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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일리아트 Jul 18. 2024

창간기획 ①(최영식 미술에디터 취재)

해외 미술관을 가다 1)-뉴욕미술관 탐방


['제눈에 안경찾기',즐거움에 대한 각자의 반응]



데일리아트 창간 기획, <해외 미술관을 가다> 시리즈는 국내뿐 아니라 해외의 유명 갤러리들을 탐방하는 기획입니다. 뉴욕, 일본 등 해외 화제의 미술관을 기자 각자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해석하는 탐방물입니다. 그 첫번째 순서로 뉴욕미술관을 다녀왔습니다.  최영식 미술에디터는 어떤 시선으로 뉴욕을 다녀왔을까요? 그 이야기를 싣습니다. - 편집자 주

 뉴욕에 있는 미술관을 떠올리면 메트로폴리탄미술관, 뉴욕현대미술관, 구겐하임, 브루클린 등등 한 손에 헤아리지 못한다. 거기에 자연사박물관, 뉴욕 과학박물관 같은 박물관까지 포함시키면 일단 숨을 고르게 된다. 이렇게 많은 박물관과 미술관은 미술애호가에게는 축복이지만, 짜장면과 짬뽕사이에서 짬짜면이 필요한 누군가에게는 첫 선택부터 좌절하게 만든다. 이럴 때는 어떻게 선택하면 될까? 남들이 얘기하는 “세상에서 한 번은 꼭 가보고 싶은 곳”을 찾으면 된다. 그곳이 뉴욕에 있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Metropolitan Museum of Art), MET이다.

 본 기자도 2024년1월, 뉴욕 소재 한인미술단체 AHL재단의 학술심포지엄에 참석하면서 뉴욕의 여러 미술관 중 첫 방문지로 MET를 택했다.

 그러나 식당에 입장했다 해도 다시 한번 메뉴결정이라는 벽에 좌절한다. 엄청난 메뉴판을 보면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왜 식당에 들어왔는지가 생각나지 않는다. MET는 무려 400개의 전시실과 300만점이 넘는 예술품을 보유하고 있다. 시대적으로도 고대 이집트부터 현재까지 3천년이 넘는 타임머신 여행이다. 대충 훑어보는데만도 며칠은 걸릴 것이며, 예술품을 감상한다기 보다는 떨리는 무릎에 훈련소 행군이 떠오를 거다.
그런데 결정도 못하고 체력도 달리는 우리들을 위해서 MET에서는 아주 맛있고 품위 있는 식탁을 차려주었으니, 우리는 즐기기만 하면 된다. 마음의 준비가 되었는가? 이제 떠나보자

메트로폴리탄 미술관(Metropolitan Museum of Art, MET)이 준비한 "Look Again: European Painting 1300-1800"은 예술 애호가들과 관람객들에게 유럽 회화의 정수를 새롭게 선보인다.


룩 어게인



 "Look Again"  은 관람객들에게 이전에 본 작품들을  새로운 시각에서 바라볼 것을 권한다.
 첫번째 새로운 시각으로 봐야하는 것은 '유럽'이다. 누구나 인식하는 유럽을 물리적 대륙으로 국한시키지 않는다. 신세계와 그 너머의 스페인 식민지까지 그 경계를 넓힌다. 이런 의도를 전시회입구에서부터 만날 수 있다.  전시물은 유럽을 대표하는 성모상과 동양의 간다라불상까지 아우른다.


전시 설명문의 첫 문장을 보자.


전시장 입구 설명문
성모상과 간다라 불상


 입구의 안내문은 전시회의 이름을 왜 룩 어게인으로 설정했는지에 대한 설명을 내포한다.

“유럽은 지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고정된 실체가 아니다. 국경과 문화는 끊임없이 진화하고 있다. 관습적으로 대륙으로 묘사되는 유럽은 지리적인 대륙이라기 보다는 문화적인 대륙이다. 유럽은 중국, 인도, 러시아, 서아시아를 포함하는 유라시아와 인접한 땅덩어리다.”

 오! 이럴수가… 유럽을 새롭게 보게 한다. 과거 오리엔탈리즘 시각이었던 발전된 유럽과 유럽을 벗어난 낙후된 지역의 이분법이 아니다. 유럽과 아시아, 신대륙이 모두 연결되어 있다니.. 최근의 글로벌리즘에 부응하는 MET의 예술해석을 보여주는 시각이다.. MET의 변화를 느끼기에 충분하다.

 현대의 예술학이 낯설게 하기를 통한 관습 흔들기가 이곳에서 심미적 현대성으로 우리를 부른다.

우리가 그동안 ‘Look’했다고 느꼈던 것을 ‘Again’하라는 MET의 목소리이다. 예술의 지향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삶에서 과거의 삶으로 확장시켜 주고 있다.

 이제 전시장으로 들어가보자. 그러나 전시장에 들어왔다고 결정의 문제가 해결된 것이 아니다. MET가 소장한 300만점 만큼은 아니지만, 이 전시회만도 700점의 작품이 있다.

여유롭게 하루를 둘러본다면 충분히 감상할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Look again할 만한 작품들을 선택해보자.

 첫번째 만나는 작품은 400년의 시간이 한 공간안에 공존하고 있는 제단화형식의 두 작품이다.








Beckmann의 The Beginning(1946-49)과 Jean Bellegambe의 The Cellier Altarpiece(1511-12)가 400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같은 공간에 놓여있다. 3면제단화라는 작품의 형식적 유사점 때문일까? 그게 다는 아닐 거다.

독일태생으로 나찌정권을 피해 신대륙 미국으로 망명 후, 뉴욕에서 사망한 beckmann의 그림에 그려진 ‘말을 탄 인물’은 ‘성 게오르기우스(영어식 세인트 조지Saint George)’를 상징한다. 성 조지는 로마군인 출신이다. 용을 무찔러서 그 나라를 기독교로 개종시켰다. 그가 종횡무진한 공간은 흑해 연안으로 후에 기독교와 이슬람교가 충돌하는 지역이다. 이번 전시가 기독교의 땅 유럽을 넘어서 이슬람과 아시아지역까지 아우르는 ‘다시 보기’라는 점에서 시사점이 크다.

 두 종교의 충돌지점에서 용을 무찌르는 표현, 그가 구원하는 화해와 확장의 표현이다. 전시장의 맨 첫번째 작품에서, Max Beckmann의 일생과 성 조지의 삶을 통해, 우리가 전통적으로 갖고 있던 유럽의 의미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 옆 중세 제단화(Altarpiece)는 종교적 의식을 위해 제작된 대형 회화 작품으로 성인들의 삶, 성경 이야기 등을 다룬다. 종종 주교나 성인들을 포함한 신성한 인물들을 표현한다. Jean Bellegambe의 The Cellier Altarpiece 역시 이 같은 제단화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  <일반적으로 판넬(panel)이라고 불리는 여러 작은 판들에 여러 장면이나 인물들을 그려서 조립된 작품이다. 이러한 판들은 일반적으로 중앙 부분에 큰 주제를 다루는 주 판넬(center panel)과 양쪽에 붙은 날개 판넬(side panels)로 구성된다. 종종 주 판넬 위에는 보통 하나의 중요한 장면이나 인물이 그려졌고, 날개 판넬에는 부수적인 이야기나 성인들의 생애를 다루는 장면이 그려진다>

제단화가 바라는 구원은 현재 삶이 슬프기 때문이다.  지금 여기가 행복하지 않기 때문이다. 행복하지 않은 현실에서 신의 구원을 바라는 제단화는 경험하지 못한 죽음, 그래서 전수되지 못하는 저승에서라도 구원을 바라는 그리움이다. 제단화를 통해 현재의 삶과 미래의 구원이 혼재한다.

망명한 20세기작가와 16세기작가의 구원에 대한 희구(希求)가 21세기 뉴욕의 동일 공간에서 각자의 그리움을 표현하고 있다.

400년의 시간속에 같은 염원을 공유하고 있는 두 작품이 한 장소에 있는 것만으로도, 이번 전시가 첫 작품부터 우리에게 전달하는 따뜻한 감촉을 느끼게 해준다.
 
● 신을 만나봤으니, 이제 사람을 만나볼 시간이다. 우리가 사람을 만날 때 가장 먼저 보게 되는 것은 얼굴이다. 상대방을 예쁘다고 할 때 얼굴이 예쁘다고 하지, “당신의 심장이 아름답다”라고 하지 않는다. 두 발로 걷는 호모사피엔스에게 얼굴은 자신과 타인이 구별되는 시작점이자 대부분이다. 그런 점에서 네델란드화가들의 초상화는 신에서 인간으로 초점이 변하는 15세기 유럽의 사회변화를 잘 보여준다. 신이 중심이던 시간에는 회화에서 개별인간 각각의 외향은 큰 의미를 갖지 못했다. 요즘 말로 ‘내면이 중요하다”의 중세버전일 것이다. 그러나 점점 ‘사람’으로 중심이 변해왔고 종교개혁과 자본주의의 교차점인 네델란드는 이런 변화의 중심지였다. 이들은 단순히 사람을 그린 것이 아니라 그들이 살고 있던 시대를 사람의 얼굴에 비춰주었다는 점에서 그 당시 시대화가이자 사회화가였다.

Hans Memling의 Maria Portinari(1470)과 Hugo van der Goes의 Portrait of a Man(1474)의 초상화를 보자.




그럼 당시 초상화의 양식적 특징은 무엇이었을까?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이 실제 모델의 사실적표현, 피부질감 같은 세부적인 묘사, 모델을 돋보이게 하는 배경의 단순화를 꼽을 수 있다.
즉, 의뢰인을 돋보이게 하는 목적에 충실한 회화양식으로 볼 수 있다.
Hans Memling과 Hugo van der Goes의 그림 역시 이런 양식에 충실한데 Hugo van Goes의 초상화 속 남성은 마치 아침에 면도한 듯한 흔적까지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그렇다면 이 초상화에서 우리가 ‘다시’ 볼 내용은 무엇일까?

당시 돈 되는 그림으로는 교회라는 확실한 소비자가 있는 종교화와 함께, 부유한 중산층의 초상화가 대표적이었다. 특히 가족 초상화는 등장인물의 숫자에 따라 가격을 받을 수 있었다. 위 그림들은 한 사람 가격이겠지만, 만약 열명이 등장한다면 화가가 받을 수 있는 그림가격의 기대치는 열배만큼 늘어나게 된다.
(렘브란트의 ‘야경’에 등장하는 인물은 30명이 넘는다)
 
신에서 인간으로, 시대의 변화를 반영하는 사람의 얼굴을 자본주의의 숫자관념으로 가치화 시킨 네델란드의 초상화는 그 자체의 예술적 가치와 함께 아시아와 신대륙으로 확장하는 유럽의 자본주의 팽창을 잘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인간을 봤으니, 다음번에는 신의 영역으로 들어가 보자.



https://www.d-art.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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