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데일리아트 Jul 25. 2024

'아이, 토냐'의 마고 로비

[스크린 밖으로 나온 악녀들 ⑧]

나쁜 그녀들 세상을 매혹하다


김연아 선수가 활약하기 이전에도 빙상 위를 우아하게 유영하는 요정들은 있었습니다. 동계 올림픽의 꽃이라 불리는 여성 피겨 스케이팅은 꾸준히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 왔습니다. 언론은 선수들을 경쟁 구도로 몰아 넣기를 즐깁니다. 극적이고 도발적인 상황에 그들이 노출될수록 시청률은 오르기 마련입니다. 김연아 선수와 아사다 마오 선수 역시 라이벌로 활동하는 동안 무수한 루머를 양산했습니다. 올림픽 출전권을 두고 다툰 토냐 하딩과 낸시 캐리건 선수 역시 일찍이 라이벌 구도를 형성했습니다. 1994년 동계 올림픽을 앞두고 피겨 스케이팅 역사상 가장 추악한 스캔들이 발생합니다. 영화 <아이, 토냐>(2017)는 사회가 어떻게 악녀를 만들고 소비하는가에 관한 보고서입니다. 한 여성이 스타 반열에 오른 뒤 무너지는 과정을 다룬 반(反) 영웅 서사이기도 합니다. 

영화는 토냐 하딩의 성장과 실패기와 더불어 1994년을 뜨겁게 달구었던 ‘그 사건’에 관한 진실 공방을 다룹니다. 영화 중간 중간 주인공 토냐 하딩(마고 로비), 그의 어머니(앨리슨 제니), 전 남편, 전 코치, 매니저, 언론인의 내레이션이 이어집니다. 그러나 ‘그 사건’을 둘러싼 그들의 기억은 각자 다릅니다. 과연 누가 진실을 말하고 있을까요? 어린 소녀 토냐는 어머니의 손을 잡고 다이앤 코치(줄리안 니콜슨)가 아이들을 가르치는 빙상으로 오릅니다. 스케이트를 신고 서 있는 것만으로도 버거워 보이던 그녀는 어느새 빙상 위를 멋지게 활주합니다. 꼬마 토냐의 재능에 반해서였을까요? 초보자는 맡지 않기로 했던 코치 다이앤은 그녀를 가르치기로 마음먹습니다. 


시상대에 올라선 네 살배기 소녀를 바라보는 다른 선수들의 시선이 곱지 않습니다. 가장 높은 금메달 시상대에 올라섰음에도 토냐는 다른 선수들보다 머리 하나 정도 키가 작습니다. 그러나 무엇이 문제였을까요? 토냐의 어머니 앨리슨은 토냐를 극한까지 몰아 붙입니다. 시간이 아깝다면서 화장실에 보내지 않은 탓에 토냐는 연습장에서 오줌을 지리기까지 합니다. 어머니가 바라는 완벽함은 토냐로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기준입니다. 어머니가 가하는 언어적, 물리적 폭력은 어린 소녀가 견디기에는 너무나 가혹합니다. 설상가상으로 토냐가 사랑했던 아버지마저 어머니와 이혼해서 그녀 곁을 떠납니다. 

폭력에서 벗어나려던 토냐는 더 큰 실수를 하고 맙니다. 연인 제프와의 결혼을 감행해 버린 것입니다. 제프는 다정하고 세심한 연인이었습니다. 하지만 감정 기복이 심하고 폭력적인 남편이기도 합니다. 어머니 곁을 떠나기 위해 결혼했지만 달라진 점은 없습니다. 토냐에게 폭력을 가하던 대상이 어머니에게서 제프로 바뀌었을 뿐입니다. 폭력에 길든 토냐로서는 폭력 외에는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을 알지 못했습니다. 제프 역시 그녀를 사랑할 방법을 알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 와중에도 토냐는 미국에서 최초로 트리플 악셀에 성공한 최초의 선수가 됩니다. 화면은 그녀의 화려한 전성기를 비춥니다. 아름다운 무대복 차림으로 빙상에서 빙글빙글 도는 그녀의 모습은 눈이 부십니다. 하지만 그녀 인생의 절정이 그렇게 빨리 지나가 버리라고 예상한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영화는 보수적인 미국 피겨 스케이팅계의 민낯을 낱낱이 파헤칩니다. 토냐의 점수는 그녀가 보여주는 기량에 비해 좋지 않습니다. 반항아 토냐는 기존의 규칙을 지킬 생각 따위는 없습니다. 클래식 음악 대신 록 음악을 배경으로, 짙은 화장과 튀는 차림새로 무대에 섭니다. 물론 피겨 스케이팅은 다른 스포츠 종목과는 달리 심미성을 중시합니다. 우아한 태도, 의상, 매너 역시 심사 기준의 하나이지요. 그러나 우리는 이미 김연아 선수의 경기 과정을 통해 심사 과정에 영향을 미치는 온갖 잡음과 정치에 관해 알고 있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토냐가 ‘공정하게’ 평가받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마침내 토냐는 경기장을 떠나는 심사위원을 붙잡고 왜 자신의 점수가 최고가 아니냐고 따집니다. “애초에 실력이 문제가 아니에요. 비공식적으로 말하지만, 당신은 우리가 원하는 이미지가 아니에요.” 심판에게서 돌아온 대답입니다. 그렇습니다. 미국 피겨스케이팅계가 원한 여성상은 보수적이고 가정적이며 상냥한 여성입니다. 토냐 하딩은 미국을 대표하는 인물로서는 너무나 거칠고 억척스러웠습니다. 그에 비해 라이벌 낸시 캐리건은 성실하고 사랑스러운 모범 소녀 이미지를 잘 구축한 상태였습니다. 미국 빙상 연맹이 내세우려는 ‘아메리칸 걸’의 이미지에 부합합니다. 


계속되는 가정 폭력으로 토냐는 제프와 이혼합니다. 올림픽 출전을 앞두고 트레이드 마크였던 트리플 악셀마저 실패합니다. 돈도 배경도 없던 토냐는 생계를 위해 식당에서 일하는 처지로 전락합니다. 드디어 토냐에게 두 번째 기회가 찾아옵니다. 코치의 도움을 받아 다시 올림픽 출전권을 따내는 데 도전하기로 한 것입니다. 그러나 토냐는 인생에서 가장 큰 실수를 저지르고 맙니다. 올림픽 출전을 위해 전 남편 제프에게 도움을 청한 것입니다. 이런 토냐의 선택을 이해하지 못할 이유도 없습니다. 토냐와 제프는 깊은 정서적 공생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불건강한 관계였다고는 하지만 제프가 그녀를 위해 애썼던 점 역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게다가 토냐는 한 번도 진정한 사랑을 주고받은 경험이 없습니다. 토냐에게는 늘 마음을 의지할 누군가가 필요했습니다. 비록 그 상대가 그녀를 학대하고 겁박하는 전 남편이라 할지라도요. 

올림픽 진출을 앞두고 마침내 ‘그 사건’이 일어납니다. 제프의 친구이자 토냐의 경호원인 션이 사람들을 시켜 낸시 캐리건을 폭행한 사건입니다. 토냐는 사건의 전모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언론은 이 좋은 먹잇감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토냐는 전 남편을 사주해 라이벌을 폭행한 희대의 악녀로 부상합니다. 사건이 심상치 않음을 깨달은 토냐는 제프를 떠나 FBI에 협조합니다. 그녀에 대한 재판은 경기 이후로 미뤄지지만, 이미 토냐가 받은 스트레스는 극에 달한 상태입니다. 컨디션 난조로 토냐는 올림픽 출전에 실패합니다. 


이후 재판에 넘겨진 토냐는 기소 방해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고 미국 빙상 연맹에서 영구 제명됩니다. 차라리 감옥에 갈지언정 스케이팅을 그만둘 수는 없다며 울먹이는 토냐의 모습에 관객 역시 가슴이 아픕니다. 스케이팅계를 떠난 토냐는 격투기 선수로 전향합니다. 화면은 토냐가 빙상에서 트리플 악셀을 성공하는 장면과 격투기장에서 상대편의 주먹을 맞아 쓰러지는 장면을 교차하여 보여줍니다. 한 인간이 빙상에 세운 왕국의 흥망성쇠는 그렇게 끝이 나고 맙니다. 

과연 토냐는 세상이 만들어낸 악녀일까요? 영화는 첫머리에서 토냐 하딩과 그의 전 남편 제프 길루리의 인터뷰에 의지해 영화를 만들었다고 밝힙니다. 영화는 토냐가 범죄에 관련되었는가에 관련한 실체적 진실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습니다. 어머니와 남편이 가하는 가정 폭력, 공정하지 못한 채점 과정, 조신한 여성을 원하는 사회의 압박이 모두 토냐에게 불리하게 작용했음을 말합니다. 물론 가슴 아픈 개인사와 모순으로 가득한 사회 구조가 개인이 내린 윤리적 선택을 옹호하는 핑계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토냐의 주장대로 그녀가 사건에 전혀 개입하지 않았다면 그녀에게 내려진 판결은 가혹한 면이 있습니다. 토냐의 주장대로 피겨 스케이팅은 그녀의 전부였으니까요. 영화는 철저하게 토냐의 시각에서 그녀의 입장을 항변합니다. 다큐멘터리 형식을 빌린 인물들의 쇼츠는 토냐의 관점과는 다른 또 다른 시선을 보여줍니다. 영화는 폭력에 한 인간이 점차 굴복하게 되는 과정 역시 보여줍니다. 어머니와 남편의 폭력에 길들여진 토냐는 보수적 빙상 연맹이 가하는 제도적 폭력에마저 노출됩니다. 거칠고 반항적인 토냐의 모습 뒤에는 상처 받은 영혼이 숨겨 있습니다. 

마고 로비와 앨리슨 제니가 보여주는 연기 대결은 압권입니다. 올림픽 출전을 앞둔 마지막 경기를 준비하며 화장을 하는 토냐의 표정에는 온갖 심경이 묻어납니다. 앨리슨 제니는 뒤틀린 모성애에 사로잡힌 어머니 역을 완벽하게 소화합니다. 블랙 코미디 형식을 빌은 이 영화는 너무 심각하지만은 않은 어조로 부당한 현실에서 고통 받은 한 여성의 이야기를 보여줍니다. 여전히 우리 사회는 악행을 저지른 아름답고 젊은 여성을 마녀로 만들기를 즐깁니다. 어쩌면 우리 모두 언론이 주도하고 대중이 추종하는 마녀 사냥에 동참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https://www.d-art.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88

작가의 이전글 ⑤ 혼돈에 대하여 - 에드바르트 뭉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