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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일리아트 Jul 25. 2024

⑤ 혼돈에 대하여 - 에드바르트 뭉크

[미술로 생의 철학 질문하기]

에드바르트 뭉크 (Edvard Munch), 노르웨이의 표현주의 화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까지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한 세계적으로 유명한 화가이자, 심볼리즘과 표현주의의 영향을 받은 '예술적 언어'를 개발하기도 한 미술계의 위인이다. 
[미술로 생의 철학 질문하기] 시리즈는 당대를 비롯하여 현재까지 미술계에 영향을 끼치며 회자되는 예술가를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각 편마다 예술가의 삶과 작품을 통해 철학적 주제인 고통, 행복, 불완전성 등 삶의 본질에 가까운 개념을 질문한다. 


Edvard Munch, [ The Scream ] 1893

에드바르트 뭉크  Edvard Munch


미술에 아무런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뭉크의 '절규'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뭉크와 그의 예술관을 알아보기에 앞서, 불후의 명작 '절규'의 탄생 비화를 이야기해보자. 오늘 날의 오슬로, 그 시절 크리스티아니아로 불렸던 그곳은 뭉크가 받는 모든 영감의 중심지다. 뭉크가 작품을 완성한 이후에 한 말에 따르면, '거대하고 무한한 자연의 절규'를 들었을 때(자연적인 소음이라 추측할 수 있지만, 그 광경을 시각적으로 본 것이 작품에서 가장 강렬하게 작용되었을 것이다.), 뭉크는 해질녘을 걸어나왔다.


뭉크의 이 경험이자 작품에 대한 소개, 즉 비화가 바로 뭉크가 바라본 세상과 자신에 관한 총평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노을이 지고 있는 아름다운 하늘, 다리를 건너오는 저쪽 무리의 사람들, 무시할 수 없지만 멎지도 않는 사람들의 말소리, 자연의 울림, 마지막으로 그 사이에 존재하며, 결국에는 해질녘을 지나올 수밖에 없는 '나'. 


뭉크의 작품을 보며 그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우리는 그가 삶을 살아가는 데에 있어 필연적으로 맞닥뜨리게 되는 갖가지 부적합함에 관한 염증을 갖고 있는 사람임을 알 수 있다.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자아실현의 고통, 자연을 향한 경위심과 무력감을 엿볼 수 있다.


그렇지만 뭉크를 둘러싼 감정 중에 가장 큰 감정은 '혼돈'이다. 보편적인 개념으로 '혼돈'은 감정보다 상황을 말하는 단어다. 그러나 그의 생애에는 늘 혼란과 불안이 앞서 있었고, 그의 삶을 미적지근하게 덮고 있는 이 복합적인 감정은 혼돈 혹은 혼란이라고 설명해도 무방하다.  

Edvard Munch, [ Evening on Karl Johan Steet ] 1892

보이는 것을 그려내는 


뭉크의 작품은 매우 강렬하다. 하지만 의외로 그가 영감을 얻고 그림으로 그려내는 풍경은 매우 일상적이다. 어딘가로 일제히 향하는 생기 없는 표정의 사람들. 위 작품을 보면, 그의 명성에 대한 의문이 생길 것이다. 묘사가 전혀 들어가 있지 않은 인물들과 명도(밝음과 어두움의 정도, 명도의 대비를 표현하는 것은 묘사의 기본이다.)가 불분명하다. 이러한 작품의 특징을 보면 그린 이의 실력을 가늠하기 힘들어진다. 


뭉크는 없는 것을 그리는 화가가 아니었다. 그는 보이는 것, 존재하는 것을 그려내는 화가였다. 이 '칼 요한 슈테트의 저녁'은 제목으로 유추해 보았을 때 노동자, 시민들의 귀갓길 풍경을 그려낸 작품이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 앞서 말했듯 뭉크는 보이는 것, 존재하는 것을 그려낼 줄밖에 모르는 화가이고, 그러한 그에게서 나오는 현실적인 비애는 공감을 불러일으켰고, 묘한 감상과 감탄을 남겼다. 


그의 어린 시절은 순탄치 않았다. 가족과 주변인들은 병에 걸려 있었으며, 수많은 사별을 겪었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가족인 아버지는 사이비에 빠져 있었고, 그는 고질적으로 가족들에게 퍼져 있던 정신질환을 물려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 물들어 있었다.


그러한 생각을 안고 크리스티아니아 왕립미술디자인학교에서 공부한 그는, 허무주의자 한스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그는 뭉크의 신경질적이고 불안한, 우울한 성향을 작품으로 승화해내길 바랐으며, 그 감정을 담아내는 것이 엄청난 관건이자 강점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스의 영향으로 뭉크는 이후 자유분방한 삶을 살기 시작했는데, 그때를 기점으로 그의 독특한 화풍이 나타났다. 


그의 색채는 미술계의 거장 여럿에게서 영향을 받았다. 폴 고갱, 빈센트 반 고흐,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의 작품들은 그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어주었다. 추후에 뭉크는  '생의 프리즈'라고 불리는 이른바 '삶, 사랑, 죽음, 순환' 을 다루는 주요 그림들을 그려냈다.  '생의 프리즈'는 뭉크 자신이 작품을 만들기 전 기획한 것은 아니었으나 이후의 작품이 나타내는 정형적인 주제가 있었고, 이러한 주제들을 본딴 것이 '생의 프리즈'다. 또한 그는 어려서부터 병과 죽음에 매우 밀접한 삶을 살았다. 그 때문인지 병과 고통을 다루는 그림도 많이 그려냈다. 우리가 흔히 아는 염세주의적인 뭉크가 비로소 완성된 순간이었다. 

Edvard Munch, [ Vampire ] 1895

불안의 거대한 틈


위 작품의 제목은 '흡혈귀'다. 짧은 머리의 남성이 주황색의 긴 머리를 가진 여인의 몸을 감싸안은 채로 고개를 숙이고 있고, 여인은 그런 남성을 보듬듯 껴안고 있는 그림이다. 이러한 작품의 전반적인 서술만을 보았을 때에는 굉장히 몽환적이고 낭만적인 분위기를 유추하게 될 것이다. 또한 작품의 두 인물이 연인 관계일 거라고 생각하게 될 것이나 이 작품의 배경과 인물들의 표정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점, 형태가 명확하게 나누어져 있지 않다는 점, 여성의 머리가 남성을 침범한 것처럼 보인다는 점을 미루어 보아 보편적인(건강한, 흔하게 떠올리는) 연인 관계와는 거리가 멀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추측에 가장 큰 기여를 하는 것은 바로 작품의 제목, '흡혈귀'다. 


특히나 이 작품을 눈여겨 봐야 하는 이유는, 뭉크의 작품 중 이 제목을 가진 작품(연작)이 많기 때문이다. 뭉크는 왜 '흡혈귀'로 연작을 만들어냈을까? 이는 뭉크의 사랑관을 알 수 있는 작품이자, 뭉크의 연인 관계를 알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그는 독신으로 삶을 거두었지만 사랑하는 여인이 있었다. 


뭉크에게 있어 사랑이란 혼돈 그 자체다. 자신이 사랑했던 여인의 존재란 '나'의 피를 빨아먹는 흡혈귀와 같으며, '나'는 결국 피부가 창백해질 정도로 피를 빼앗기면서도 여인의 곁을 떠날 수 없는 모순적인 존재다.  뭉크에게 사랑이라는 감정은 전혀 좋은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그 감정은 너무나도 거대하고, 자신을 고통스럽게 하며, 존재 자체로 모순인 감정이기 때문이다.


뭉크가 건강한 사랑을 하지 못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 그는 매우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감정을 견디며 사는 사람이었고, 사랑이라는 감정은 이러한 불안의 틈을 비집고 찾아온 것이다. 그는 과민하고, 감정의 동요를 많이 받는 사람이었기에 이러한 사랑과 만남, 이별의 과정을 견딜 수 없었다.  

Edvard Munch, [ The Sun ] 1911

혼돈 속에서 살아남기


그의 작품은 대체로 매우 음울하지만, 오히려 다른 화가들의 기사를 작성할 때보다 최대한 그러한 감상을 덜어내려 노력했다. 그에 대한 서술을 자세히 하면 할수록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흐려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기질적으로 예민하고 우울하지만 천재적인 누군가가 열심히 살다가 결국 세상을 떠나버린 이야기는 더 이상 어떠한 감흥도 줄 수 없다. 또한 그런 이야기를 전하는 건 너무 피곤하고 이제는 불필요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가 유명했던 만큼, 그의 작품이 널리 알려진 만큼, 그의 '다른' 면모를 말할 의무가 있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는 인간의 존재론적 허망감은 매우 피곤하다. 거대한 자연, 시간의 흐름, 그러한 것들은 인간을 끝없이 좌절시킨다. 이런 좌절은 의외로 일상생활에서 쉽게 체험할 수 있다. 좋지 않은 상황에서도 빛을 발하는 소위 '천재' 들의 벽에 절망감을 느끼는 것, 그것 역시 우리에게는 좌절로 다가온다. 


그러나 우리는 그에게서 살아남는 법을 배운다. 혼돈의 삶을 살았던 그를 보고, 그의 재능과 노력의 결실을 부러워할 필요는 없다. 흔히들 천재는 없다고 말하지만, 우리는 '대단한 사람'을 보면 그가 태성적인 천재일 것이라 재단하고는 한다. 


또한 뭉크의 '절규'를 보면 그가 매우 우울한 사람이라 생각하게 된다. 자세히 말하자면, 우울하기만 한 사람일 거라고 멋대로 생각해버린다. 유명한 작품이 전부 절망적인 그림이기에 그가 그런 것만 그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찌 보면 정당하다. 


위 그림을 보라. 찬란 그 자체의 태양, 삶의 찬미를 그대로 보여주는 바위, 윤슬이 비치는 바다, 어렴풋 보이는 녹색(자연)의 아름다움. 이 그림을 보고 있자면 눈물이 날 것 같다. '절규'를 그린 사람은 그 누구보다도 일상의 아름다움을 관찰하고 있었다. 그림으로만 봐도 눈이 부신 풍경이다.


기질적으로 예민하고 불안한 이들이, 혼돈으로 가득한 삶을 살아가는 방법.


예민과 불안은 모든 이에게 존재하고, 우리는 혼돈함으로 인해 종종 많은 것을 나누어버린다. 옳은 것과 그른 것, 좋은 것과 나쁜 것, 이로운 것과 해로운 것, 나누다 보면 본질을 잊어버린다. 이분법적인 구분법보다는 인지가 중요하다. 환경과 나를 나눌지언정, 나에게 더 집중하는 방법. 해내는 것보다 유지하는 방법을. 


그렇게 하면 혼돈은 나의 삶에 도움이 되는 수단이 될 수 있다.  결국, 최선을 다해 그 혼돈을 자신만의 방법으로 다루어야 한다. 회피, 흡수, 정면 돌파 등 이 모든 것과 그밖에 선택지들이 끊이지 않고 놓여 있는 것. 인생에 있어 불가피한 혼돈이자 막대한 고통이다. 그러나 삶에 있어 이러한 인지와 인식은 도움이 된다. 뛰어다니는 이를 보고 부러워할 이유가 없다. 걸어 나가는 일에 노력해야 하고, 중심을 잡는 데에만 최선을 기울이면 어느 새 달리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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