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그림 이야기 ⑤] 사라지는 세계에 대한 그리움

by 데일리아트
3434_9856_477.jpg

나누리 작가

‘흐르는 숲’에는 강이 흐르고 식물들이 우거진다. 물감이 곧 흘러내릴 듯 멈춰진 풍경에는 인간도, 동물도 없다. 이 숲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잠재적 세계, 창세기의 넷째 날과 닮았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병원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며, 사라지는 것들에 관심을 가졌다. ‘흘러가는 것’, 유동적이고 불완전한 이미지에 깊은 관심이 있다.

갑작스러운 팬데믹 시절 외부와의 단절과 예측 불가능한 현실은 ‘숲’이라는 공간의 의미를 더욱 깊이 고민하게 만들었다. 나는 많은 시간을 실내에서 보내야 했고, 내가 가지 못하는 공간을 상상했다. 서로 다른 계절의 나무들로 내면의 공간에 숲을 키웠다. 이는 개인적인 주제를 넘어, 오늘날 인류가 처한 팬데믹, 기후 위기, 전쟁 등 불안정한 세계와도 맞닿아 있다. 이러한 현실은 안정적으로 미래를 사유하기 어렵게 만든다. 이 오래된 주제는 지금 우리에게 다시 본질적인 문제로 다가온다.

그러나 흐르는 숲은 종말적인 이야기는 아니다. 쓰러진 나무는 새로운 싹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흩뿌려진 금빛은 영원을 상징한다. 붉은 하늘은 사라지는 찰나의 순간을 붙잡은듯하다. 흘러내린 흔적이 쌓여 숲을 이루고, 그 숲은 번지고 흐르며 끝없이 과정 속에 머문다. 사라지는 세계 속에서도 새로운 것들을 채워가며 저항하는 인간의 회화작업이다. 창조 행위를 통해 삶의 불완전성에 저항하려 한다.

3434_9857_5040.jpg

흐르는 숲, 2017, 캔버스에 아크릴, 162.3x260.6cm.

숲을 그릴 때 물감의 흐름을 통제하기보다는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접근한다. 중력에 따라 물감이 흘러내리도록 두고, 마른 뒤 그 위에 다시 겹쳐 덧칠한다. 흘러내린 물감들은 나무의 형상이나 이파리의 결이 되기도 한다. 이 흔적들은 그 자체로 시간의 레이어가 되고,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 그림이 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완성된 화면은 계속 변화하고 생성되는 세계가 반영된다.

흐르는 숲은 과정, 순환, 그리고 여전히 완성되지 않은 삶을 표현하는 상징이다. 붉은 하늘, 흘러내리는 물감, 흐드러진 버드나무와 쓰러진 고목은, 모두 흘러가는 단단한 이야기다.

3434_9858_510.jpg

(좌)굿 플레이스, 2017, 캔버스에 아크릴, 130.3x162.2cm. (우)긴 호흡, 2019, 캔버스에 아크릴, 130.3x162.2cm.

'흐르는 숲'으로 작품활동을 한지 10년이 되었다. 어제의 숲과 오늘의 숲은 같은 듯 보이나, 10년 전의 숲과 오늘의 숲은 달라져 있다. 이제는 청년미술작가라는 이름의 끝에 서서, 청년이 아닌 미술작가로 오래 살아갈 나를 꿈꾼다. 나는 같은 나인 듯 하나, 주변의 사람들과 환경은 어느새 많이 바뀌어있다. 삶도 숲처럼 사라지는 것들과 새로운 것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흘러가게 하고싶다.

3434_9859_5122.jpg

미지 1, 2024, 캔버스에 아크릴, 30X40cm.

2024년도 개인전 《투명한 낙원》에서 처음 등장한 나비는 이 숲에 날아든 또 다른 가능성이었다. 그것은 연약하고 잠시 머물다 사라지지만, 짧은 생애 속에서도 세계를 가로지르는 힘을 가진 존재다. 이 나비는 숲의 결을 조금씩 바꾸어 놓는다. 순간을 붙잡는 동시에, 그 순간이 지나감을 견디는 일. 나는 계속해서 그 흐름 위에 붓을 얹는다. 흘러내리는 물감이 또 하나의 숲을 만들고, 그 숲이 나의 시간과 함께 자라기를 바란다.

3434_9860_5139.jpg

투명한 낙원 전시 전경

전시 일정

2025. 7. 2. - 9. 30. 나누리 초대개인전 《허술한 창조》, 고양꿈제작소 고양

2025. 8. 1.- 9. 20. 차세대 작가 프로모션 《포레스타(Foresta)》, 자하미술관 서울


[나의 그림 이야기 ⑤] 사라지는 세계에 대한 그리움, 흐르는 숲 – 나누리 < 영아트 < 기사본문 - 데일리아트 Daily Art

keyword
작가의 이전글10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그림을 그린 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