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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과 추상의 경계에서 -《운보 김기창》회고전

by 데일리아트

천안 아라리오 갤러리 《운보 김기창》
2025. 2. 18. - 2026. 3.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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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아라리오 갤러리 전시장 벽면 /사진: 원정민

천안 아라리오 갤러리는 올해 2월 18일부터 내년 2026년 3월 22일까지, 김기창의 작품세계를 조망하는 대규모 회고전인 《운보김기창》전을 개최하고 있다. 이번 전시는 영모, 화조, 풍속화를 비롯해 성화· 인물 · 추상 · 문자도· 바보산수 · 청록산수 등 운보 화풍의 다양한 국면을 아우르며, 한 작가의 방대한 회화적 여정을 집중적으로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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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창, 판상도무(版上跳舞, 널뛰기), 1931 (조선미술전람회 10회 입선 ), 원본소실 /출처:조선미술전란회 도록

김기창은 어린시절 장티푸스로 인한 고열로 청각을 잃은 후, 오히려 극도로 예민한 시각적 심미성을 바탕으로 그만의 예술세계를 구축한 작가다. 어린 시절부터 그림에 재능이 있던 김기창은 17세가 되던 해에 1930년 이당 김은호(以堂 金殷鎬, 1892~1979) 문하에 들어가 정밀한 선묘와 짙은 채색을 특징으로 한 인물화를 배우게 된다. 김은호 문하에 들어간지 6개월만인 1931년 <판상도무(版上跳舞, 널뛰기)>로 제10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했고, 이후 특선을 거듭하며 창덕궁상 수상에 이르기까지 화단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당시 그의 작품은 일본식 채색화의 미감을 충실히 반영한 풍속 중심의 구성으로, 선전 중심의 조선화단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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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창, 정청, 1934, 종이에 채색, 193x30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그러나 해방이후에는 일본식 채색화는 친일의 잔재로 여겨졌고 김기창 역시 새로운 화풍을 모색해야했다. 그는 섬세한 공필의 채색화에서 벗어나 힘찬 묵선 중심의 수묵화로 전환하였으며, 화면의 공간을 분할하고 재조립하는 입체주의적 구성과 반추상적 실험을 시도했다. 한국전쟁기에는 예수의 출생부터 부활까지 총 30점의 연작으로 구성된 〈예수의생애〉 시리즈도 제작하면서, 종교적 주제와 민족적 시각을 조형적으로 결합하는 성과도 이루었다. 이번 전시에서도 나와있는 〈예수의 생애〉 시리즈는 그 배경, 복장, 인물 등을 모두 조선시대로 변환시켜 한국적 성화를 제작한 것으로 그의 예술적 역량을 다시금 확인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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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창, 예수의 생애-수태고지, 1952~1953, 비단에 채색, 63x75cm, ©(재)운보문화재단

1950년대 후반에는 한자의 획을 자유분방한 운필로 표현하여 추상화한 문자도를 선보이며 한국화의 추상화 가능성을 시도하였다. 더불어 이 시기는 운보의 화조영모도가 크게 주목받았던 때이기도 하다. 전시된 작품의 경향을 크게 나눠보면 화조영모도, 풍속화, 청록산수, 바보산수, 추상으로 정리할 수 있는데, 그 중 가장 많은 비율로 출품된 작품군은 화조영모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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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전경 /사진: 원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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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창, 군마도, 1950~1960년대 추정, 종이에 수묵채색, 154x80cm(x4), ©(재)운보문화재단

이번 전시는 1950년대에서 70년대에 이르는 시기의 대표 화조영모도가 다수 출품되어, 그 변화의 양상을 따라가볼 수 있다. 초창기 작품에서는 사실적 묘사와 조선화풍의 안정감 있는 구성이 드러나며, 후기에는 보다 과감하고 대담한 필선, 자유로운 공간 구성, 상징적 색채가 강조된다. 예를 들어, 〈군마도〉나 〈밤새(부엉이)〉, 〈비파도〉 등은 필획의 힘과 구도의 자유로움이 인상적인 작품으로, 작가가 단순한 전통 재현을 넘어 생동하는 감각으로 현실을 새롭게 조직하고자 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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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창, 만추의 이미지, 1964, 종이에 수묵채색, 137.5x133cm, ©(재)운보문화재단

전시실 2층으로 이어지는 공간에서는 김기창 회화의 후반기 양상이 집중적으로 조명된다. 문자도 · 청록산수 · 바보산수뿐 아니라 완전한 비구상 회화도 다수 포함되어 있다. 구체적인 대상 없이 색면과 획의 리듬, 여백과 번짐만으로 구성된 이들 작업은 한국화의 추상화 가능성을 탐색한 실험이자 전통 회화 재료에 대한 물성적 접근이 극대화된 결과물이다. 한지를 구겨서 구겨진 면에 물감을 묻혀 찍어내는 마티에르 기법을 실험한 <만추의 이미지>, <태고의 이미지> 시리즈는 1963년 한국 작가 최초로 제 7회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참가했을 때 출품했던 작업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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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창, 불새, 1968, 종이에 수묵채색, 31x39cm, ©(재)운보문화재단

그의 추상작업은 적색과 황색을 주조로 한 표현주의적 경향의 <불새>, <태양을 먹는새> 등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1950년대부터 잠깐 등장했던 서체를 해체하고 조형성을 탐구하는 〈문자도〉 연작에서도 나타났다. 이처럼 후기 작업으로 갈수록 그는 구상과 상징, 추상과 개념의 경계를 넘나들며, '전통 회화의 현대화'라는 과제를 스스로에 대한 실험으로 밀고 나갔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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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창,여름 날(夏日), 1988, 비단에 채색, 68x135 cm, ©(재)운보문화재단

2층전시실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단연 바보산수 연작이다. 바보산수는 운보 김기창의 말년화풍이자 그를 대표하는 화풍으로, 민화의 자생성과 표현의 자유를 바탕으로 등장하였다. 김기창은 바보산수를 통해 1960년대 후반부터 시도해온 청록산수의 이상적 배경에, 오랫동안 그려왔던 풍속화의 인물을 결합하여 자신만의 회화적 이상향을 시각화하였다. 이 시기 바보 산수는 개략적인 선들로 윤곽을 긋고 원근감 없이 평면적으로 대상을 배열함으로써 형태를 단순화하는 것이 특징이다. 굵고 묵직한 먹선으로 산의 형태를 단순하게 형상화하고, 평면적으로 배열된 인물과 사물은 원근 없이 화면을 구성한다. 이처럼 단순한 선과 색, 여백 속에서도 강한 에너지와 생동감이 공존하며, 김기창 특유의 조형 언어가 응축된 작품군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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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래현, 불안, 1962, 종이에 채색, 121x105 cm, 아라리오갤러리 소장

또한 전시 한켠에는 김기창의 부인이자 동시대 여성 작가 우향 박래현(雨鄕 朴崍賢, 1920~1976)의 작품이 함께 소개된다. 한국화의 근현대적 전환기를 각기 다른 방식으로 관통한 두 작가의 궤적이 나란히 배치된 이 구성은, 개인의 회화적 여정을 넘어서 당대 미술사의 다양성과 확장성을 보여주는 장치로도 읽힌다. 김기창이 전통을 기반으로 한 동양화의 추상화 가능성을 밀도 있게 탐색했다면, 박래현은 서구적 조형 감각과 여성 특유의 섬세한 감수성, 서사적 화면 구성을 통해 그 경계를 부드럽게 확장시켰다. 두 사람은 생전에 각자 개인전을 여는 대신, 함께 부부전을 열며 창작과 전시를 공유한 예술적 동반자였다. 한 공간에서 서로의 작업을 지켜보며 평생 교류하고 자극을 주고받았던 이들의 관계는, 작품 세계에서도 조화와 차이를 동시에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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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보 김기창, 우향 박래현, 등나무와 참새, 1950s, 종이에 채색, 169x335 cm (154x61.7cm x 4 ea.) ©(재)운보문화재단

이번 전시에 출품된 <등나무와 참새>는 우향과 운보가 합작한 보기 드문 작품으로, 화면을 가로질러 이어지는 식물의 선과 새의 위치, 붓질의 차이 속에서 두 작가의 조형 언어가 어떻게 서로 조응하고 있는지를 흥미롭게 보여준다. 이 작품은 단순한 협업을 넘어, 동시대적 예술가로서 각자의 목소리를 간직한 채 조화를 이루었던 그들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시각화한 전시의 주요 포인트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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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창, 비파도, 1970,비단에 채색,171.5x393cm (164x 61.5cmx2ea, 164x64.5cmx4 ea.) ©(재)운보문화재단

1913년에 태어나 일제강점기, 해방, 전쟁, 산업화, 국제화의 격랑을 온몸으로 통과한 김기창은 시대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반응하며 끊임없이 회화적 언어를 갱신해온 작가였다. 채색화의 공필에서 출발해 수묵화, 입체적 구성, 성화 연작, 문자도, 바보산수, 완전추상에 이르기까지 그의 회화는 단지 양식의 변화를 넘어, 늘 시대의 감각을 새롭게 조직하려는 하나의 정신적 실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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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전경 /사진: 원정민

이번 천안 아라리오 갤러리의 전시는 그 긴 여정을 공간 속에 압축해 보여준다.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그것에 안주하지 않았던 한 작가의 치열한 탐색, 그리고 ‘한국화란 무엇인가’에 대한 평생의 질문과 응답이 다층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무엇보다 이 전시는 단순한 회고가 아닌, 김기창이라는 예술가를 통해 우리가 다시 묻게 되는 현재의 질문이기도 하다.

오늘, 그의 그림 앞에 선 우리는 어쩌면 다시 처음처럼 묻고 있는지도 모른다.

전통이란 무엇인가?

그 안에서 우리는 무엇을 다시 시작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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