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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자에게 들려주는 서울 이야기 35] 문정왕후가 묻힌

by 데일리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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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왕후가 묻힌 태릉, 이재영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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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릉 /사진: 이재영

서울 북동쪽 노원구 공릉동 소나무 숲길 사이, 언뜻 스쳐 지나가면 그저 작은 공원처럼 보이는 곳. 그러나 그 담장 너머엔 조선의 권력사가 묻혀 있다. 태릉과 강릉. 하나는 문정왕후의 능이고, 다른 하나는 그녀의 아들 명종과 며느리 인순왕후가 함께 잠든 능이다.

입구에 자리한 조선왕릉 전시관에 들르면 태릉과 강릉의 구조와 배치, 왕릉 제사 의례의 과정과 그 의미를 자세히 설명해 놓아 능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엄마와 아들 부부가 함께 가까이 있는 왕릉이 다른 곳에도 있나요?"

큰 손자의 질문에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담담히 태릉과 강릉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문정왕후 윤씨는 조선의 11대 임금 중종의 셋째 왕비이다. 그런데 문정왕후는 살아있을 때부터 남편인 중종과 함께 묻히기를 원했다. 이에 따라 그는 원래 중종의 둘째 왕비 장경왕후가 묻힌 희릉의 옆에 있던 중종의 능을 풍수상 불길하다는 이유를 들어 지금의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있는 정릉(靖陵)으로 옮겼다. 문정왕후는 이곳에서 중종과 함께 묻히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1565년(명종 20)에 문정왕후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 결국 그 바램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아들 명종은 옮긴 정릉 자리가 지대가 낮아 비가 오면 홍수 피해가 자주 일어난다는 이유로 어머니의 능을 지금의 태릉 자리에 모셨던 것이다.

문정왕후는 단순한 왕비가 아니었다. 중종의 둘째 왕비 장경왕후의 아들인 인종이 왕세자로 책봉된 가운데 셋째 왕비 문정왕후가 경원대군(명종)을 낳자, 인종을 지지하는 대윤(大尹)과 경원대군을 지지하는 소윤(小尹) 간의 대립이 있었다. 그러다가 1544년에 중종이 세상을 떠나자 인종이 왕위에 오르고 대윤이 정권을 잡았다. 하지만 인종이 재위 9개월 만에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나게 되자 경원대군(명종)이 12살의 나이에 왕위에 오르게 된다. 이후 명종의 어머니인 문정왕후는 왕실의 최고 어른으로 수렴청정을 하면서 권력의 핵심을 쥐게 되었고, 정권은 대윤에서 소윤으로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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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각 /사진: 이재영

태릉은 이러한 문정왕후의 능이었기 때문에 왕비 한 분을 모신 단릉임에도 불구하고 규모가 상당히 크게 만들어졌다. 봉분의 둘레석, 문석인과 무석인의 배치, 정자각까지 이어지는 축선도 권위 있게 구성되었다. 단아한 소나무 숲 아래 고요히 자리한 이 능은 소란스러운 장식이 없어도 묵직한 분위기를 품고 있다.

문인석의 얼굴은 말없이 서 있으나, 주름진 옷자락과 입술 모양은 말을 걸듯 섬세하다. 그 앞에 서 있으면 한 시대가 이 능을 중심으로 흘렀다는 것을, 말보다 더 강하게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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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릉 입구에 있는 조선왕릉전시관 /사진: 이재영

“할아버지, 이 능은 왜 왕릉인데도 사람 하나 없어요?”

이번에는 작은 손자가 궁금한듯 물음을 던졌다. 손자의 말처럼, 태릉은 적막하다. 소풍객도, 사진을 찍는 이도 많지 않다. 2009년에 태릉과 강릉을 포함한 조선 왕릉 40기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자연 지형과 유교적 예법이 어우러진 능의 배치, 능역 안팎을 둘러싼 공간 구성은 단순한 무덤을 넘어선 '질서의 건축'이다. 하지만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왕릉임에도 불구하고, 이곳은 고요하다. 그러나 그 고요함이야말로 이곳의 본질이다. 생전에 조선을 움직였던 인물들이 누운 자리. 그 자리는 군더더기 없는 예의와 침묵으로 지켜지고 있다.

명종은 죽고 나서 어머니 곁에 잠들기를 바랐다. 그렇게 태릉 오른편 언덕에 명종과 인순왕후 심씨가 함께 누운 쌍릉인 강릉이 조성된다. 그 구성이 지금까지도 조용히, 단정하게 보존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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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릉 홍살문 앞에 선 두 손자

손자들이 호기심 가득한 눈길로 봉분을 올려다 봤다.

“명종은 어느 쪽에 묻혀 있는 거예요?”

“바로 저 언덕 위 강릉에서 왼쪽 봉분이 명종, 오른쪽이 인순왕후란다. 봉분 주위에 놓인 석물들에는 하나하나 치밀한 상징이 담겨 있지. 특히 병풍석에는 구름무늬와 십이지신을 새긴 모습이 오늘날에도 제 자리를 지키고 있단다.”

도심 한복판에 이토록 단정하고도 고요한 공간이 남아 있다는 건 놀라운 일이다. 목소리를 낮춰야만 들리는 이야기들, 이곳은 그런 이야기로 가득하다.

나에게도 태릉에 대한 소회는 남다르다. 지금은 국가 대표 선수를 양성하는 선수촌이 충북 진천에 있지만, 2011년 이전에는 그 선수촌이 바로 이 태릉 옆에 있었다. 그래서 아마 30대 이상의 사람들은 지금도 선수촌 하면 태릉을 떠올리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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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살문부터 정자각까지 연결된 참도 /사진: 이재영

지금으로부터 40년 전인 1985년에 나는 한국일보 일간스포츠에 근무하면서 86 아시안게임과 88 서울올림픽 특집을 진행하였다. 그때 이곳 태릉 선수촌을 방문하여 김성집 선수촌장(1948년 런던올림픽 역도 동메달을 획득 대한민국 최초로 올림픽 시상대에 오른 기념비적인 분)을 뵙기도 했다.

1980년대 후반의 대한민국은 86 아시안게임과 88 서울올림픽 개최로 매우 들떠 있었다. “86은 디딤돌, 88은 도약대”라는 당시의 표어가 지금도 생생하다. 당시 국가대표팀 선수들은 그러한 국가 분위기에 맞추어 이곳 태릉 선수촌에서 구슬땀을 흘리면서 훈련하였고, 159개국이 참가한 제24회 88 서울올림픽 대회에서 금메달 12개, 은메달 10개, 동메달 11개로 종합 4위를 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그때의 감격이 새삼스럽게 떠오른다. 손자들이 태릉과 선수촌의 이야기를 들으며 즐거워하는 모습에 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추억의 삼매경에 빠져들었다.

태릉과 강릉, 조선왕릉은 지하철 6호선 화랑대역 1번 출구에서 내려 202번, 115번, 혹은 82A·B 버스를 타면 태릉 정류장에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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