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그림 속 나무 이야기 ⑪ ] 세종대왕이 사랑한

by 데일리아트

김홍도의 춘한맥맥(春恨脈脈)

조선 후기의 대화가 김홍도(金弘道)는 익살스러운 풍속화와 세밀한 인물 묘사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말년에 접어들며 남긴 그림을 보면 한층 차분해지고 절제된 분위기를 담고 있습니다. 그 대표작 중 하나가 말년에 그렸다고 하는 춘한맥맥(春恨脈脈)입니다. ‘춘한맥맥’은 봄날의 쓸쓸한 정한(情恨)을 뜻하는 말로, 그림의 분위기를 고스란히 담은 제목이기도 합니다. 이 작품은 한 여인이 담장 너머로 피어난 앵두나무를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장면은 단출하지만, 그 안에는 정원 공간, 계절, 감정, 식물이 정교하게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녀는 마치 앵두가 익을 무렵을 계산하고 서 있는 듯합니다. 바라보는 눈빛은 그윽하지만 처연합니다. 그녀의 몸짓 또한 아련해 보입니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뚝뚝 흘릴 것 같은 그녀는 기와 담장에 핀 앵두나무 꽃을 고목 아래에서 지켜보며 바라봅니다. 정면에는 단순해 보이지만 제법 규모를 갖춘 큰 문이 있고 좌우 담장 벽에는 풍경화로 추정되는 그림이 그려져 있습니다. 품위 있는 고급 주택의 후원임을 나타내고자 한 것 같습니다.

그림 속 여인의 차림이나 커다란 후문의 형태 및 담장의 벽화 등이 필자의 눈에는 중국풍으로 느껴지는데요. 김홍도가 이 그림을 그리게 된 배경이나 과정이 알려져 있지 않은 상태에서 중국 대저택의 모습일 것이라는 전제로 그림 속으로 들어가 봅니다. 그림 가운데의 큰 나무는 수양버들로 보입니다. 대체로 가지가 길게 늘어지는 중국의 버들은 수양버들이라고 필자는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비슷한 나무로는 능수버들이 있습니다. 둘의 구분은 쉽지 않지만 굳이 따진다면 우리나라의 긴 가지가 늘어진 버들은 능수버들이라고 필자는 구분합니다. 그림에서의 수양버들은 줄기가 거의 썩어버리고 껍질만 부분적으로 남아있는 노거수(老巨樹)입니다. 아마 이 저택이 오래된 역사가 있다는 점을 고목나무를 통하여 비유적으로 나타낸 것으로 보입니다. 한편, 중국에는 수양버들과 닮은 위성류渭城柳란 나무가 있습니다. 중국 전국시대 진(秦)나라의 수도로 유명한 셴양(咸陽)의 옛 이름인 위성渭城 일대에 많으며 버들 류(柳)을 닮았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보면 그림 속의 나무는 위성류일 가능성도 높습니다.

이 그림의 주요 나무인 앵두나무는 중국 북서부에 널리 분포하며 위성류와 자람 지역이 겹칩니다. 중국풍의 그림에 위성류와 앵두나무가 같이 있으면 오히려 자연스럽습니다. 우리 화가의 그림에도 윤두서의 군마도 등 가끔 위성류를 찾을 수 있습니다. 오른쪽 담장 안팎에 자라는 4그루의 나무 중 좀 옅은 색으로 처리된 가운데의 매화나무 한 그루 이외의 나머지 3그루는 앵두나무입니다. 앵두나무는 키가 2에서 3m 정도 자라는 작은 갈잎나무이며, 양력 4월 중순 무렵에 거의 하얗거나 연분홍 꽃이 핍니다. 잎이 나기 전 가지 전체에 걸쳐 잔뜩 꽃을 피우는데, 그림에서는 연둣빛 새잎 사이사이에 꽃들이 보입니다. 매화나무는 잎이 앵두나무보다 더 많이 피었고 꽃은 꽃잎만 남아있을 정도로 거의 져버렸습니다. 앵두나무보다 훨씬 먼저 피는 매화는 이제 꽃이 끝나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두 나무 모두 꽃이 거의 지면서 잎이 피고 있어 계절은 봄이 무르익어가는 양력 4월 중하순경임을 알 수 있습니다. 꽃이 지고 나면 앵두나무는 이후 불과 두 달 남짓한 6월 초 중순에 초고속으로 열매 만들기를 합니다. 앵두는 뭇 과일 중 가장 일찍 익는 과일이지만 열매라야 굵은 콩알 굵기에다 하나씩 들어 있는 씨앗이 열매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고 과육이 적어서 먹을 게 많지 않습니다. 오늘날에는 과일 축에도 넣지 않지만, 옛날에는 가장 먼저 익는 과일이므로 임금님의 제사상에 올라가는 영예도 있었습니다.

옛사람들은 잘 익은 앵두의 붉은 빛깔이 티 없이 맑고 깨끗하여 여자의 예쁜 입술에 비유할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앵두 같은 입술’이라는 표현을 했을 겁니다. 꽃과 열매를 보기 위하여 우리나라와 중국의 정원에서는 한두 그루씩은 꼭 심었던 나무인데요. 앵두는 최치원 선생의 글에 등장하는 것으로 봐서 우리나라는 신라 이전에 들어온 것으로 짐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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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 ‘춘한맥맥(春恨脈脈·18세기 말~19세기 초)’, 종이에 담채, 33.5x57.8cm, 간송미술관담벼락을 따라 올라 온 가지가 앵두나무다.

그림에서 세로쓰기 한자로 적힌 제화시(題畫詩)내용을 살피자면 사연이 구구절절합니다.

方春脉脉千般恨 방춘맥맥천반한 (바야흐로 봄은 맥맥(脉脉) 왔건만 여전히 한(恨)스럽구나)

只有墻頭綠萼知 지유장두녹악지 (이 사랑을 알아줄 이는 단지 너, 담장 위에 앵두나무 꽃뿐)

맥맥(脉脉)은 ‘끊이지 않는 모양’을 의미하며, 녹악(綠萼)은 ‘잎과 꽃’을 말합니다. 따라서 앵두나무 꽃을 가리키는데요. 앵두꽃은 다섯 꽃잎으로 이루어진 하얀(연분홍) 꽃이 가지에 끊이지 않고 수없이 피어납니다. 꽃을 먼저 피워내고, 이윽고 잎을 드러냅니다. 단옷날이 가까워지면, 꽃을 지우고서 열매가 주렁주렁 달립니다. 처음엔 초록색 둥근 열매 형태였다가 차츰차츰 노란 빛깔로 바뀌고 완전히 익으면 탐스런 붉은 열매를 엄지손톱 크기로 쏟아냅니다. 해마다 앵두가 익을 무렵은 단오(端午·음력 5월 5일) 무렵인데요. 붉은 열매를 따서 시큼하고, 달달하게 입속으로 오물오물 맛볼 수 있습니다. 옛날에는 동네 우물가에 앵두나무가 참 많이도 보였고 잘 자랐습니다. 오죽하면 “앵두나무 우물가에 동네 처녀 바람났네”라는 노랫말이 있을 정도였으니까요. 또한, 앵두는 오랜 세월 동안 사람들에게 봄의 맛이자 색이며, 감각을 깨우는 존재였습니다. 조선시대 민요나 시조에는 ‘앵두 같은 입술’이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합니다. 붉고 매끄러우며 작은 열매는 젊음과 생기, 아름다움의 상징이 되었고, 이는 회화 속에서 여인의 시선을 사로잡는 소재로 적합했습니다. ‘춘한맥맥’ 속 여인이 앵두나무를 바라보는 장면은 단순한 계절 묘사가 아니라, 사랑에 대한 회상, 혹은 지나간 시절의 그리움이 담긴 상징으로도 읽힐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공동 우물이 사라지고 새로 아파트가 들어서면서부터는 사람들 사는 마을, 어디에서도 쉽게 앵두나무를 발견하기 어려워졌습니다.

참고로 일본에서 앵두는 ‘유스라우메’라고 하는데, ‘우메’는 꽃이 매화를 닮았다는 뜻이며, 접두어인 ‘유스라’는 앵두가 우리나라를 거쳐 일본에 전해질 때 한자어 이사락(移徙樂)이란 이름도 그대로 따라가서 변형된 것이라고 합니다.

담장과 나무, 조선 정원의 ‘경계 미학’

이 그림의 배경은 단순한 외벽이 아니라, 조선시대 정원 구성의 핵심 요소 중 하나인 담장-牆입니다. 담장은 물리적 경계를 넘어, 시선을 차단하고 다시 열어주는 미학적 장치로 기능했습니다. 김홍도는 이러한 담장의 구성을 통해 내(內)와 외(外), 현실과 이상, 안과 밖의 대비를 절묘하게 설정했습니다. 담장 안에 서 있는 여인은 단순한 관람자가 아닙니다. 그녀는 자신의 처지 너머, 봄의 생동감이 넘치는 정원을 그리워하는 시선으로 외부를 응시합니다. 그리고 그 시선 끝에 자리한 것이 바로 꽃피는 나무들입니다. 이때 김홍도가 그린 정원은 인공적이지 않고 매우 자연스럽습니다. 나무들은 마치 그 자리에 원래 있었던 듯 담장 가까이에 심겨 있고, 가지는 길게 늘어져 있습니다. 그중 특히 눈에 띄는 나무가 바로 봄날의 상징으로 그려진 앵두나무입니다.

가지마다 꽃이 피고 새순이 돋아나며, 아직은 열매를 맺기 전의 생기 가득한 상태입니다. 앵두나무는 잎보다 꽃이 먼저 피는 특성 때문에 이른 봄의 정취를 대표하는 나무로 여겨져 왔습니다. 화면 오른편에 배치된 앵두나무는 나무 자체보다는 그 나무를 바라보는 시선, 그리고 그로부터 불러일으켜지는 감정을 전달하는 장치입니다. 화려한 붓 놀음이나 세밀한 묘사 대신, 김홍도는 공간감과 구성으로 식물의 생기를 드러냅니다.

앵두나무는 조선시대 정원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소교목입니다. 창덕궁, 경복궁, 종묘 등지에 식재된 기록이 있으며, 생육이 까다롭지 않고 열매가 아름다워 궁궐의 금천교 주변이나 민가의 우물가, 뒷마당 등 다양한 공간에 널리 활용되었습니다. 특히 앵두는 조선의 왕실 제사에 사용된 귀한 과일이기도 합니다. 종묘 제사상에 ‘변(籩)’이라는 그릇에 담겨 올랐으며, 세종대왕은 앵두를 즐겨 드셨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세자였던 문종이 아버지를 위해 직접 후원에 앵두나무를 심었다는 일화도 전해지는데요. 문종이 앵두나무를 직접 심었다는 내용은 성현이 지은 ‘용재총화’에 실려 있습니다. 세종이 일찍이 앵두를 좋아해 문종이 세자 시절 손수 앵두나무를 심어 궁궐 안에 앵두나무가 가득하다는 내용입니다. 또한 ‘문종실록’과 ‘중종실록’에 보면 문종이 궁궐 후원에 앵두나무를 심은 뒤 손수 물을 주고 길러 익기를 기다려 열매를 올리니, 세종이 이를 맛보고 밖에서 올린 것과 세자가 직접 심은 것은 같을 수 없다고 기뻐했다는 내용도 실려 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은 김홍도의 그림에서 앵두나무가 단지 정원의 일부가 아니라, 나무 한 그루가 왕실의 효심과 정성을 담은 식물이었음을 말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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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두와 살구 등을 담아 조선 왕실 제사에 올렸던 '변(籩)'. 변은 물기가 없는 마른 제수를 올릴 때 사용한다. 대나무를 잘게 쪼개 엮어 장구형으로 만들었다. 현존하는 변 중에는 그릇과 굽이 대칭되어 연결된 형태도 있다.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세종이 사랑한 과일, 앵두


白玉盤中滿盛櫻桃呈近侍 백옥반중만성앵도정근시(백옥반 가운데 앵두를 가득 담아 근시에게 올리노니)


黃金杯裏盈斟美酒權使星 황금배리영짐미주권사성(황금 술잔 속에 좋은 술 가득 따라 사신에게 권합니다)


櫻桃紅似火 앵도홍사화(앵두는 불같이 붉고)


楊柳翠如煙 양류취여연(버들은 연기처럼 푸릅니다)


1470년 5월, 이전 해에 승하한 예종의 고명(誥命ㆍ중국 황제가 조선 임금 즉위를 승인한 문서)과 제문(祭文ㆍ죽은 왕을 위로하는 글)을 가지고 온 명나라 사신 강호와 조선의 통역사 김맹경이 서로 화답하며 지은 시입니다. 강호는 술을 잘 마셔 조선 사람 중에서 대작할 이가 없을 정도였던 것으로 전해지는데요. 아마도 김맹경과 함께 있던 자리에서 술을 마시고 흥이 올라 앵두를 보고 시를 짓자고 한 것 같습니다. 5월이면 앵두가 한창일 테고, 앵두는 중국 화북 지방이 원산지이므로 아마도 익숙했을 것입니다. 앵두가 우리나라에 언제 처음 심어졌는지 정확하게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성종 때 우리나라의 역대 시문詩文을 모아 만든 ‘동문선東文選’에 통일신라시대의 문장가 최치원이 임금이 내려준 앵두에 대해 올리는 감사의 글(謝櫻桃狀ㆍ사앵도장)이 실린 것으로 보아 그 전에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 같습니다.


계절에 따라 새로 난 과일이나 곡식을 조상의 혼에게 올리는 의식을 천신(薦新)이라고 하는데, ‘세종실록’ 오례나 ‘종묘의궤’에 보면 앵두는 5월에 살구와 더불어 변(籩)이라는 제기에 담아 올렸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과거급제자를 위한 잔치, 앵도연


앵두나무는 앵도나무라고 처음 불렸습니다. 중국이 고향인 나무이다 보니 이름도 한자와 같이 왔습니다. 앵두나무 앵櫻 이외에도 중국에서는 꾀꼬리가 먹는다 해서 꾀꼬리 ‘앵(鶯)’자를 쓰고 복숭아를 닮았다 해 복숭아 ‘도(桃)’자를 써서 앵도라고 불렀다고 하는데요. 그것이 시간이 지나면서 이 땅에선 앵두가 됐습니다. 꾀꼬리가 좋아하는 열매 또는 꾀꼬리가 입에 머금고 있는 열매라는 의미에서 생긴 이름인데, 이는 앵두와 꾀꼬리의 특성이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앵두는 봄에 결실을 맺는 열매이고 꾀꼬리는 앵두가 열매를 맺을 무렵인 봄에 찾아오는 새이기 때문입니다. 20세기 대부분의 집 울타리 안에는 앵두나무가 있었습니다. 꽃이 예뻐서도 심고, 새빨간 열매는 훌륭한 간식으로, 후식으로 사랑받아 왔습니다. 40대 이상 연령층의 기억을 되살려 드리자면 예전에는 학교 앞 문방구나 재래시장 입구에서 주전부리로 종이컵에 담아 파는 상인들이 꽤 있었음을 기억하실 겁니다. 요즘은 거의 사라졌지만....


한편, 앵두는 가장 먼저 열리는 첫 과일인 만큼 특별한 대접을 받았는데, 대표적인 것이 조선에서 과거시험에 장원급제한 선비에게 열어준 잔치로 앵두 잔치, ‘앵도연(櫻桃宴)’입니다. 이 이름이 붙은 까닭은 앵두꽃이 활짝 필 무렵, 또는 앵두가 무르익을 무렵에 과거시험 급제자를 발표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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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장원급제 잔치, ‘앵도연’


천재 화가 김홍도를 떠올리면 여러 수식어가 떠오르지만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스승 강세황입니다. 혼자서 익히고 배우려면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수년이 걸릴 일을 좋은 스승을 만나면 하루아침에 건너뛸 수도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좋은 스승을 만난다는 것은 일생일대의 행운이기도 한 것입니다. 운도 따라야 하는 것이죠.


어릴 적부터 그림에 재주가 출중하였던 김홍도는 중인으로 신분이 하락한 과거 양반 집안의 자제였습니다. 김홍도는 친척의 소개로 일곱 살의 어린 나이에 마침 그의 집 근처에 살고 있던 당대 최고의 화가 강세황을 찾아가게 됩니다. 그의 뛰어난 재능을 한눈에 알아본 강세황은 김홍도에게 그림 그리는 법을 지도하고 20세 전후에 궁중 도화원에도 들어가게 하여 줍니다. 그리하여 20세를 갓 넘기면서부터 김홍도는 조선 최고의 화가로서의 길을 걷게 되는데요. 그의 가치관 역시 자신감에 넘치게 됩니다. 하지만 말년이 되며 그의 뒷배 같은 정조의 죽음 뒤로는 후원 세력도 끊어지게 되고 병고와 가난이 겹치며 고생을 했던 것으로 짐작이 됩니다.


그래서였을까


말년의 그림 중 하나인 춘한맥맥의 제화시가 다시 한번 귓가를 맴돕니다.


‘봄은 한창인데 맘속에는 한恨이 서려 있고, 그러한 자신의 맘은 담장 위 푸른 풀잎만이 알 것’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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