셨는데 ‘풍진삼협도’라 말했다. ‘한 명의 협객은 어디 있습니까?’라고 여쭈었더니 ‘규염객인데 뒤에 있어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라고 우스갯소리를 했다. 눈 깜빡할 사이에 벌써 30년이 가까우며, 선생도 또한 돌아가셨다. 이제 그림에 글을 쓰자니 자못 그 풍채가 떠오르는구나" (병진년(1916) 이른 봄에 심전이 쓰다)
작품은 장승업 나이 59세 때 그렸다. 제사에서 장승업의 유쾌함과 호방함을 알 수 있다. 또 안중식이 스승에게 어떤 방식으로 그림 공부를 했는지도 짐작할 수 있다. 장승업의 화실을 들락거리며 화업을 연마한 안중식과 조석진은 서화미술원에서부터 시작하여 서화협회를 설립했다. 두 제자는 서화협회에서 한국 근대 화단을 이끌었다. 이도영, 이상범, 노수현, 박승무, 김은호와 같은 기라성같은 화가들을 배출해, 한국 근대미술을 풍부하게 발전시켜 나갔다.
이번 글에서는 짧게나마 장승업의 생애를 살펴보았습니다. 지면의 한계로 장승업의 생애를 자세히 다루지 못하고 간략하게 넘어갈 수밖에 없는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다음 편에서는 장승업의 대표 작품을 감상하고 그의 마지막을 뒷모습에 관해서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한국 근대사를 빛낸 천재 서화가 ①] 조선미술의 마지막 불꽃-장승업 < 미술일반 < 미술 < 기사본문 - 데일리아트 Daily A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