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전경
한국과 미국에서 활동해온 저명한 추상화가 4인의 전시 《네모: Nemo》가 8월 9일까지 리만머핀 서울에서 열린다. 4명의 작가는 맥아서 비니언, 정상화, 스탠리 휘트니, 윤형근이다. 이들은 1970년대부터 격변의 시대를 살아오며 각자의 방식으로 추상회화를 깊이 있게 탐구해 왔다. 네 명의 작가는 서로 다른 문화권과 시대적 배경을 지녔지만, 그들의 작업은 공통적으로 형식에 대한 치열한 고민, 정체성에 대한 질문, 사회적 기억에 대한 성찰이 작업 전반에 스며 있다.
전시 제목 ‘네모(Nemo)’는 우리말로 사각형을 뜻한다. 동시에 라틴어로 ‘아무것도 아닌(Nemo)’, ‘누구도 아닌’ 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처럼 ‘네모’는 단순한 기하학적 형태를 넘어 정체성과 서사의 경계를 넘나드는 상징이다. 전시에 소개되는 회화 속 ‘네모’ 형상들은 반복되며, 격자무늬(그리드)를 이루거나 하나의 독립적인 형태로 남아 각자의 이야기를 담아낸다. 네모는 평면적인 상징을 넘어서, 작가들에게는 추상이라는 보편성을 시각화하는 하나의 수단이자 도구이고, 반복과 겹침을 통한 저항이기도 하다.
또한 네모는 균열을 품은 침묵이며, 그 틈 사이에서 피어오르는 고백이기도 하다. 작가들은 개인의 삶과 사회적 조건, 언어로 환원될 수 없는 감각적 경험을 사각형이라는 형식에 담아내며, 추상이라는 형식을 통해 사회적 기억에 대한 공감의 가능성을 제안한다.
맥아서 비니언, DNA, 2022, ink, paint stick and paper on board, 182.9 x 121.9 cm. ⓒ 리만머핀
맥아서 비니언(b.1946)dms 미국 미시시피주 메이컨에서 출생했다. 그는 콜라주와 드로잉, 페인팅을 결합하여 사적인 문서와 사진의 표면에 격자무늬의 그리드(grid)를 중첩시키는 자전적 추상 작업을 한다. 그의 작품에는 작가 자신의 출생증명서, 주소록, 전화번호부, 유년 시절 그림과 흑인 린치 사진 등이 등장하는데, 이는 오일 스틱으로 그린 그리드로 인해 은폐되고 추상화된다. 비니언의 단색 추상회화는 자세히 들여다보아야 점차 형태를 드러낸다. 완벽해 보이는 그리드는 사실 공들여 손으로 그린 불완전한 선들의 집합으로, 그 뒤에는 비니언의 정체성과 개인사가 담긴 친밀한 요소들이 보이게된다.
비니언의 격자 형식 구성은 개인사를 질서 있게 배열하며, 그의 출생 증명서에서 일부 정보만 읽히거나, 자신의 어머니의 얼굴 일부만 식별 가능하게 하지만, 결코 즉각적으로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 실제 문학 작가로서 경력을 시작한 비니언은 언어와 음악에서 깊은 영향을 받았으며, 이는 그의 작품 제목이나 정보를 단순히 ‘보는’ 것이 아니라 ‘읽도록’ 겹겹이 쌓는 방식에서도 드러난다. 격자와 작가의 눈에 보이는 손동작 사이에 존재하는 긴장감은 즉흥성과 음악적 구성의 질서를 결합하는 재즈 음악과도 닮아 있다.
정상화, 무제 85-5-6, 1985, Acrylic on canvas, 120 x 120 cm. ⓒ 리만머핀
정상화(b. 1932)는 한국 단색화 운동의 선구적 인물이다. 그의 대표적인 기법은 캔버스에 물감을 칠하고 건조시킨 후, 일부를 벗겨내고 다시 칠하는 ‘제거와 채움’의 반복적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에 따라 화면은 일견 균일한 패턴처럼 보이지만, 섬세한 질감과 균열의 차이로 구성되어 있다. 정상화의 ‘사각형’ 은 반복과 축적을 통해 조용한 울림을 지닌 회화적 공간으로 탄생한다. 1953년 한국전쟁 중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에 입학하여 1957년 졸업 후 인천사범학교에서 교직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현대미술가협회와 악튀엘(Actuel) 등의 아방가르드 단체에서 활발히 활동하며, 한국전쟁의 상처를 표현한 작품들을 발표했다. 이 시기의 작품은 물감을 흩뿌리거나 비틀고 찢는 등의 앵포르멜 기법을 통해 사회적 혼란과 시대적 아픔을 반영했다.
이후 1965년 파리비엔날레와 1967년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참가하면서 국제적인 주목을 받았다. 파리 체류 당시에도 앵포르엘 감성을 유지하였으나, 점차 평면적 형태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1969 년, 세계 미술의 흐름에 보다 깊이 참여하고자 일본 고베로 이주한 작가는 점차 표현주의적 앵포르멜 회화에서 벗어나 평면적 언어의 미니멀리즘으로 전환하게 된다. ‘벗기고 채우는’ 기존의 방식은 유지하되, 캔버스를 분리하거나 접는 새로운 기법을 도입했다. 1973년부터는 단색의 격자 회화가 등장하며 그의 작업은 결정적인 전환점을 맞는다. 1970년대 중반 이후, 규칙적이고 반복적인 격자 구조는 그의 작품 세계를 대표하는 양식이 되었다.
스탠리 휘트니, Untitled, 2020-21, Oil on linen, 30.5 x 30.5 x 1.9 cm. ⓒ 리만머핀
스탠리 휘트니(b. 1946)는 현재 뉴욕 브리지햄프턴과 이탈리아 파르마에서 활동하는 작가다. 생동감 있는 그리드 기반의 추상 회화로 잘 알려져 있다. 고대 로마 건축물과 에트루리아 유물에서 받은 영감을 바탕으로, 휘트니는 색 블록을 리드미컬한 격자 구조로 배열한 작품을 창조하기 시작했다. 뉴욕의 구조화된 혼란스러움과 자신의 작품 사이의 유사성을 드러냈다. 종종 자신의 창작 과정을 재즈 음악에 비유하며, 각각의 색 선택이 다음 색을 결정짓는 방식으로 조화를 이루면서도 예측 불가능한 시각적 리듬을 형성한다고 말한다.
휘트니는 보통 왼쪽 상단 모서리의 단일 색 띠에서 시작하여 캔버스를 가로질러 차례차례 구성을 쌓아가며 구조와 자발성의 상호작용을 수용하며 화면 전체에 걸쳐 체계적으로 구성을 구축해 나간다. 회화 외에도 모노타입, 드로잉, 스테인드글라스 등 다양한 매체를 탐구한다.
윤형근, Blue Umber, 1978Oil on linen, 54 x 68 cm. ⓒ 리만머핀
윤형근(1928-2007)은 단색화 운동의 핵심 인물이다. 일제 강점기, 전쟁, 독재 등 격동의 한국 현대사를 온몸으로 겪으며, 세계관과 예술적 실천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1957년 홍익대학교를 졸업한 뒤 미술 교사로 활동을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회화에 전념하게 된 것은 1973년이다. 그의 작품에는 1970년대 유신체제 아래 ‘반공법 위반’으로 수감된 작가가 겪은 고난과 시대에 대한 작가의 깊은 내면이 깃들어 있다. 위에서 아래로 굵은 선을 반복적으로 그려낸 빈 사각 공간은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침묵과 저항의 감정을 담은 여백으로 기능한다. 윤형근은 바닥에 펼친 면 또는 리넨 캔버스 위에 청색과 다색 유화를 수직의 띠 형태로 차분히 덧칠하는 방식으로 작업했는데, 그는 이 두 색을 각각 “하늘의 색”과 “땅의 색”이라 불렀다. 이 두 색을 반복적으로 덧입혀 가장자리가 은은히 빛날 때까지 겹칠 때, 그의 ‘하늘과 땅의 문’ 이라는 개념이 구현되었다. 그의 작품은 고목, 대지, 시간의 흔적을 떠올리게 하며, 조용한 품격과 깊은 명상적 힘을 지닌다. 그의 붓질은 치열한 정신적·육체적 수련의 결과로서, 눈에 보이는 형상을 넘어선 에너지와 존재감을 드러낸다.
맥아서 비니언, 정상화, 스탠리 휘트니, 윤형근의 추상화《네모: Nemo》 < 전시 < 미술 < 기사본문 - 데일리아트 Daily A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