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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일리아트 Jul 25. 2024

자연과 사람을 사랑한 화가

[너를 위한 미술사: 고암 이응노 이야기 ① ]

고암 이응노(顧庵 李應魯, 1904-1988)는 전통 서화에서 출발하여 현대적 추상 회화를 개척한 한국 화단의 선구자이다. 한국이 6·25와 ‘조용한 아침의 나라’로만 알려져 있던 1960~70년대에 유럽에 진출하여 동양 회화를 세계에 알린 거장이기도 하다. 그는 ‘문자 추상’으로 널리 알려졌지만 서화, 콜라주, 도자기, 타피스트리, 조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재료를 사용하여 거의 모든 장르를 두루 섭렵하는 창작의 열정을 보여주었다.  이 칼럼에서는 총 5회에 걸쳐 이응노의 삶과 예술 작품을 탐구해 볼 것이다.


친구 집으로 가서 길게 땋은 머리를 싹독 잘라 버렸습니다.  아마도 제 나이 열아홉이었을 겁니다. 아버지가 불 같이 화를 내시며 몽둥이를 들고 내쫓아 일주일 동안 집에도 못 들어갔습니다. 친구들 집으로 빙빙 돌았지요. 그러면서 제 인생과 세상에 대해 깊이 생각했습니다. 부모님이 시켜서 16살에 혼인을 했지만 결혼 같은 것은 별 관심도 없었고 동무들과 어울려 다녔습니다. 세상은 바뀌고 있었습니다. 친구들은 모두 머리를 자르고 서양식 양복을 입고 일본 말을 지껄이며 학교를 다녔습니다. 나만 옛날 그대로 머리를 땋은채 공자, 맹자를 읽고 있었습니다.
뒤처진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나는 이대로 있어도 괜찮은가? 묻고 또 물었습니다. 긴 머리부터 잘라버렸습니다. 그것은 혁명의 시작이었을 뿐이었습니다.
이응노의 모습, 이응노미술관에서 갈무리

이응노는 1904년 충청남도 홍성의 양반집에서 5남 1녀 가운데 넷째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양반 가문에 청백리(淸白吏) 집안이었고, 그의 숙부는 의병에 참여하였지만 나라를 빼앗긴 데 비분강개하여 자결했습니다. 부친은 대대로 마을에서 서당을 하며 한학을 가르쳤습니다. 집은 가난했지만 가문에 대한 자부심은 대단했습니다.

이응노는 집이 서당이니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한학을 배웠습니다. 경술국치 이후 마을 근처에 신식 학교가 생겼지만 마을 사람들은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았습니다. 그때는 양반의 권위가 대단해서, 하루는 군수가 직접 찾아와 이응노의 아버지에게 자제들을 학교에 보내라고 사정했습니다. 아버지는 통사정에 못이겨 장남은 한학을 공부해야 하니 일곱 살 먹은 네째라도 데려가라며 이응노를 마지못해 내어 주었습니다. 꿩 대신 닭이었던 거지요.


그 덕분에 이응노는 학교를 조금이나마 다녔습니다. 일곱 살 어린 나이에 입학했는데도 공부도 잘하고 그림도 잘 그렸답니다. 그나마도 일년 조금 넘게 다니다 그만두었습니다. 열 살까지는 서당에서 한문 공부를 했습니다. 학교로 가는 아이들이 늘면서 서당에는 사람들 발길이 점점 뜸해졌지요.  끼니를 걱정할 정도로 어려워졌지만 이응노의 아버지는 양반이라는 지조 때문에  의관을 정제한 채 아침부터 저녁까지 오직 한문만 읽었습니다. 


시대의 변화를 읽지 못하고 전통만 내세우는 이응노 집안의 분위기는 조선이 무너져 가는 과정과 참 많이 닮았습니다. 이응노가 태어난 해인 1904년 한일의정서가 체결되고 일본 제국주의는 보란 듯이 조선을 침탈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응노는 식민지 1세대인 셈입니다.

충청남도 홍성의 이응노 생가. 소박하고 정겨운 초가집이다. 뒤에는 멋진 대 숲이 있어 이응노의 작품을 떠올리게 한다.

그런 속에서도 이응노는 그림을 좋아했습니다. 틈만 나면 땅바닥이나 벽 위에, 눈밭에도 손에 잡히는 대로 아무거나 들고 그림을 그렸습니다. 고향의 자연 속에서는 어디에서나, 무엇이든지 그림 재료가 되었습니다. 그의 모든 작품에 나타나는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과 창조성은 고향에서 자란 어린 시절에 뿌리를 두고 있는 듯합니다. 그 무렵 더 배우고 싶은 소망에 인근에 사는 염제 송태회(念齊 宋泰會) 선생에게 서화를 배우기도 했습니다. 그림 실력도 늘어 농사를 지으며 틈틈이 병풍을 그려서 팔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림 그리는 것도, 화가가 되겠다는 꿈도 모두 반대했습니다. 그는 종종 동네에 있는 월산(月山) 꼭대기 부엉바위에 올라 세상을 내려다보았습니다. 눈앞 세상은 넓기만 한데 평생 산골에서 살 생각을하니 앞날이 암담하게 느껴졌습니다. 열아홉 되던 해에 아버지와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림 공부를 위해 몰래 집을 나갔습니다. 기차도 한번 못 본 시골뜨기가 서울 가서 화가가 되겠다고 무일푼으로 뛰쳐나간 것입니다.  


화가가 되겠다고 호기롭게 나왔으나 빈손이었습니다. 차비라도 벌어야 했지요. 마침 이웃 마을을 지나는데 새로 지은 산제당(山祭堂)에 산신령을 그릴 사람을 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곳에 닷새 가량 머물면서 신선과 호랑이를 그려주었습니다. 이를 옆에서 구경하던 일본 순사가 자기도 호랑이 그림을 그려 달라고 청하여 그려주고는 전부 6원을 벌어 운동화와 기차표를 사서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아무 연고도 없이 서울로 올라온 이응노는 한동안 장의사에서 허드렛일을 봐주면서 숙식을 해결했습니다. 하지만 그림을 배우러 어렵게 서울에 왔으니 먼저 그림 배울 선생님을 찾아야만 했습니다. 여기 저기 사람들에게 물어 보니 이구동성으로 서울 장안에서 가장 유명한 해강 김규진(海岡 金圭鎭, 1872-1941) 선생을 말하더랍니다. 해강 김규진은 1907년 지금의 소공동 근처에 우리나라 최초로 '천연당'이라는 사진관을 열었고 당시 영친왕의 서도(書圖) 선생이었습니다.


종로구 수송동 근처에 있는 해강 선생의 집을 물어 물어 찾아갔는데 하인만 스무 명이 있는 큰 집이었답니다. 초라한 꼴로 몇 번을 찾아갔지만 퇴짜를 맞았습니다. 그러나 믿는건 끈기와 배짱뿐이라 열다섯 번을 넘게 찾아가니까 겨우 만나 주었습니다. 겉모습은 초라했지만 양반 자제로서 예의범절을 갖춘 모습을 보고는 제자로 받아주었습니다. 이응노는 드디어 유명한 해강 선생 아래에서 서화가의 길로 들어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이응노는 어려운 현실에도 주눅 들지 않았습니다. 해강에게 “고놈 참 당돌하다”라는 소리를 들을 만큼 적극적으로 도전하고 새로운 길을 개척했습니다. 


해강 문하의 생활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해강 선생이 워낙 유명하니까 장안에 부잣집 자제들이 서화를 배우러 많이 왔습니다. 그들은 월사금은 물론이려니와 매일 주안상까지 차려 와서는 선생의 그림을 비싼 돈을 주고 사 갔습니다. 그런데 이응노는 월사금도 못내는 처지이니, 선생 댁에서 숙식을 하며 낮에는 온갖 심부름과 시중을 들어야 했고 밤이 돼서야 겨우 붓을 잡을 수 있었습니다. 해강 선생은 이응노가 워낙 대나무를 잘 그리고 눈병이 날 정도로 열심히 하였기에 ‘대나무처럼 늘 곧고 푸르게 살라’는 뜻의 '죽사(竹士)'라는 호를 주었습니다.


해강 선생 아래에서 배운 지 석달, 이응노의 나이 스물한 살 되던 1924년 제3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첫 입선을 했지요. 그렇게 서화가로서 첫 출발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 입선작은 아직 스승의 작품을 그대로 따르고 있었습니다. 집 나간 자식의 생사도 몰랐던 아버지는 조선미술전람회 입선 소식을 신문에서 보고 상경하여 이응노에게 화가의 길을 허락해 주었습니다.

이응노, 청죽, 1924, 제3회 조선미술전람회 입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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